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김흥숙의 낮은 목소리

오늘은 집에 가는 날. 안산에 있던 회사가 서울에서 조금 더 먼 곳에 새 공장을 지어 이사하니 저절로 주말부부가 되었습니다. 집에서 다닐 때도 애틋한 남편은 아니었지만, 월요일 새벽 집을 나와 토요일 저녁에야 돌아가니 중년의 아내에게 늘 미안합니다. 금요일 밤엔 내일 집에 가면 함께 산책이라도 해야지 하지만 막상 집에 가면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소파에 드러누워 코를 골게 됩니다. 엿새 동안의 회사생활이 늙어가는 몸엔 과부하(過負荷)인가 봅니다. 잘 만큼 자고 깨어보면 아내가 덮어준 이불이 따뜻합니다. 청년의 사랑이 열병이라면 중년의 사랑은 아늑함입니다.

아내가 뭐라고 할까, 김 전무는 슬며시 마음이 쓰입니다. 자동차 트렁크에 실려 있는 배추와 무 때문입니다. “요즘은 남에게 뭘 줄 때도 조심해야 해요. 마른 건 괜찮지만 생식품은… 다들 바쁘고 사정이 있으니까.” 어느 토요일 밤 10시 넘어 택배로 부쳐져온 굴비를 손질하며 아내가 말했습니다. 그날 아내는 온종일 바빴다고 합니다. 입원한 친구 문병 다녀와서 빨래하고 김치 담고 밥하고… 저녁 먹은 후에 일찍 씻고 자려던 아내가 목욕탕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굴비 두름이 온 겁니다. 아내의 오늘이 그날처럼 길고 힘들면 안 되는데, 김 전무는 조금 걱정이 됩니다.

배추와 무는 새 공장 옆 밭에서 자란 겁니다. 공장 터를 닦을 때부터 공장이 돌아가는 요즘까지 시시때때로 찾아와 시비를 거는 중년 농부가 키웠습니다. 정부에선 중소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고 하지만 김 전무가 보기에 중소기업은 동네북입니다. 전체 사업체 수의 99.9%, 300만 개나 되는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의 수는 1,077만 명이나 되어 전체 고용의 88.1%, 수출의 32%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대기업의 초임이 연봉 3천만 원 안팎인데 비해, 중소기업에선 10년을 있어도 3천만 원을 받을락 말락 합니다. 대통령이 중소기업을 중시하는 얘기를 하며 “정책이 바닥까지 흘러 내려오는 게 관건”이라고 했지만, 중소기업에 있는 사람들은 이 정부 끝날 때쯤에나 정책 변화가 느껴질까,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올해는 특히 힘겨웠습니다. 원유가와 원자재가가 올랐기 때문입니다. 대기업은 완제품 값을 올려 받고 계열회사에 주는 돈은 올려주어도, 하청업체에서 납품 받는 부품 값을 올려주진 않습니다. 곧 다가올 연말 연초에는 오히려 하청업체가 ’원가인하 계획서(CR)‘에 따라 납품가의 3퍼센트를 깎아 주어야 합니다. ‘CR’은 대기업 부품 하청을 받기 위해 중소기업이 입찰할 때 제시하는 것으로, 매년 얼마씩 납품가를 내리겠노라고 약속하는 원가인하 계획서입니다. 3퍼센트든 5퍼센트든 감수할 만한 한도 내에서 가능한 한 많이 제시해야 입찰 받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하청을 받은 후엔 원자재 값이 아무리 올라도 CR에 제시한 대로 깎아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청을 잃게 되니까요.


”?”

그런 와중에 무수한 규제와 관행과 싸우며 공장을 신축하는데 동네 사람까지 찾아와 속을 썩였습니다. 공사소음 때문에, 밤에도 환한 공장의 불빛 때문에 채소들이 밤에 잠을 자지 못한다, 공장 옆 도랑으로 폐수가 흐른다, 별의별 이유를 들어 군청과 경찰에 신고를 해댔습니다. 공무원들이 나와 사정을 살펴보고 폐수를 수거해 검사해보더니 공장에서 잘못한 게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래도 농부가 민원을 그치지 않자 자기네도 그 사람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며 “잘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농부가 엊그제 공장으로 찾아와 배추와 무를 밭 째로 팔아달라고 하는 겁니다. 뻔뻔하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론 먹고 살기 힘들면 누구나 염치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역성을 들게 됩니다. 올해는 배추가 풍년이라 많이 먹어야 한다던 아내의 말도 떠올랐습니다. 농부는 자기 밭의 채소가 공장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불평했었지만 뽑혀온 배추와 무는 매우 튼실하고 싱싱해 보입니다. 채소도 사람처럼 적당히 스트레스를 받아야 영그는 것인가 봅니다.

