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도시? 문화없이 어림없다

<박원순의 희망탐사 56>

조금은 독특한 이름의 ‘배다리 마을’은 인천에 있다.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이름이 꽤나 유명하다. 문화와 예술의 마을이기도 하고, 역사와 문화가 산적해 인천의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불리기도 하며, 헌책방 골목이 유명한 책의 마을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려 마을이 갈라질 위기에 놓이면서 지역공동체운동과 문화ㆍ환경운동이 함께 벌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배다리 마을을 찾은 지난 11월 24일에도 이곳에서는 반대시위와 이를 문화운동으로 승화시키는 지역공동체 문화가 만난 혼잡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배다리 마을한복판을 관통하는 8차로의 도로건설을 반대하는 시위로 소란스럽기도 하고, 깊은 역사의 내음이 가득 풍겨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인터뷰를 하고나니 사실상 그 둘은 ‘생태지향’, ‘주민이 함께하는 지역문화의 형성’ 등 한 방향을 지향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배다리’라는 이름은 바닷물이 드나들던 수로에 해산물을 실은 배달이 철교 아래까지 드나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1897년 경인철도 공사가 처음 시작됐고, 우리나라 최초로 1892년 개교한 사립학교인 영화학교, 1907년 개교해 올해 100주년을 맞은 창영초등학교, 1920년 문을 연 인천양조장이 다 이곳 배다리 마을에 있다. 배다리 철교 모퉁이에 있는 헌책방 거리도 40여 년간의 역사를 자랑한다.
[##_1L|1272614054.jpg|width=”307″ height=”414″ alt=”?”|▲ <스페이스 빔>을 이끄는 민운기 문화기획자. ⓒ희망제작소_##] 그렇게 100여 년이 지나고 이곳은 곧 문화와 예술로 열어가는 지역공동체 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곳에서 인천의 대안예술공간, 대안예술커뮤니티, 대안예술운동을 이끌고 있는 ‘스페이스 빔’의 문화기획자 민운기 씨를 만났다. 스페이스 빔이 있는 자리는 1920년 문을 열었다는 그 인천양조장 자리다.

아직도 문패에는 ‘인천양조주식회사’라는 간판이 서있고, 품질향상이라는 팻말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공간 곳곳에 술 냄새 가득한 시설과 장치들이 자리잡고 있다. 배다리 마을의 이야기와 지역 예술ㆍ문화의 이야기, 서로 다르지만 결국은 하나로 귀속되는 그 이야기는 처음에 스페이스 빔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됐다.

스페이스빔, 배다리 마을로 가다

글을 시작하면서부터 막막하다. 아니 그 막막함은 그들을 만나려한 순간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스페이스 빔의 정체를 어떻게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인천미술계의 대표적인 대안미술공간, 대안미술커뮤니티라고 불리는 스페이스 빔은 지난 1995년 ‘지역미술연구모임’으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스스로 공부하며 계간지를 발간했고 다양한 전시를 기획했다. 그러던 중 그들이 꿈꾸는 대안미술을 옮길 대안의 공간이 필요해지면서 갤러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공간은 단순히 작품발표 공간인 갤러리를 넘어서 지역사회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역할을 고민하고 대안을 만들어내는 공간이길 원했다. 이에 스페이스 빔은 전시기획, 작가지원, 미술전문지 발간, 아카데미 운영 등의 프로그램으로 일반인과의 거리를 좁히면서 지역사회의 대안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민운기 씨가 들려주는 스페이스 빔의 시작은 조촐했다.

“학교를 마치고 다시 인천에 내려온 게 1995년입니다. 서울에서 생활하다 다시 인천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열악한 곳이 이곳이더군요. 그래서 근본부터 따져보자, 우리 스스로 준비해서 다름을 만들어보자며 지역예술모임이라는 스터디모임을 꾸렸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공부하는 일을 2년 하다가 1997년부터 미술전문 계간지를 만들었어요. 우리가 가진 고민들을 공유하고자 한 목적이었죠. 비평뿐 아니라 대안도 만들어야겠다며 전시기획도 시작했어요. ‘인천 포스트’라는 전시기획이었는데 인천의 소식, 미래, 기둥이라는 뜻을 담아 1년에 한 번씩 개최했습니다. 2002년 들면서 상시적인 공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모아 구월동에 전시장 스페이스 빔을 만들었습니다.”

