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창의 일본 리포트 – 아홉 번째 이야기

편집자 주 / 김해창 희망제작소 부소장은 재팬 파운데이션(japan foundation) 주최로 아시아 7개국 7인의 공공리더를 초청하는 ‘2008 아시아 리더십 펠로우 프로그램’의 한국인 대상자로 선발되었다. 그는 앞으로 9월부터 약 2개월 동안 ‘다양성 속의 일치’를 주제로 일본에서 연구활동을 하면서, ‘일본리포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연구 및 현장 소식을 전할 예정이다.



12일은 아시아 리더십 펠로우들이 자기 나라에 대한 소개를 마치는 날이다. 오늘은 네팔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찬드라 키쇼랄 씨, 인도 하이드라바드대학의 조티마야 샤르마 교수, 그리고 중국 상하이희극학원 구이안 교수 겸 연출가의 순으로 발표를 했다.


네팔 : 공화주의로의 여행

먼저 네팔의 찬드라 씨가 시작했다. 제목은 ‘네팔: 공화주의로의 여행(Nepal: Journey to Republicanism)’이다. 네팔은 남으로 인도와, 북으로 중국 티베트 자치구와 접하고 있는 내륙국으로 특히 남북으로는 폭이 평균 약 193 킬로미터, 동서로는 약 885킬로나 된다고 한다. 물론 세계 최고인 에베레스트를 포함한 히말라야산맥의 산악 및 구릉지대가 대부분이지만 타라이라는 평원도 있다고 했다. 그는 네팔이 인도와 중국 두 강대국 사이에 있어 ‘코끼리와 용이란 두 거인 사이에 낀 난쟁이(Dwarf between Gaints)’라고 표현했다.

[##_1C|1125938876.jpg|width=”400″ height=”300″ alt=”?”|네팔 칼럼니스트 찬드라씨가 파워포인트로 발표하는 모습_##]
네팔의 인구는 현재 약 2,900여 만 명. 1792년 티베트를 두고 중국과 대립 관계에 선 적이 있었고, 1857년 세포이반란 때 영국군의 영향권에 들어갔다고 한다. 1947년 네팔국민회의파가 결성되고, 1949년에는 네팔공산당이 결성되었다. 1951년 해외망명 중이던 트리브반 국왕이 들어와 입헌군주제를 선언하게 된다.

59년에 첫 총선을 실시했는데, 다음해인 60년 마헨드라 국왕이 친위쿠데타로 의회를 해산했다. 1995년부터 2006년까지는 마오쩌퉁을 신봉하는 마오이스트들과 왕국간의 사실상 내전이 계속됐다고 한다. 2001년에 마오이스트들은 정식으로 인민해방군을 창설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2008년 5월 28일, 왕정이 폐지되고 네팔연방민주공화국이 수립됐다. 들어봐도 뭐가 뭔지 잘은 모르겠다. 어쨌든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는 것만은 이해가 됐다.

그는 네팔은 정말 다양성이 풍부한 나라라고 말했다. 오히려 ‘다양성이 너무 심한 게 문제’라는 것이다. 네팔의 언어는 무려 100여개가 될 정도로 다양하다고 한다. 공용어는 네팔어인데 약 48% 정도가 네팔어를 주로 하며, 마이틸리어를 하는 인구가 12% 정도 된다고 한다. 종교는 힌두교가 약 80%로 가장 많고, 그다음이 불교(약 11%), 이슬람교(약 4%) 순이라고 했다. 네팔인의 평균연령은 60.8세이며 글을 읽을 줄 아는 문자해독률은 53.7%라고 했다. 물론 네팔 국립공원의 생물종다양성은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다양하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찬드라씨는 네팔이 왕정에서 민주공화정으로 바뀌는 역사를 그림으로 설명했다. 이 그림은 그의 지인인 카투니스트 라빈 사야미씨가 그렸다고 한다. 2001년 6월 1일에는 네팔 궁정에서 유혈 총격사건이 일어나 왕족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9.11 이후 미국의 반테러작전에 대해 시니컬한 만평도 보여줬다. 미국이 빈 라덴을 찾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동굴을 뒤져봤는데 그 동굴 안에 오히려 쭈그려 앉아있는 사람은 부시라는 것이다. 정작 미국의 시각이 오히려 동굴 에 갇혀있음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2006년 4월, 네팔에선 왕정에 반대하는 인민 봉기가 일어난다. 이는 중산층이 아닌 기층민중이 오히려 정치에 적극 참여해 목소리를 내게 됐다는 걸 의미한다고 했다. 기층에 깔린 마오이즘이 영향을 끼쳤다는 설명이었다. 찬드라씨는 현재 네팔연방공화국의 프라찬다 내각이 지난 8월말에 출범했지만 아직도 네팔은 안정된 민주공화정으로 가려면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_1C|1057433127.jpg|width=”400″ height=”288″ alt=”?”|찬드라씨의 파워포인트 ‘네팔의 고통받는 기층민중의 아픔을 모르는 네팔 정부를 풍자한 내용’_##]
필리핀의 치토 변호사가 질문했다. 네팔에 마오이즘이 확산된 이유가 뭐냐고. 찬드라 씨는 말했다. 마오이즘 군대에 대해선 주류 비주류 논쟁도 있었는데 마오이즘은 민중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는 것이다. 네팔에도 약 13%가 불가촉천민이라고 할 수 있는 최하위계층이 있는데 이들에게 마오이즘이 희망을 줬다는 것이다. 지금 이들은 투표도 가능한데 이들로 인해 마오이즘이 상당한 기반을 갖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90년대 중산층 식자층이 중심이 돼 마오이즘이 많이 확산됐다고 한다. 그러나 찬드라씨는 지금 네팔에선 마오이즘이 오히려 엘리트 지배의 형국이어서 비판을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_1C|1355999757.jpg|width=”400″ height=”267″ alt=”?”|2006년 네팔 인민 봉기 자료 사진_##]
인도의 샤르마 교수가 말했다. “실제로 찬드라씨는 장관 권유도 받았는데 마다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실이냐. 왜 그랬느냐”고 물었다.