농부가 다녀간 다음날 아내에게 쓴 이메일에 “배추, 무. 조금 가지고 갈 것 같소”하고 넌지시 알려 놓았지만 직원들이 트렁크에 싣는 걸 보니 ‘조금’ 이상인 것 같습니다. 흙 묻은 배추와 무가 바리바리 실려 들어오니 공장 마당이 평소와 다른 생기로 넘쳐 납니다. 그렇게 보아 그런지 직원들도 자기네가 생산한 부품 박스를 나를 때보다 더 신이 난 것 같습니다. 이래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하나 봅니다. 외국인 근로자들은 김장을 모를 텐데도 덩달아 들뜬 모습입니다.

어디선가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가 한 달에 6천 명씩 늘어난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지만 김 전무네 회사엔 합법적으로 들어온 근로자만이 일하고 있습니다. 문득 짐을 기숙사에 두고 나간 두 명의 외국인 근로자 생각이 납니다. 새 공장 주변은 밭과 논뿐이니 타향살이의 객고(客苦)를 풀 곳이 없습니다. 안산의 어느 공장에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전에는 특정 회사와 계약을 맺고 들어온 근로자는 그 회사에서만 일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근로자 마음입니다. 일이 손에 익을 만하면 나가는 근로자들, 안타깝습니다.

마침내 집에 도착했습니다. 배추가 든 박스를 내리려니 여간 무거운 게 아닙니다. 하는 수 없이 집에 전화를 겁니다. 아들을 불렀는데 아내가 나타납니다. 두 중늙은이가 낑낑거리며 박스 두 개를 옮깁니다. “한 두 포기가 아닌가 보네, 당신 힘들어서 어쩌지?” 김 전무의 말에 “이참에 김장하죠, 뭐. 어차피 해야 하는데… 일단 오늘 저녁은 배추국!” 아내가 웃습니다. 으휴, 다행이다. 마음이 편해진 김 전무는 아내와 차 한 잔을 마신 후 소파에 가 눕습니다.

얼마나 잤는지 구수한 배춧국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목욕탕 욕조 속에 2~4등분으로 나뉜 배추들이 가득합니다. 언제 먹어도 시원한 배춧국, 배불리 먹고 나니 아내가 김장에 쓸 쪽파를 사러간다 합니다. 이럴 땐 무조건 따라 나서야 합니다. 가로등에 비친 은행잎이 제법 노랗습니다. “아까 당신 코 고는 소리, 굉장했어요.” “저런, 미안해.” “미안하긴, 내 귀엔 음악 소린데.”

오랜만에 손 안에 들어오는 아내의 손.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저 배추들이 이 손 덕에 맛깔스런 김치가 될 겁니다. 지금쯤 공장 식당에서도 김장 준비가 한창이겠지요. 김치가 맛있게 익어가는 동안 누군가의 손이 공장 살림을 좀 여유롭게 만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농부의 불평소리도 음악소리로 들릴지 모릅니다. 아니 어쩜 이제 농부의 불평소리가 그칠지도 모릅니다. 신문지 위에 쪽파를 풀어 놓은 아내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 김 전무는 다시 소파에 몸을 풉니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코고는 소리가 더 커질 수도 있겠지만, 아내가 ‘음악 소리’로 들어준다니 걱정이 없습니다.


*이 칼럼은 자유칼럼에 함께 게재합니다.


코리아타임스와 연합통신 (현재의 YTN) 국제국 기자로 15년,
주한 미국대사관 문화과 전문위원으로 4년여를 보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글을 쓴다.
현재 코리아타임스, 자유칼럼, 한국일보에 칼럼을 연재중이다.
저서로 “그대를 부르고 나면 언제나 목이 마르고”와 “시선”이 있고, 10여권의 번역서를 냈다.

김흥숙의 글 목록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