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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종의 사막을 건너는 법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전직 외교관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정부의 남북관계 운용이 전략적 측면에서 어려움에 직면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그는 최근 남북합의를 무효화한 북한 조평통의 성명 발표와 그 전후 맥락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지 며칠 안됐고 남북관계는 냉각된 상태라 상당히 경각심을 갖고 북한의 행동을 지켜봐야 할 시점이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조평통 성명서가 발표된 후 우리 사회 분위기가 북한 언행에 경계심을 갖는 것 같지 않은 것을 느낄 수 있다. 경제위기가 워낙 심해 북한문제가 뉴스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고 있는 탓이 아닌가 생각한다.

인터넷에서 조평통 성명서 전문을 받아 읽어보았다. 내용도 강경하지만 단어 구사가 험악하다. 이명박 대통령을 지칭하면서 ‘리명박패당’ 또는 ‘리명박역도’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썼다.
대남 협상의 공식창구가 될 새 통일부 장관 지명자에 대한 비난도 극단적이다.

“비핵 개방 3000을 철회하기는커녕 그 대결 각본을 고안해낸 악질분자를 ‘통일부’의 수장 자리에까지 올려 앉힌 것은 우리와 끝까지 엇서나가겠다는 것을 세계면전에 선언한 것이다.”
결코 자리를 같이 할 카운터파트로 인정하지 않을 태세이자, 그 지명권자인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담고 있다.


북한핵 받아들일 수 없는 미국


성명서에서 정말 자극적인 것은 무력충돌의 가능성을 암암리에 내비치는 표현이다. “이제 북남관계는 더 이상 수습할 방법도, 바로잡을 희망도 없게 되었다. 북남 사이의 정치군사적 대결은 극단에 이르러 불과 불, 철과 철이 맞부딪치게 될 전쟁 접경으로까지 왔다.” 상식적 언어감각으로 보면, 뭔가 벌어질 듯싶다. 그냥 으름장만으로 끝날 성명서를 이렇게 만들까 하는 생각이 든다.

”?”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특별한 경각심을 갖지 않는 것은 정부 관계자나 전문가들이 초반에 북한의 행동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쪽으로 해석한 탓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군에서 군사적 이상 징후가 없다는 논평을 흘리거나 전문가들이 ‘조평통의 성명이 아니라 김정일의 말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해석하면서 국민의 경각심도 무뎌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북한이 조평통 성명을 동원해서 남북합의 전면 무효화를 선언한 것은 그들 나름의 의도와 수순이 있을 것이다. 뭔가 몸부림치며 타개해야 할 답답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반증일 수 있다.

상상력을 동원해보면 북한 김정일 정권도 꽉 막혀 있는 셈이다. 남북관계의 교착으로 비료와 식량공급 등 경제문제는 심각하고, 오바마 정권의 등장으로 북미 관계는 새로운 도전을 맞게 되었다. 정권의 경직성과 핵포기 불가능이라는 숙명을 안고 있는 한 미국의 새 정부가 대화모드로 전환한다고 해도 북한 정권 수뇌부의 머리가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

1993년 북핵 위기의 와중에서 김일성이 사망하고 정권을 물려받은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빌 클린턴과 조지 부시 대통령을 상대하여 때로는 벼랑끝 전술로, 때로는 협상으로 15년 간에 걸쳐 위기를 돌파해왔다. 특히 부시 집권 8년 동안 북핵문제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김정일 위원장은 결국 아무 것도 내주지 않고 부시 정권을 퇴진하게 하는 데 이르렀다. 그리고 북한은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 지위를 얻었다. 국제적으로 김정일 위원장이 부시와의 대결에서 완승을 거뒀다는 평가를 받게 되는 이유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은 이제 오바마 정권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맞게 되었다. 김 위원장은 핵보유국의 지위를 인정받고 싶지만 오바마는 그걸 인정해줄 수 없다. 미국은 세계전략상 북한핵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건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변함이 없고 부시든 오바마든 다름이 없다. 이제 김 위원장과 오바마 대통령은 게임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오바마가 집권했기 때문에 북미관계가 잘 풀릴 것이라는 건 너무 낙관적인 전망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해결은 북한의 핵 포기 의도에 달려 있고 북한의 핵 포기는 최후의 선택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오바마 정부가 부시 정부보다는 대화모드로 전환할 것이기 때문에 시작은 부드러울 수 있다.


전략적 유연성이 중요한 시기


오바마 정부의 북핵 해결 기조는 아직 조율 중이다. 북한에게 힐러리 국무장관은 라이스 장관보다 쉬운 파트너일까.
북미 핵협상은 무역협상이 아니라 안보협상이다. 완충이 별로 없다. 실패가 선언되면 군사적 위험이 높아진다. 미국이 “그래, 졌다”며 손을 털고 돌아갈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1993년 클린턴 정부가 영변폭격을 계획했던 위기가 이런 상황을 말해준다.

반대로 협상이 성공하면 북미관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질서가 크게 변한다. 냉각된 남북한 관계와 오바마 정부의 새로운 출범으로 한반도 상황은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이 더욱 심해질 것이다.
내가 만난 전직 외교관의 말대로 “작은 바람에도 흔들릴 수 있는 게 우리의 지정학적 위상”이다. 남북관계에서의 전략적 유연성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질지 모른다.

*이 칼럼은 내일신문에 함께 게재합니다.

올챙이 기자로 시작해서 주필로 퇴직할 때까지 한국일보 밥을 먹었다. 혈기 왕성한 시절의 대부분을 일선 기자로 살면서 세계를 돌아 다녔고 다양한 이슈를 글로 옮겼지만 요즘은 환경과 지방문제, NGO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이제는 글 쓰는 것이 너무 지겹다’고 말하면서도, 지난 100년 동안 지구 평균 기온이 0.6도 올랐다는 사실이 인류의 미래에 끼칠 영향을 엄중히 경고하기 위해서 사막을 다녀온 후 책을 쓰고, 매주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현장에 있고 천상 글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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