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개

경제는 13위, 싱크탱크는 순위 밖?

2012년 1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교 ‘싱크탱크와 시민사회 프로그램’이 발표한 세계 싱크탱크 순위에 따르면 한국의 싱크탱크 중에는 세계 30위권 안에 드는 연구소가 단 1곳도 없다. 싱크탱크의 숫자로 따질 때도 한국은 케냐(53개 20위), 볼리비아(51개 24위)에 못 미치는 35개로 아예 순위에 포함되지 못했다. 경제 규모 13위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은 이 초라한 성적표는 알맹이 없는 한국의 정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독일 싱크탱크 산책-대안의 정책을 만드는 생각 공장을 가다》는 한국의 정책 생산 방식과 싱크탱크 체제의 문제점, 개선 방안을 고민하면서 독일의 싱크탱크 체제를 연구한 책이다. 독일은 싱크탱크 체제에서 정부의 비중이 크다는 점에서 한국과 가장 비슷한 나라로, 싱크탱크의 세계 지도를 그리면서 우리의 길을 찾는 과정에서 반드시 검토해야 할 모델이다. 10년 넘게 독일에 살면서 사회학을 연구한 저자 박명준은 ‘정책’과 ‘정치’를 나누지 않는 독일 정책 생산의 인프라에 관심을 가졌다. 막스플랑크 사회연구소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희망제작소가 주관한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해 독일의 주요 싱크탱크 14개를 골라 자료를 수집하고 직접 찾아가 인터뷰를 하고, 위치와 외관, 역사와 정체성, 조직과 인력, 재정과 연구, 행사와 간행, 그 밖의 활동을 꼼꼼하게 정리해 입체적인 지형도를 그렸다.

다양성이 살아 있는 독일 싱크탱크 생태계 들여다보기

1장에서는 먼저 싱크탱크가 무엇이며 정책 지식의 생산 방식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살핀다. ‘싱크탱크’는 학술적 연구와 분석을 토대로 한 지식을 생산하되, 순수 아카데미즘에 머물지 않고 그 사회가 마주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문적인 정책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하며 정책 결정 과정에 직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관을 말한다. 이런 정의 아래 한국 싱크탱크 체제를 살펴보고, 이 책의 연구 방법론을 소개한다.

2장에서는 오늘날 독일의 싱크탱크 체제를 낳은 사회경제 환경을 살펴보고, 독일의 싱크탱크를 ‘비대학 학술 싱크탱크’, ‘정부 부처 산하 싱크탱크’, ‘정당 싱크탱크’, ‘기업 싱크탱크’, ‘이익단체 연계 싱크탱크’, ‘소규모 독립 싱크탱크’ 등 6가지로 나눈다.

3장에서 다루는 ‘비대학 학술 싱크탱크’는 운영비의 대부분을 정부에서 지원받지만 어디까지나 자율적인 학술 연구를 추구하며 특정한 정부 정책을 개발하거나 옹호하는 활동과 철저히 거리를 둔다. 대학 외부에 있으면서도 대학과 일정한 연계를 지닌 것이 특징이다. 민주적 규제와 거버넌스 연구의 중심지인 막스플랑크 사회연구소(MPIFG), 독일과 유럽 경제 분석의 특급 브레인으로 꼽히는 경제를 위한 연구소(IFO), 기후변화를 탐구하는 간학제적 연구센터인 포츠담 기후영향연구소(PIK), 평화와 갈등 연구를 위한 헤센 재단(HSFK)를 찾아갔다.

4장에서는 정부의 정책 개발을 위해 부처 산하에 설치한 ‘정부 부처 산하 싱크탱크’를 다룬다. 정부 산하 기관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국책 연구소와 비슷한 점이 있지만, 일정한 독립성을 유지하며 외부와 활발히 교류한다는 점은 다르다. 노동시장 연구의 최강자로 평가되는 노동시장과 직업 연구를 위한 연구소(IAB), 종합적인 도시 정책을 생산하는 도시개발연구소(ILS)를 방문했다.

5장은 독일의 주요 정당들이 자신들의 가치 지향을 담은 재단을 세워 운영하는 ‘정당 싱크탱크’를 살펴본다.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의 세계적 전파자인 사회민주당의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FES), 기독교 민주주의와 사회적 시장경제의 메카로 불리는 기독교민주당의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KAS), 녹색 정책을 생산하는 녹색당의 하인리히 뵐 재단을 다룬다.

6장은 독일의 기업 관련 재단 중에서 싱크탱크로 이해될 수 있는 대표적인 ‘기업 싱크탱크’를 살펴본다. 독일의 유명한 종합 미디어 그룹인 베텔스만이 세운 공익 지향형 재단 베텔스만 재단과, 정밀 기계, 자동차 부품, 전기 제품 생산 등으로 유명한 로베르트 보쉬 재단을 찾아갔다.

7장에서 다루는 ‘이익단체 연계 싱크탱크’는 독일의 주요 이익단체 안에서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부서다. 독일 재계의 이해를 대변하는 사용자 단체와 경제 단체에 밀접히 관련됐지만 공익을 지향하는 쾰른 경제연구소(IWK)와 독일노총 산하의 공익 재단인 한스 뵈클러 재단(HBS)을 살펴본다.

8장에서는 앞의 대규모 조직들과 다른 시각에서 정책과 정치를 바라보는 ‘소규모 독립 싱크탱크’를 다룬다.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사회를 목표로 정책을 개발하고 공론화하는 베를린폴리스, 신자유주의에 맞서 대안적 세계 경제 질서를 그리는 위드(WEED)를 분석했다. 마지막으로 9장에서는 독일과 한국의 정책 생산 방식과 특성을 비교하면서 한국 싱크탱크 체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탐색했다.