찬드라씨는 “2001년 이전엔 누구도 자신의 정치색을 들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내게도 장관 제안이 있긴 있었지만 나는 정치가보다는 칼럼니스트의 길을 걷길 원했기 때문이다. 의사, 변호사 등 유능한 사람들이 나중에 전부 정치가가 됐는데 나중에 6개월을 못 넘기고 쫓겨난 사람도 많았다”고 말했다.

일본의 이수임 교수는 네팔의 경제 엔진은 해외 이민 송금이 많다고 하던데 실상이 어떠냐고 물었다. 찬드라씨는 네팔의 해외송금이 엄청난데 네팔 GDP의 12~13%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현재 300만명 내지 400만명이 인도를 비롯한 외국에서 일을 하는 데 그 중에 불법 노동자도 많아 이에 대한 정부의 고민도 있다고 했다.

나는 이 교수의 질문에 우선 예전에 네팔 여성노동자로 부당한 대우를 받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찬드라 구릉’ 씨에 생각이 나서 미안한 마음에서 그의 얘기부터 꺼냈다. 나는 찬드라 구릉이라는 한국에 와 있었던 네팔 여성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알고 있다고 말했다. 찬드라 구릉은 1990년대 중반에 한국에 외국인이주노동자로 있으면서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은 뒤 계산하는 과정에 말이 통하지 않았는데 그 뒤 정신병원에 보내져 6년 이상을 구금당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그 뒤 한국의 NGO가 적극 나서 모금활동도 하고 네팔 현지까지 가서 사과를 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는 한국이 이런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어서 한국인으로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지금 남북한과의 외교 관계에 대해 네팔은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 물었다. 이에 찬드라씨는 찬드라 구릉 이야기는 잘 알고 있는데 지금은 네팔 지역에서 한국 불교단체의 노력이 두드러져 예전에 비해선 이미지가 좋아진 편이라고 했다. 그리고 네팔은 외교 관계로 보면 남한보다는 역사적으로 북한과 더 연결돼 있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에선 주로 건설회사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한국의 생산물은 일본 제품의 중간 정도로 평가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_1L|1207064908.jpg|width=”200″ height=”267″ alt=”?”|인도의 미래 비전에 대해 말하는 샤르마 교수_##]인도 초강대국인가 엉터리국가인가

이어서 인도의 샤르마 교수가 발표에 나섰다. 그의 제목은 “인도 초강대국인가 엉터리국가인가(India: Supepower or Superhoax?)’였다. 그는 따로 파워포인트를 준비하지 않고 말로 풀어갔다. 지난 2005년 독일 ‘슈피겔’ 지 12월호를 봤는데 인도가 커버스토리를 장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15년간 인도의 변화상을 보여주면서 세계는 인도가 ‘잠재적 초강대국’이라고 평가했다고 했다. 그리고 결론으로 ”인도는 더 이상은 물레가 아니라 PC이며, PC가 간디의 물레를 뛰어넘는 문”이라고 나와 있는 것을 봤다고 했다. 또한 미국무부 콘돌리자 라이스 장관은 2005년 12월 11일 ‘워싱턴포스트’지에 “인디아는 글로벌 평화와 자유를 지지하는 힘의 균형 달성의 전략적 파트너로 미국을 택했다”고 말했고 이에 앞선 10월에 미국무부 번 차관은 인도가 ‘떠오르는 글로벌 파워’로 “21세기의 25년 이내에 세계 5대 강대국”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한다.