민운기 씨가 시작했던 지역 내 작은 스터디모임이 지역문화예술의 대안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전시장 스페이스 빔은 처음부터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는 球鳧岵?갤러리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일반적인 화랑은 전문적인 작가의 완성된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우리는 다른 미술 공간 운영의 사례를 만들고 싶었어요. 우리가 이름을 ‘빔’이라고 한 것도 일반적인 주장과 미술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관계와 소통을 함께 만들어가고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 되자는 취지를 담은 때문이죠. 그렇게 공간과 활동으로 구체화했고 30여 평의 작은 그 공간은 전시공간과 세미나, 아카이브, 교육공간으로 꾸며졌습니다.”

그곳을 토대로 그들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자체기획전, 초대전,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활동,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계간지 ‘시각’도 계속 발간하고 ‘옥상영화제’라고 해서 옥상을 이용한 영화제도 시작했다. 미술교사들과 함께 모임을 가지면서 연구와 프로그램개발을 공동으로 연구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이것도 미술이다’라는 학생들을 상대로 한 공공미술교육이다.

그런 그들이 지난 여름 구월동에서 배다리 마을로 자리를 옮겼다. 한참 시끄러운 배다리 마을로 말이다. 그들이 배다리 마을로 옮긴 것은 그저 ‘이전’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면에 깔린 배경을 아는 사람들은 이를 지역문화예술계의 또 하나의 사건으로 본다.
[##_1R|1281314686.jpg|width=”366″ height=”492″ alt=”?”|▲ 스페이스 빔이 자리하고 있는 건물은 1920년에 문을 연 인천양조장 공장이다. 아직도 문패가 남아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희망제작소_##] 왜냐하면 배다리 마을로 이전한 배경에는 배다리를 관통하는 산업도로를 뚫겠다는 인천시의 무분별한 개발정책이 있기 때문이다.

배다리 일대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고려하지 않은 채 마을을 나누는 8차선 도로를 뚫기로 결정한 것에 대항하면서 지역문화인들이 모여 이곳의 가치를 지켜나가기로 했고 그 가운데 스페이스 빔이 있다.

민운기씨 스스로 ‘배다리 마을을 지키는 인천시민의 모임'(www.vaedari.net)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스페이스 빔의 사이트에도 그 홈페이지가 링크되어 있다.

배다리 마을로의 이전에 대해 민운기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금년 1월 중순에 이곳 배다리 지역을 탐사하면서 배다리 관통 산업도로가 건설 중인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누가 보아도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더군요. 멀쩡하게 사는 동네를 갈라놓겠다니….

당시 현장을 대내외에 알리는 퍼포먼스를 하고 이 공간이 가지는 남다른 가치를 재조명해 보면서 어떻게 활성화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양조장 터를 발견하면서 우리의 고민을 구체화하는 공간을 만들어보자고 해서 이곳을 꾸미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보기가 불편할 정도였는데 잘만 꾸미면 매력이 많은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주인과 타진했고,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지만 좋게 결론이 나서 지금은 우리들에게 고마워하죠. 지난 7~8월에 걸쳐 리모델링 공사를 해서 9월 8일 개관했습니다.”

역사와 문화, 삶이 녹아있는 동네, 배다리 마을

민운기 씨가 말하는 배다리 마을은 전형적인 서민동네다. 일본조계, 청국조계 등에 밀려난 사람들이 이 부근에 모여 살았고, 6·25때 피난민이 대거 유입된 곳도 이곳이다. 현재에도 건재한 헌책방 외에도 서민문화를 알 수 있는 가게들이 이 일대에 많았단다.

“서민지역이었지만,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근대교육이 시작됐습니다. 경인철도 기공식도 여기에서 열렸었죠. 성냥공장이 있었는데 여성비하적인 노래가 배경이 된 바로 그 공장입니다.

인천의 중요한 스토리들이 배다리 마을에 모였고, 아직도 남아있는 거죠. 공간이나 도로도 불규칙적이고 굽어 있어 그런 상황이 주민들의 정서로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인천 자유무역지대를 만들면서 송라지구와 송도지구를 연결하고 물류흐름을 빠르게 하기 위해 산업도로를 만들게 된 겁니다.

