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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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나의 가치와 경험이 세상에 보탬이 될 수 있을까? 여기, 어떤 개인적 경험을 통해 앞만 보고 달리던 삶의 방향을 전환한 한 사람이 있다. 11월 11일 소셜 디자이너 스쿨 5강 강연자 백경학 푸르메 상임이사다. 그는 작은 친절과 자선이 세계를 변화시킨다고 말하며 한국의 재활시스템을 선진화할 방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소셜 디자이너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질문이다. 한때 그는 기자였다. 사실을 사랑하고 사건사고만을 골라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사람이었다. 술을 먹어도 한잔 더 먹고, 일을 해도 한 시간을 더 하는 독종이기도 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앞만 보고 질주하던 삶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차선이 바뀌어 버렸다. 그것도 완전히.

불행은 나에게도 일어난다

기자에겐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다. 사건사고가 있어야 지면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23명이 사고로 죽고, 185명이 암으로 죽는다는 사실 역시 ‘백경학 기자’에겐 하나의 ‘사실’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불행이라는 것이 바로 곁으로 다가왔다.

하루 서너 시간도 겨우 잘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던 기자 시절, 몸도 가정도 모두 망가져 갔다.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는 고민 끝에 가족과 함께 독일로 유학을 갔다. 부인과 함께 여행도 다니고 즐겁게 생활하면서 뒤늦게 가정을 찾았다. 유학생활이 끝날 즈음, 그는 부인과 함께 영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뜻하지 않게 교통사고를 당한다. 누구에게나 불행이 일어나지만 자신에게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독일에서 세례를 받고 ‘미카엘’이란 세례명을 받았다. 그리고 운명의 그날, 그의 차를 들이받은 사람도 미카엘이었다. 그는 부상이 심하지 않았지만, 차 뒤에 서있다 돌진해오는 차에 온몸을 받쳤던 부인은 상태가 심각했다. 부인은 바로 응급실에 실려 갔고, 곧 수술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몇 시간 뒤에 한 쪽 다리의 무릎 밑이 없어진 채 나타났다. 큰 충격이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땐 다리가 문제가 아니라 이 사람이 살아날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만 살려준다면 내가 뭐든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어진 8년간의 괴로운 법정공방. 다행히 그가 찍었던 사고현장 사진 덕에 승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부인은 장애를 입은 뒤였다. 영국에서 당한 사고는 평범하던 그의 삶을 한 순간에 뒤바꿔놓았다.

작은 친절과 자선이 세계를 변화시킨다.

부인의 재활치료를 받으면서 그는 영국과 독일의 의료시스템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영국의 의료 시스템은 낙후되어 있지만 간호사들은 매우 헌신적이었다. 24시간 환자 옆에 붙어서 치료를 해주며 돌봐주었다. 그들을 보면서 혼신의 힘을 바쳐서 누군가를 살린다는 게 무엇인지를 배웠다. 일반 시민들의 의식도 대단했다. 사고를 당하자 인근에 살던 영국인 가족이 가장 먼저 달려왔다. 그들은 어떤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으며 자진해서 아이를 돌봐주었다. 독일에서도 도움의 손길은 끊이지 않았다. 퇴원해 독일로 가니 독일 가톨릭 자선 단체 측에서 사람들이 나와 집안일과 육아를 거의 도맡다시피 했다. 오직 부인만 돌보라는 배려였다. 의사부터 일반 시민들까지 ‘사람 우선’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간에 중심을 두는 유럽의 사회보장제도를 깊이 체험하고 귀국했다.


재활후진국, 한국

그러나 한국 사회는 달랐다. 가장 좋은 병원 중 하나라는 서울의 모 병원에 갔지만, 3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답변만 들었다. 다행히 1주일 만에 1인실 병동에 자리가 나서 입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환자위주로 돌아가던 외국과 달리 한국병실에는 24시간 TV가 켜져 있었고, 음식도 만들어 먹고, 밤중에도 술 취한 사람이 문병 와서 시끄럽게 하는 ‘아비규환’이었다. 자제해달라고 원장을 직접 찾아가 항의도 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예상 밖이었다.

“여기는 한국입니다. 매년 30만 명이 장애인이 되어가고 있는데 이 병원에 입원하는 것만으로도 축복입니다.”

백 이사가 생각하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교육과 의료를 정부가 책임지고 있느냐의 여부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준비를 해야 하느냐, 아니면 정부가 해주느냐, 가 척도가 된다는 거다. 재활병원에서 느낀 건‘우리나라가 참 후진국이구나’였다.

왜 우리사회에는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 그런 병원을 만들지 않는가? 자문했다. 장애인도 끄집어내면 잠재력이 무한하다. 재활은 장애인의 삶의 질을 다르게 만들 수 있지만 그런 제반 시설이 갖춰지지 않았다. 장애인의 벽을 넘자고 그저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정말 장애인들에게 절실한 게 무엇인지 파악하고,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요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선진국이다.