그러나 샤르마 교수는 자기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2004년 이래 인도 중산층은 인도가 발전하고 강대국이 되는 문턱에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 빠져들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힌두민족주의정당인 ‘바라티야 자나타 파티(BJP)’는 연정 여당으로 ‘발전하는 인디아’를 내세우며 대국민 캠페인을 펴고 있지만 이는 정치적 선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주식시장의 상승, 외환보유고 증가, IT분야의 발전에 힘을 얻고 있지만 그것은 과대평가라는 것이다. 인도정부는 현재 8~9%의 경제성장률을 내다보고 있고, 낙관론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17억 달러를 향후 4년간 인도에 투자할 것을 약속했고, 인텔이 다음 5년간 1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하는 등 인도의 미래는 밝다고 하지만 실제 꼼꼼히 살펴보면 다르다는 것이다. 인도는 세계 인구의17%를 차지하지만, 세계 경제GDP의 2% 수준이며 세계무역량의 1%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농업은 아직도 GDP의 1/4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 서비스부문은 IT 부문을 포함해 GDP의 절반에 이르는데 대표적인 소프트웨어서비스업체인 NASSCOM이 IT산업으로 2백만명의 고용을 이끌어낸다고 하지만 이것은 신뢰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거대한 인도 인구를 먹여 살리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현재 인도 정부 자료를 봐도 인도의 빈민이 3억 명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농업은 GDP의 4분의 1이며 농업이 인도 고용의 65% 차지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인도의 경우 실제 지난 10년간 GDP는 인도 국민들의 고용 향상에는 크게 도움이 안됐다는 것이다. 산업이 다이나믹해지고 경쟁력이 생겼다고 하지만 실제로 노동력을 흡수하지는 못했다는 게 사실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농업이 나쁘다고(?) 하더라도, 인도를 장기적으로 지탱하는 것은 농업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현재 인도는 빈곤이나 실업률의 실질적인 감소 없이 부적절한 도시화 인프라 구축을 하고 있어 국내 수요가 약하고, 투자가 부족하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2006년 월스트리트저널에 의해 발간된 ‘경제자유지표’에 따르면 세계 국가를 ‘자유’에와 ‘부자유’ 두축으로 크게 놓고 분류를 한 결과 인도가 121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인도는 ‘가장 부자유스런’ 나라에 속했고 투자자에게 ‘매우 조심스럽게 낙관할 것’을 주문하고 있었다고 했다. 경제적 자유도와는 별개로 인도의 인권발전지표는 특히 교육 ,건강, 영양, 주거부분에서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고 했다. 이 부분과 관련한 인도의 정치 사회적 관계는 비관적이라고 했다.

샤르마 교수는 이런 경제성장은 점차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이러한 것은 시위 폭력이나 종교적 반목, 지역 언어적 쇼비니즘, 공공연한 사회적 범죄 등으로 나타날 우려가 높다는 것이다. 또한 인도는 아직 미국과 유럽연합처럼 큰 정치적 지도를 그리는 일은 착수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자칫 인도의 길이라는 게 미국의 마차에 동승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을 수도 있다며 동아시아 차원에서 상호 평화와 협력 구축을 하는 데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인도가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선 현재 부패한 관료주의의 구조를 개선해 투명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두개의 인도가 있다. 물레 하는 ‘간디의 인도’가 있고 새로운 ‘IT의 인도’가 있다. 물레는 아직도 농촌에 존재한다. 자살, 아사, 종교 및 카스트폭력, 남녀 차별 등 많은 문제가 있는데 이러한 것이 또한 글로벌 경제와 연결돼 있다. 이것이 글로벌 경제와 연결돼 있다. IT혁명은 외롭고 한편 이기적인 것이다. 간디처럼 옷을 스스로 만들어 입는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그래야 인도다움이 산다. 마하트마 간디는 두려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의 적은 쿠데타가 아니라 두려움이다. 큰 두려움이 큰 무력을 낳는다는 사실 잊어선 안 된다.”고. 그는 인도의 전통과 역사를 생각하며 IT와 더불어 농업을 살리는 것을 포함해 새로운 시대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며 끝을 맺었다.