이 동네의 가치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양 지역을 빨리 연결하기 위해 지도에 자를 대고 그은 것뿐이에요. 이렇게 길이 나면 동네가 몽땅 고사되고 말겁니다. 그러고 나면 대형빌딩을 지어 재개발하겠다는 것이 시청의 입장이고요.”

헌책방 골목에 고급 사무실이 들어오고, 양조장 건물과 같이 옛 정취를 알 수 있는 건물과 길들을 무너뜨려 높다란 빌딩을 세우고, 반듯반듯한 도로를 깔면, 사람들의 삶의 질도 향상된다는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_1L|1366912647.jpg|width=”383″ height=”286″ alt=”?”|▲ 배다리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지도. ⓒ희망제작소_##] 도로를 낸다는 것도 조용히 진행됐다. 처음부터 반발을 예상하고 있었던 셈인데, 그러면서도 무시한 것이다.

“주민들을 따로 만나서 보상가를 많이 준다며 별도로 매입과 철거를 진행했어요. 지난해 연말에야 주민 몇 명이 나서면서 알게 됐고, 알면서부터 바로 진정서를 냈지만 관심을 끌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홍보를 시작했죠. 언론과 각 단체의 사이트에 이를 알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기자들이 오고 인천의 ICN채널이나 지역신문에 현안으로 알려지게 됐고, 이후 여러 단체와 활동가들이 모여 다양한 반대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민대책위가 만들어지고 시민단체, 문화단체 활동가들이 참여해서 배다리를 지키는 인천시민모임을 꾸려 산업도로건설무효화운동을 벌이고 있고요.”

그 일환으로 배다리문화제도 열고 있다. 배다리문화제의 목적은 도로 무효화와 생태복원이다. 운동의 경험이 없던 주민이나 운동을 해본 단체 사람들이나 모두 모여서 한 목소리를 낸다.

처음에는 낯설어하며 부끄러워하던 주민들이 이제는 재미있어 하며 주저 없이 마이크를 잡는다. 지금까지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에 이 문화제를 통해 그동안 묻혀있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배다리 마을의 산업도로 무효화 이후를 그리다-반대운동 성공이후의 분열을 대비한다

산업도로 문제가 발생하면서 스페이스 빔 뿐 아니라 ‘인천작가회의’도 사무실을 배다리 마을로 옮겼다. ‘퍼포먼스 반지하’도 아트시티 사업을 이곳에서 벌이고 있다. 지역신문에서는 일주일에 2~3건씩 관련 보도가 나왔고, 중앙일간지는 물론, 공중파에서도 이 문제가 다뤄졌다. 이러한 운동들이 계속 벌어지면서 결국 공사가 중단됐다. 관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주민들의 힘에 한 발 물러선 것이다.

하지만 그 계획이 전면 무효화된 것은 아니다. 아직 작은 기틀을 마련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미 배다리 마을 사람들은 산업도로 무효화 이후를 생각한다.

“1단계의 운동에 약간의 성과가 있다고 보지만 동시에 향후의 대안, 우리가 생각하는 배다리 지역의 대안은 무엇인지 만들어 공사 시행자, 관에게 어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도시환경연대회의 차원에서 포럼을 준비하고 있고 배다리문화제에서는 부안 항쟁당시 주도적으로 역할 했던 고길섭 씨를 불러 이야기도 듣고 배다리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는 자리도 마련했습니다.

무효화가 되고 나면 이 지역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걸로 봐요. 이때가 중요하죠. 잘못하면 재개발의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는 거고요. 관에서는 도로를 내는 것을 조건으로 전통도시를 만든다거나 여러 제안을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길을 내보자는 의도인 것 같은데 우리는 그런 거리 중심, 관 중심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주민들이 서로 얽혀 사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도시, 동네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결국 배다리 마을에서 시작했지만, 이건 인천 전체, 대한민국 전체의 문제라고 봐요. 우리의 모델이 인천에 모두 확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인천은 경제자유구역을 기초로 해서 2009년 인천도시엑스포를 열고 2012년 아시안게임을 연다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일환으로 초고층 빌딩과 아파트 숲이 들어서는 그림을 보여주며 온 도시의 재개발을 강행하고 있는데 그것이 진정 주민을 위한 사업인지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

정작 지역주민들은 소외되고 또 다른 명품족을 위한 도시가 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민운기씨는 인천이 외치는 명품도시는 초고층 빌딩이나 아파트의 문제가 아닌 ‘문화’의 문제라고 이야기 한다.