국가 독식형 싱크탱크를 넘어 다양한 정책이 공존하는 민주주의로

한국 싱크탱크 체제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강력한 국책 연구소다. 규모가 크고 세계적인 연구 기관으로 꼽히는 한국개발연구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등은 모두 국가 테두리 안에 놓여 있으며, 관료를 1차 고객으로 삼아 정책을 만든다. 독일 싱크탱크 유형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비대학 학술 싱크탱크, 정부 부처 산하 싱크탱크, 정당 싱크탱크는 정부에서 재정의 대부분을 지원받는 국가 싱크탱크라고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국가의 구실이 작은 미국식 모델에 견줘 독일과 한국의 싱크탱크 체제에서는 국가의 비중이 크다.

그러나 독일의 국가 싱크탱크는 운영에서는 사실상 국가에서 독립돼 있다고 할 만큼 높은 수준의 자율성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한국과 다르다. 독일 역시 사민사회 기반 독립 싱크탱크들이 영세하고 취약하지만, 국가 싱크탱크들이 공공성을 강하게 지향하고 자율적인 정책을 생산하면서 그 공백을 메운다. 국가의 비중이 크지만 결코 독식하지 않고 후견인으로 자리매김하는 독일의 싱크탱크 체제는 ‘사회는 여전히 약하고 국가와 재벌은 더 강해지는’ 한국 민주화의 병폐를 해결할 대안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국의 정책 생산 방식과 싱크탱크 체제 개혁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알맹이 있는 정치를 만들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 길로 가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첫걸음이다.

■ 목차

추천의 글|‘숲’과 ‘나무’를 모두 만끽하는 산책의 맛 (홍일표)

서문|정치와 정책은 하나다, 독일에서

1장 좋은 정책, 무엇을 생산하고 어떻게 유통할 것인가
정책 지식의 생산 방식과 싱크탱크 체제
한국 싱크탱크 체제의 특성과 한계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2장 생각 공장 또는 아이디어 뱅크 (독일의 싱크탱크 생태계)
독일의 사회경제 환경과 싱크탱크
독일 싱크탱크 약사
분화와 증식 ― 독일 싱크탱크의 유형

3장 국가도 대학도 못하는 일을 한다 ( 비대학 학술 싱크탱크)
예산은 주고 낙하산은 안 주는
민주적 규제와 거버넌스 연구의 중심지 ― 막스플랑크 사회연구소
독일과 유럽 경제 분석의 특급 브레인 ― 경제를 위한 연구소
기후 변화 문제를 탐구하는 간학제적 연구 센터 ― 포츠담 기후영향연구소
민주주의, 평화, 갈등의 과학적 연구 기지 ― 평화와 갈등 연구를 위한 헤센 재단
연구가 먼저, 정책 자문은 다음

4장 ‘의무 연구’에도 맞춤 해답은 없다 (정부 부처 산하 싱크탱크)
정부 비판을 뺀 정책 개발?
노동시장 연구의 최강자 ― 노동시장과 직업 연구를 위한 연구소
종합적인 도시 정책을 생산한다 ― 도시개발연구소
‘의무 연구’와 좋은 정책의 공존을 위해

5장 정책이라는 수단으로 가치를 담는 그릇 (정당 싱크탱크)
정당에 휘둘리지 않는 정당 싱크탱크
노동조합과 사회민주주의의 세계적 전파자 ―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기독교 민주주의와 사회적 시장경제의 메카 ―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
녹색 정책의 급진적 전파자 ― 하인리히 뵐 재단
민주주의, 정치 교육, 세계 시민

6장 담론과 정책을 생산하는 세련된 사회 참여 (기업 싱크탱크)
책임의 회피가 아니라 책임의 실천
기업 효율성과 사회 혁신을 향한 의지의 살아 있는 결합체 ― 베텔스만 재단
글로벌 대기업의 넓은 네트워크에 기초한 간접 싱크탱크 ― 로베르트 보쉬 재단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싱크탱크

7장 ‘단체의 나라’를 이끄는 사적 이해 정부 (이익 단체 연계 싱크탱크)
이익단체의 사익과 공익 사이에서
독일 경제계를 대변하는 공익 지향적 정책 브레인 ― 쾰른 경제연구소
노동자의 시각에서 좋은 정책을 생산한다 ― 한스 뵈클러 재단과 경제사회연구소
공동의 이성으로 이해 정치를 규제하라

8장 정치와 정책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소규모 독립 싱크탱크)
작지만 강한 차세대형 싱크탱크
‘미래를 위한 정치’를 설계하는 젊은 싱크탱크 ― 베를린 폴리스
신자유주의에 맞서 대안적 세계 경제 질서를 그리는 싱크탱크 ― 위드
정책 시장의 중소기업이 생존하는 길을 찾아

9장 국가 독식형에서 자율성과 다원성으로
비교와 함의
국가 독식형 싱크탱크를 넘어
돈과 내용을 분리하라 ― 자율성의 의미
갈등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다 ― 다원성의 가치
질적으로 새로운 제도적 기획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 부록

■ 저자 소개

박명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쾰른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노사관계, 노동시장 제도, 사회 정책, 거버넌스, 시민사회 등에 주로 관심이 있다. 비교론적 관점에서 한국과 동아시아를 분석하는 학술 연구와, 독일을 포함하는 유럽의 시스템과 실천에서 한국이 얻을 교훈을 찾는 정책 연구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현재 베를린 자유대학교 한국학과 전임연구원이며, 희망제작소 객원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사회적 영웅의 탄생 –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사회적 기업가 14인을 만나다》(2011)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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