치토 변호사가 말했다. “나도 미래를 생각할 때 농업 경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지금도 농민들에게 농업 지원금을 엄청 주고 있지 않느냐.”



중국 한자로 본 유니티 인 다이버시티

중국의 구이안 교수가 끝으로 발표를 했다. 그의 제목은 ‘중국 한자로 본 유니티 인 다이버시티(‘Unity in Diversity’ in view of Chines Characters)’이다. 그는 중국으로 보면 ‘유니티 인 다이버시티‘란 먼저 중국어로 보면 ‘화이부동(和而不同)’과 가장 가까운 의미라고 했다. 화합을 하면서도 똑같지 않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리고 먼저 8월 열린 베이징 올림픽의 CD 동영상을 보여줬다. 그는 장이모 감독의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연출의 발상에 대해 잠시 소개했다. 횃불을 들면서 공중에서 달리는 모습이 나왔다. 사실 나는 이번 베이징 개막식 폐막식을 하나도 제대로 못 봤다.

노래도 보면, 구이안 교수가 중국어를 영어로 대략 소개한 내용을 보면 이랬다. ‘우리는 수 천리를 달려 베이징에서 만났다. 친구여 오라. 네 손을 다오. 너와 나. 마음과 마음. 우리는 한 가족’ 뭐 이런 식이었다.

장이모 감독은 개막식 매스게임에선 물 이미지를 강조했다고 한다. 노장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의 에너지를 느끼게 하겠다는 것이 그의 발상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연극이란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연습한 것을 세계에 보이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베이징올림픽 부위원장이 장이모 감독에게 너무 많을 걸 넣었다고 지적을 해 고집이 센 장이모 감독도 몇 개 프로그램은 빼야 했다는 뒷얘기가 있었다.
[##_1R|1243840300.jpg|width=”200″ height=”267″ alt=”?”| 중국 상해희극학원 연극부 구이안 교수 _##]
그런데 구이안 교수는 장이모 감독이 중국의 힘을 보여주고자 노력을 했는데 나는 진정한 힘은 자신을 낮추는데서 나온다고 했다. 진짜 중국인은 높을수록 물처럼 낮고 부드럽게 행동한다고 했다. 물은 때리면 오히려 물을 맞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우선 중국의 한자로 화(和)라는 글자를 쓰면서 이는 ‘벼 화’자와 ‘입 구’자가 합친 말로, 진정한 평화란 밥을 한숟가락 입에 넣은 상태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익을 말할 때 쓰는 이(利)란 말도 ‘벼 화’와 ‘칼 도’자가 합쳐진 말로 나락을 낫으로 수확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싸움이나 전쟁은 이러한 이익을 추구하는 데서 나오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는 일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하려면 커뮤니티가 중요하고, 또한 커뮤니티가 제대로 되려면 커뮤니케이션이 잘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커뮤니케이션은 무엇보다 멈춰서 듣는 것.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 남이 말할 때 잘 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샤르마 교수가 말했다. “문제는 자본주의, 공산주의와 같은 체제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구이안 교수가 답했다. “사회나 체제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나는 마음부터 하모니로 채우려고 한다. 요즘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자살한다. 죽는 이유가 60가지가 된단다. 65%의 초등학생이 자살충동 받았다고 한다.

중국도 요즘은 돈벌려면 농촌 을 떠나 도시로 가도록 미디어가 이렇게 홍보한다. 나는 인도사람들이 가난을 받아들이면서 만족하는 모습에 대단히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샤르마 교수가 “그건 아니다. 인도사람들도 물론이고 모든 사람은 돈을 더 벌길 원한다.”며 웃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2시다. 아이구 머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다.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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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이야기- 도쿄에 짐을 풀다
두 번째 이야기- 국제문화회관, 도서실부터 접수하다
세 번째 이야기(1) – ALFP 2008 참가자들을 만나다 – ‘일곱 빛깔 무지개’ 아시아 친구들
세 번째 이야기(2) – 환영 리셉션, 소박하지만 알차게
네 번째 이야기-일본 교수가 보는 ‘침몰하는 일본’
다섯 번째 이야기 – ‘ 서던 아일랜드’-오키나와, 필리핀 기지문제 다룬 연극을 보다
여섯 번째 이야기 – 일본 따오기 27년 만에 자연 품으로
일곱 번째 이야기 – 방콕 포스트 기자가 말하는 ‘태국의 민주주의는 지금’
여덟 번째 이야기 – ‘필리핀 정치의 현주소’와 ‘일본의 정체성’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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