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고의 싱크탱크들 (최종)] 싱크탱크의 대명사 : 브루킹스연구소(The Brookings Institution)

글/사진 홍일표(희망제작소 선임연구원, 조지 워싱턴대학교 시거센터 방문연구원)

브루킹스연구소를 끝으로 [미국 최고의 싱크탱크들] 시리즈는 마감합니다. 지금까지 <글로벌 브레인 투데이>에 [진보적 싱크탱크를 방문하다], [안팎에서 본 미국 싱크탱크], [미국 최고의 싱크탱크들] 등의 제목으로 연재하였던 글들은 대폭 수정, 보완되어 조만간 단행본으로 출판될 예정입니다. 이 책은 미국을 넘어 세계를 기획하고 있는 주류(主流) 싱크탱크들은 물론, 그동안 한국에 충분히 소개되지 않았지만 워싱턴 싱크탱크 세계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반주류(半主流/反主流) 싱크탱크들까지 포괄하고 있으며, 미국 싱크탱크의 구조와 역사에 대한 충실한 설명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지식을 가진 권력’과 ‘권력을 가진 지식’이 서로 어울려 만들어 가는 워싱턴 싱크탱크 세계의 치열한 경쟁과 협력의 생생한 현장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한편 다음 주부터는 갈수록 그 열기를 더해 가는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과정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주요 싱크탱크들의 다양한 활동들을 [미국 대선과 싱크탱크]라는 제목으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이미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진보적 싱크탱크인 <정책연구소>(Institute for Policy Studies)의 시민참여형 외교정책 프로젝트를 소개하였고, 다음 주에는 브루킹스연구소 역사상 가장 큰 대선 관련 프로젝트라 할 수 있는 <기회 ’08>(Opportunity ’08)을 총괄하고 있는 마이클 오핸런(Michael O’Hanlon) 박사와의 인터뷰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미국 대선과 싱크탱크]와 더불어 [미국 싱크탱크와 동아시아] 시리즈도 시작될 것입니다. 이미 한차례 워싱턴 싱크탱크 세계에 불고 있는 ‘중국연구 열풍’에 대해 소개해 드린 바 있습니다만, 앞으로 중국은 물론 일본과 한국(남한과 북한)에 대한 워싱턴 싱크탱크들의 연구 동향을 분석하는 글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과연 워싱턴 싱크탱크 세계의 ‘누가’ 동아시아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발언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은, 미국의 아시아 정책과 전략을 이해하고 대응을 준비할 수 있는 첩경(捷徑)이 될 것입니다.
[##_1L|1207387184.jpg|width=”241″ height=”173″ alt=”?”|브루킹스연구소 입구_##]비단 미국의 싱크탱크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싱크탱크’를 논하는 이라면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곳은 역시 브루킹스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이다. 브루킹스연구소는 1916년 정부조사연구소(Institute for Government Research)라는 이름으로 창립하였다가, 1927년 경제학연구소(Institute of Economics, 1922년 설립), 로버트 브루킹스 경제학 및 정부학 대학원(the Robert Brookinsgs Graduate School of Economics and Government) 등 다른 기관들과 합쳐지며 창립자인 로버트 브루킹스(Robert S. Brookings)의 이름을 따 브루킹스연구소라고 불려 지게 되었다.

1916년 만들어진 정부조사연구소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공적 서비스의 제공, 보다 과학적인 정부 연구(study of government) 등을 추구하였고, 이는 1921년 통과된 예산회계법으로 첫 번째 결실을 맺게 된다. 이 법에 의해 미국 최초의 예산사무국(Bureau of the Budget)이 만들어졌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워렌 하딩(Warren G. Harding)은 이에 대해 “공화국의 탄생 이래 가장 위대한 정부 개혁”이라고 극찬을 하였다. 한편, 브루킹스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시산업국의 경험으로부터 실제 정부가 충분한 자료에 기반한 정책을 펴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그래서 만든 것이 1922년 설립된 경제학연구소이다. 그는 이 연구소 설립을 위해 카네기사(the Carnegie Corporation)로부터 5년 동안 2십만 달러 조성금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이와 별도로 공무원의 자질 향상을 목적으로, 1924년 샌트루이스 소재의 워싱턴 대학에 로버트 브루킹스 경제학 및 정부학 대학원을 설립하였다. 정부조사연구소와 경제학연구소, 대학원은 서류상으로는 별개의 기관들이었지만 실제로는 매우 유기적으로 운영되었다. 이후 이들 세 기관은 행정상의 문제점 등을 해결하기 위해 1927년 12월 브루킹스연구소라는 이름으로 합쳐지게 된다.