“진정으로 명품도시가 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문화입니다. 인천에서는 큰돈을 들여 오페라단을 운영하는 형식으로 생각하지만, 주민들이 자기역량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진정한 문화도시라고 봅니다. 인천시립미술관 하나 없는데 오페라 하우스나 구겐하임미술관이 이야기된다는 게 웃긴 거죠. 하다못해 서울의 인사동과 같은 전통거리 조성을 이야기하는데, 몇 십 년의 기간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이런 거리를 수 십 억을 들여 하루아침에 만들어내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관이, 그런 생각을 배다리 마을에, 그리고 인천 전체에 진행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산업도로가 무효화된 이후를 설계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산업화 시대의 희생양 인천-예술적 상상력으로 과거를 복원하고 미래를 꽃피워야

민운기씨는 인천에 대한 현재의 문제는 과거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지적한다. 과거 개화와 산업화의 빠른 물결을 정면에서 맞으면서 인천의 제 모습을 잃어갔다는 것이다.

“스페이스 빔이나 저는 지역의 맥락을 중심으로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대단한 예술가가 태어난다고 해서 그 지역이 문화도시가 되는 것은 아니듯이, 인천문화는 인천시민들이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천은 그야말로 산업화 시대의 희생양이었어요. 모든 산업화의 부산물을 담아져있고 주민들의 삶 속에서 그 폐해가 녹아있죠. 거꾸로 생각하면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니 인천을 잘 들여다보면 시대의 역사를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기도 한 셈입니다.

미술도 여기서 많은 상상력을 꽃피울 수 있는데, 이 도시에 10곳을 탐사해보면 특정 시대의 모습들이 모두 자세히 담겨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을을 통해 그 시대를 역으로 추적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이죠.”

산업화의 폐해가 있고, 무조건적인 개발중심의 사고방식은 안 된다는 게 민운기씨와 스페이스 빔, 그리고 배다리 마을을 지키는 인천시민의 모임의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무조건 그대로 두자는 것은 아니다.
[##_1R|1234058837.jpg|width=”442″ height=”331″ alt=”?”|▲ 다양한 문화가 어울러지는 스페이스 빔의 전시공간. ⓒ희망제작소_##] “주민들이 스스로의 삶을 긍정하고 채워가고 주체가 되어 삶의 환경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관에 의한 일방적인 개발은 막아내야 하는 것이며 주민들을 시혜적인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보고 그들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 부분을 줘야하는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망가졌고 남아있는 곳이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재개발되었거나 재개발 예정이죠. 지금이라도 남은 이 몇 곳을 보존해야 매력적인 도시가 되지 않을까 해요.

관광을 따지고 경제를 따지더라도 외국 사람이 인천에 왔을 때 뭘 보여주면 좋겠어요? 아파트를 보여줄 수는 없잖아요. 인천만의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배다리 마을 같은 곳을 남겨져야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도시공간의 변화된 모습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도시전체에 관심을 가지고 개입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입니다.”

문화에 대한 삶의 질에 대한, 지역에 대한 고민 없이 이뤄지고 있는 무차별적인 개발은 배다리 마을을 비켜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역에 대한 이해와 고민을 바탕으로 지역문화예술의 대안을 찾고 있는 스페이스 빔이 배다리 마을로 간 것은 더욱 의미 있는 일이다. 스페이스 빔을 중심으로 한 지역문화계가 작은 힘을 보태, 지역 주민들이 한데 뭉쳐 산업도로의 ‘공사 중지’를 이끌어냈지만, 최종 해결책은 아니다.

배다리 마을을 넘어, 인천을 넘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고민해야할 문제는 바로 ‘건설’과 ‘개발’의 붐이 아닐까. 파헤치고, 밀고, 뚫고, 깎고, 헐어서 다시 높다랗게 만들고 반듯하게 만드는 도시가 더 나은 도시라는 것은 대체 어떤 기준일까.

한국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전통을 이야기하고, 5,000년 역사를 자랑스럽게 내밀면서 한편에서는 무차별적인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한국의 현 주소가 부끄럽다. 그래서 스페이스 빔은 또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면담일시 -2007년 11월 24일

면담장소 -인천 동구 창명동 7번지

면담인사 -민운기(스페이스 빔. 문화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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