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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모의 국회를 디자인하자

평범한 당신이 원했던 시험에도 합격하고 때 마침 로또복권에 당첨된 행운까지 차지하여 온통 세상이 장밋빛으로 보인다 하자. 더 이상 좋을 수 없지만 다음 날 들른 병원에서 말기 암으로 6개월 밖에 못 산다고 하면 당신의 인생은 어떻게 바뀔까?

신파 드라마에 나오는 흔한 스토리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인생을 사는 대한민국 최고 집단이 있다. 국회의원이다. 단 이들이 의원으로서 배당 받은 시한부 생명은 4년으로 제법 길다. 치열한 공천과 선거과정을 헤치고 나와 꽃다발을 목에 걸고 당선 인사를 할 때가 국회의원으로서 최절정 시기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초등학교 동창생에게 연락이 오고 만나겠다고 하는 사람이 줄을 잇는다. 인생의 황금 시기다.

그런데 국회가 개원하자 바로 다음날부터 ‘시한부 생명’이라는 시계가 돌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정감사를 한 번 치르면 훌쩍 5개월이 지난다. 1년이 지나면 지역구의 같은 당과 다른 당의 경쟁자들이 활동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지역유지와 기업가, 시의원까지 모두 경쟁자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들이 당 유력 실세에 줄을 대고 있다는 말이라도 들리면 불안감은 더욱 커진다.


‘공천’과 ‘선거’라는 질병


다행스럽게 국회의원이란 ‘시한부 생명’은 ‘말기 암’과 달리 그냥 생명을 잃지 않고 부활의 기회가 있다. 부활을 하려면 당의 ‘공천’과 ‘선거’라는 두 고비를 넘어야 한다. 이런 고비를 잘만 넘으면 찬란한 부활이 기다린다. 이렇게 세 번 네 번 부활한 의원은 중진이라는 이름으로 대접받고 도지사나 대통령자리도 넘볼 수 있다.

부활하기 위한 첫 번째 고비인 ‘공천’권은 중앙당의 소수 지도자들과 측근들이 행사한다. 우리나라 뿌리 깊은 중앙 집중은 정당 공천권까지 품에 안아 지방에 있는 시?도당은 의원 공천에 관해 아무런 권한이 없다. 독일은 지구당에서 선출한 후보를 중앙당이 거부할 권한이 없다고 하지만 이건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한나라당이 이번 18대 국회의원 공천을 마감한 2008년 2월 5일, 접수처 여의도 당사는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서 올라온 신청자들로 종일 북적댔다. 공천 경쟁률은 4.8대 1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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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천’ 때문에 의원들은 공천권을 행사하는 당 지도부와 대통령에게 줄을 선다. 처음에 물정 모르는 초선들이 겁 없이 당 지도부나 청와대 방침에 반대 깃발을 높이 올리고 ‘젊은 피’다운 혈기를 과시하지만 대체로 오래 가지 못한다. 한 고개만 넘어가면 ‘공천’이라는 호랑이가 기다리고 있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소신 있는 정치인은 점점 퇴출되고 우리는 공천이라는 깃발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는 집단을 보게 된다.

파워게임에 유달리 관심이 깊은 언론에게 이런 공천 전쟁은 대통령 선거 다음 가는 대목이다. 이명박계와 박근혜계의 흥미진진한 싸움 같은 기사거리가 줄을 이어 지면을 가득 채운다. 언론이 부르짖는 정책 선거나 민생은 이런 파워게임으로 도배한 지면 옆에 고명으로 올라갈 뿐이다. 이런 치열한 공천을 뚫으면 선거가 기다린다.

이 같은 부활을 하지 못하면, 즉 의원이 공천을 받지 못하거나 낙선하면 어떻게 되는가?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의원은 낙선하면 사람도 아니다’란 말이 있다. 정치권에서 원외는 그야말로 찬밥이다. 원외란 춥고 쓰라린 시절을 겪고 국회에 입성하면 더욱 공천에 목을 매게 된다.

누구라도 장수를 누리는 게 좋듯이 국회의원들도 ‘시한부 생명’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민들이 정치인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고, 의원들을 ‘브로커’ 집단으로 보게 되는 이유도 의원들이 부활하기 위해 ‘공천’과 ‘선거’에 목을 매 정작 해야 할 일을 못하기 때문이다.


시민의 시각에서 역지사지를


어떻게 하면 국회의원이 ‘시한부 생명’에서 벗어나 소신 있게 일을 할 수 있을까? 외국처럼 중앙당 지도부가 공천권을 쥐지 않고 주민들의 예비 선거나 당원이 참여하는 코커스를 통해 의원 공천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재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열심히 지역구민을 위해 일하다 보면 어느새 재선하게 된다는 고참 의원과 자치단체장의 경험을 믿고 의정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일도 멋있는 길이다.

그보다 훌륭한 방법이 있다.
국회의원이 ‘시한부 생명’이란 질병에 걸리는 이유는 권력과 특권 때문이다. 권력 감정에 물들지 않으면 권력을 잃어버린 후 겪는 금단현상에도 걸리지 않게 된다. MBC에서 2007년 8월 특별기획으로 방영한, 낙선한 국회의원들의 근황과 회고를 담은 다큐멘터리 ‘정치에세이, 달콤 쌉싸래한 인생’이 그 단면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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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에 나온 전직 국회의원들은 입을 모아 ‘권력과 특권’에 물들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한다.
권력이라는 늪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정한용 전 의원은 국회의원을 그만 두고 나니 긴 잠을 자다 일어난 것 같다고 말한다. 김홍신 전 의원은 권력의 달콤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 국회 현관에 깔린 레드카펫을 8년 동안 단 한 번도 밟지 않았다고 한다. 더 주목해야 할 말이 있다. 한화갑 전 의원은 “우리도 권력을 잡아 봤는데 5년 후를 생각 안 했던 것이 대단히 후회스럽다”고 했다.

모든 권력은 언젠가는 떠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제로 ‘공천’과 ‘선거’라는 질병에 걸려 이 분명한 사실을 간과한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야당 소속 의원일 때는 마구잡이로 남발하는 대통령 사면권을 비판하다가 여당이 되면 현재의 똑같은 사안을 옹호하기도 하고, 여당일 때는 우리 편 사람이 줄을 지어 내려간 달콤한 공기업 낙하산 인사에 입도 벙긋 않다가 야당이 되면 목청 높여 낙하산 인사를 비판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을 국민들은 납득할 수 없다.

현재의 ‘시한부 생명’을 극복하는 방안은 역지사지다. 의원 자신이 부활하지 못하고 시민으로 돌아갔을 때를 대비하여 시민 입장에 서서 국정을 살펴본다면, 진정으로 가야할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의원의 ‘시한부 생명’은 꼭 재선해서 부활해야만 고칠 수 있는 병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시한부 생명’은 ‘시한부 생명’에 만족하고 곧 잃어버릴 특권에 연연하지 않아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국정감사로 바쁜 지금 시민의 시각에서 역지사지를 해보자.


*이 기사는 여의도 통신에 함께 게재했습니다.

”사용자 정광모는 부산에서 법률사무소 사무장으로 10여년 일하며 이혼 소송을 많이 겪었다. 아이까지 낳은 부부라도 헤어질 때면 원수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인생무상을 절감했다.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하며 국록을 축내다 미안한 마음에 『또 파? 눈 먼 돈 대한민국 예산』이란 예산비평서를 냈다. 희망제작소에서 공공재정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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