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재의 희망편지

안녕하세요.
이원재입니다.

제게는 ‘말리카’라는 이름의 네팔 친구가 있습니다. 지난해 일본에서 진행된 ‘Asia Leadership Fellow Program’에서 동료로 만났는데요. 인도 남아시아대학의 인류학 교수로 일하는 친구입니다. 말리카는 영국 국영방송인 BBC와 일한 경험도 있고, 네팔 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했던 연구 프로그램은 아시아의 전문가 7명이 두 달 동안 아시아 협력을 주제로 토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세미나 중, 바로 그 말리카가 발표하려던 직전에 도쿄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4층에 있던 세미나실 탁자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세미나에 참석 중이던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다행히 지진은 곧 멈췄고, 사람들은 침착해졌습니다. 지진을 많이 경험했던 일본인들은 오히려 차분했습니다. “이 건물은 내진설계가 되어 있어 괜찮다.”는 말을 가장 먼저 꺼낸 것도 일본인이었습니다.

지진 경험이 많은 일본인들과 달리, 지진을 경험하지 못했던 나라 사람들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막 발표를 시작하려던 말리카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지진을 생전 처음 경험한 말리카는 걱정스런 얼굴로 “대피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지금 네팔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사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순간이었지요.

네팔 지진은 대참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연재해 자체도 문제이지만 그 뒤 국가가 대처하는 방식이 더 문제가 되고 있지요. 그런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말리카와의 대화 중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

네팔의 정치상황은 매우 열악합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왕정을 유지해왔는데요. 오랜 왕정을 깨뜨리려는 민주화운동이 1990년대부터 본격화됐습니다. 2006년 드디어 왕정이 무너지고, 민주화의 계기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내분이 일어났지요. 신자유주의적 정치세력, 공산주의자들, 모택동주의자들이 다들 찢어져서 헌법 제정에 합의를 못하고 맙니다. 그래서 네팔은 지금까지도 헌법이 없습니다. 왕은 끌어내렸지만 어떤 나라를 만들지, 어떤 사회시스템을 구축할지 정치적 합의를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정치의 실패입니다.

국가 전체를 통합할 수 있는 중심이 없다 보니까 늘 내분에 시달립니다. 평지에 살며 힌두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산악지대에 살며 네팔어와 네와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갈라져 있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는 여전히 부족한 물과 전기입니다. 히말라야로 유명한 나라이지만 정작 네팔 국민 대부분은 저소득층이기 때문에 등산하러 갈 여유가 없고, 카스트 제도가 존재하는 계급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네팔 정부는 관료주의에 빠져 있고, 불필요하고 비합리적인 규제가 만연해 있다고 합니다. 인도와 맞닿은 국경지대를 지날 때 사륜차량은 통관 절차를 거쳐야 해서, 다들 이륜차량인 마차나 수레에 물건을 가득 싣고 지나간다고 하는군요.

이번 지진 뒤에 국제 NGO들로부터 답지한 구호물품도 정부가 제대로 배분해주지 못하고 있어 비판받고 있기도 합니다. 이를 견제해야 할 야당과 노동조합은 스스로의 기득권을 지키는 데 급급해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부와 정치가 작동하지 않다 보니, 재난에 미리 대비하는 인프라가 부족했던 것도 물론입니다. 재난 뒤 구호작업도 더딘 것이 당연합니다. 원래부터 부족하던 물과 전기는 이제 완전히 끊긴 곳이 다수입니다.

자연재해는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연재해에 대비하고 이를 수습하는 시스템은 갖출 수 있습니다. 그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를 통합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정부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기득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사회 의제를 형성해야 하는 정치의 역할입니다.

네팔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능력한 정부와 정치 체제가 한 번의 참사와 복구로 끝나야 할 재해를, 두 번의 참사로 만들고 있습니다.

일본에서의 경미한 지진에 깜짝 놀랐던 말리카는, 지금 고국의 상황에 마음 아파하며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네와족인 말라카는 국제단체(세계네와기구)를 통해서 네팔을 도우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기 클릭)

인도 델리의 네팔인 학생들과 함께, 인도를 통해 네팔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입니다. (자세히 보기 클릭)

그는 아직 인도 델리에서 네팔을 돕고 있지만, 얼마 뒤 네팔 카트만두로 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외에 네팔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희망제작소 홈페이지에 소개해뒀습니다. (자세히 보기 클릭)

네팔 아이들도 한국 아이들처럼 수건 돌리기를 하며 놉니다. 말리카의 모국어인 네와어는 빨리 말하면 한국어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네팔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과 가까운 나라입니다. 네팔 아이들의 아픔이 우리 아픔처럼 느껴집니다. 이 아이들이 하루 빨리 상처를 딛고 일어서기를 기원합니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될 때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네팔 정부와 정치 체제가 변화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사회는 재난에 대해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지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됩니다. 정부와 정치는 어떻게 사회를 통합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기득권을 갖지 못한 이들을 돌보고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될 때면, 지금보다는 좀 더 나아져 있어야겠지요?

희망제작소 소장
이원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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