그는 고통 받는 부인을 보면서 환자가 최우선이 되는 그런 병원을 만들어보겠다고 다짐했다. 몇 명 입원 못 한다 할지라도 ‘우와, 이런 병원이 있구나!’ 소문이 나면 전체 모습들이 바뀌어 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재활병원을 개인-지자체-정부가 함께 이어나가며 지역사회까지 함께 동참한다면 우리 사회가 한층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국가가 의료 서비스를 책임져 주지 않으면 사회운동으로라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백 이사는 2004년, 푸르메 재단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사회복지’나 ‘정책’ 같은 이론이나 거대담론보다 직접 피부로 느꼈던 경험이 그에게 푸르메 재단을 만들게 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포기할 수 없는 꿈, 푸르메 재단

급한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일을 시작하기는 했는데, 비영리 병원을 만들려면, 뒷받침해줄 수 있는 자산을 가진 의료법인이나 재단이 필요했다. 8년간의 법정공방 끝에 받은 합의금 중 절반을 재단에 내놓았다. 나머지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까 궁리하다가 한 가지 사업계획을 떠올렸다. 맥주를 좋아하기도 한데다, 독일 유학시절 맥주양조학을 전공한 친구가 생각났던 것이다. 친구에게 연락해 함께 맥주공장을 만들기로 하고 투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미쳤다며 말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자신을 믿어주고 투자해준 사람들 덕분에 ‘옥토버훼스트’라는 맥주전문점을 만들었다. 다행히히 사업은 망하지 않고 잘 굴러갔다. 시작이 반이라고 일단 일을 벌이고 나니 아름다운 사람들이 나타났다.

어떤 이는 평택에 있는 땅을 기부하겠다고 선뜻 나섰다. 그 역시 장애인이었다. 백 이사는 지금까지 일하면서 1년 동안 만난 사람들이 기자 10년 할 때 만난 좋은 사람보다 훨씬 많다고 말한다. 그는 부자보다 겨우 먹고살 만한 사람들이 더 많이 베푼다는 걸 절감하고 있다. 재단운영이 쉽지 않지만, 이제는 소명의식까지 느낀다. 자신의 길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푸르메 재단이 꿈꾸는 병원은 그 자체로 자생력을 가지는 것이다. 저소득층을 위한 저렴한 병원을 세우는 것보다 삼성병원처럼 고급화해야고 한다고 본다. 시설도 좋고, 서비스도 좋게 개선해서 남긴 이윤으로 나머지 30%의 저소득층을 돕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으려면 어떤 병원을 세워야 할까? 여전히 그것은 풀어야 할 과제다.

1시간에 걸친 강연이 끝나고 질문이 이어졌다. 한 수강생이 ‘(재단을 운영하는)노하우를 나눠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모 기업에 기부를 부탁하러 갔다가 실패한 경험을 대신 얘기해주었다.

“같이 간 주교님께서 ‘우린 앵벌이야’ 하시더라고요. 앵벌이는 돈을 얻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 거라고, 그래도 우리는 명분을 가지고 있는 앵벌이니 실망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받더라도 떳떳하게 받고 정당하게 사용하면 되고 못 받더라도 실망하지 말라고요. 그때 많이 깨달았어요.”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백경학 이사는 푸르메 재단의 캐치프레이즈, “Don’t give up(돈 기브 업)”을 “돈기부하세요”로 재치 있게 바꾸어 말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여러분, Don’t give up! 포기하지 마시고, ‘DON’ give UP 돈도 많이 기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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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재활이라는 가치로 대국민 캠페인을 한다면

강연이 끝나고 수강생들은 ‘재활이라는 가치로 대국민 캠페인을 한다면?’이라는 주제로 모둠별 토론을 진행했다. 수강생들은 고난이도의 주제라 생각하고 잠시 난감해하는 것 같았지만, 곧 활발하게 의견을 주고받으며 토론에 빠져들었다. 아이들이 회사 유니폼을 입고 5초간 춤추면 다음 5초간 회사 를 홍보하는 광고, 나눔과 재활을 주제로 한 UCC 공모, 퍼포먼스 축제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와 백 이사가 “역시 희망제작소”라고 감탄케 했다.

다음 주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인문학 서점으로 유명한 ‘인디고 서원’의 허아람 대표가 “깨어있는 마음, 교육 운동의 지평을 넓히다”를 주제로 강연한다. 가열찬 열정으로 시작된 제 2기 소셜 디자이너스쿨, 그 뜨거움은 계속된다.





[소셜디자이너스쿨 2기 이야기]

1. 희망바이러스에 감염될 각오를 하다
2. 오늘도 진주조개는 생생한 심장을 가진 어부를 기다린다
3. 소셜 디자이너, 지역희망의 현장을 만나다
4. 준비만 된다면 변화를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