그러나 브루킹스연구소로 새롭게 시작한 이후 곧바로 ‘대공황’을 맞게 되고, 브루킹스연구소 역시 심각한 재정위기를 맞게 되었고 이러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브루킹스연구소는 정부나 민간 기업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1933년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국가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대담한 실험들을 계속하였고 브루킹스연구소는 이를 돕기 위한 전략 마련에 협력하였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브루킹스연구소는 전시동원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게 된다. 전쟁성(the War Department)의 요청으로, 진주만 공격 1년 전부터 전시 가격 통제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고, 전쟁경제에 있어 민간기업과 군이 각각 필요로 하는 노동력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에 관한 자문을 의회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2차 대전 이후 브루킹스연구소는 확대된 미국의 국제적 역할에 부합하여 외교정책을 분석하는 국제연구분야를 연구소 내에 설치하였고, 유럽 부흥을 위한 마샬 계획(Marshall Plan)의 원형이 되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1952년 연구소 초대 소장인 해롤드 몰튼(Harold Glenn Moulton)의 뒤를 이어, 로버트 칼킨스(Robert Calkins)가 2대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연구소의 조직을 경제연구, 정부연구, 외교정책연구 분야로 재편성하고, 재정의 확충과 고급 인력의 확보 등을 통해 연구소의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였다. 케네디 정부와 존슨 정부 시기 브루킹스연구소는 정부와 깊은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케네디 대통령의 정권이행을 도와 국무성(the State Department), 국제개발기구(the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경제자문평의회(the Council of Economic Adviser)의 조직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고,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the Greate Society) 프로그램의 기반이 되는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브루킹스연구소는, 자신에게 붙여진 ‘리버랄’이라는 규정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계속 벌인다. 1977년 온건 공화당원이었던 브루스 맥로리(Bruce MacLaury)가 4대 소장이 된다. 그는 당시 주식시장 악화 등으로 인한 연구소 재정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정부계약의 확대, 재단 조성금 확충, 그리고 기업과의 관계 강화를 통한 기업헌금을 증가시켰다. 1986년에는 공화당 지지자로 알려진 억만장자 루이스 캐봇(Louis Cabot)이 이사회 의장으로 취임하면서 “브루킹스연구소는 더 이상 리버랄 일변도의 연구소가 아님”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노력들에 힘입어 브루킹스연구소에 대한 기업들로부터의 후원도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80년대 브루킹스연구소는 미국의 조세제도 개혁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여, 향후 미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는 1986년 세금개혁법(the Tax Reform Act of 1986) 입안을 이끌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90년대에는 연방정부가 많은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지역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브루킹스연구소 또한 이에 대응한 연구들을 시작하였고, 클린턴 행정부의 사회보장제도개혁에 대한 연구 또한 강화하였다. 특히 2001년 9.11 테러사건의 발생, 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이 연이어 발생한 이후, 브루킹스연구소의 외교정책 분야 또한 이전에 비해 더욱 강화되게 되었다.

2007년 현재 브루킹스연구소에는 5개의 연구 프로그램(research program)과 12개의 정책센터(policy center)가 운영되고 있다. 이사회 의장은 존 손튼(John H. Thornton)이며, 소장은 스트롭 탈봇트(Strobe Talbott)가 맡고 있다. 각 연구프로그램과 정책센터에 소속된 연구원들은 모두 224명이며,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각국의 실력 있는 연구자들을 비지팅 펠로우 등의 자격으로 함께 모아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2003년 당시 조사된 바에 따르면, 이들의 절반이 넘는 약 142명 정도는 국가안보평의회(the National Security Council)이나 백악관 등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이들이라고 한다.

브루킹스연구소의 2006년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연구소의 2005년말 현재 총자산은 약 3억 2백만 달러 정도이다. 이 가운데 부채는 1천만 달러, 순자산은 2억 9천만 달러로 그 규모가 엄청나다. 2005년 한해 수입은 약 55,912,000 달러인데 이 가운데 투자수입이 약 11,096,000달러, 컨퍼런스 개최수입이 4,230,000달러, 기부가 3,466,000달러, 출판수입 2,533,000달러, 그리고 재단 조성금과 계약수입이 가장 많은 34,161,000달러였다. 기금 운영에 따른 투자수입 비율이 약 22%를 차지한 것이나 컨퍼런스, 출판 수입 등의 규모 또한 큰 것은 브루킹스연구소의 독특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2005년 한해 지출은 총 48,806,000달러였는데, 이 가운데 프로그램 사업비가 38,495,000달러, 일반 관리비가 7,853,000달러, 재원개발비용이 2,453,000달러 지출되었다. 사업비 가운데 외교정책연구 분야 한해 지출이 11,130,000달러로 가장 컸고, 다음으로 경제연구 7,598,000달러, 대도시연구 5,876,000 달러 등이 지출되었다. 현재 프로그램 사업비의 3%(1,113,000달러) 정도만이 커뮤니케이션 비용으로 사용되고 있어 헤리티지재단이나 다른 보수적 재단들과 비교할 때 비교적 낮은 비율임을 알 수 있다.

브루킹스연구소 소속 연구원들과의 인터뷰는 모두 3회에 걸쳐 이루어 졌다.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위원 출신으로, 미일동맹을 포함한 일본 문제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는 마이크 모치즈키(Mike Mochizuki) 조지워싱턴대학교 교수, 미국 대통령직 인수과정과 미국 정치 일반에 대한 뛰어난 명성을 자랑하는 스티븐 헤스(Stephen Hess) 연구위원, 그리고 브루킹스연구소 <기회 ’08>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자이자 브루킹스연구소의 외교정책연구 분야를 대표하는 마이클 오핸런(Michael O’Hanlon) 박사와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이 글에서는 마이크 모치즈키 교수와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한다. 마이크 모치즈키 교수와의 인터뷰는 2007년 9월 25일, 그의 연구실에서 약 한 시간가량 진행되었다.
[##_1R|1089254214.jpg|width=”178″ height=”180″ alt=”?”|마이크 모치즈키(Mike Mochizuki) 조지워싱턴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교수_##]홍일표(이하 홍) : 마이크 모치즈키 교수님,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우선 감사드립니다. 모치즈키 교수님께서는 예일대학교와 남가주대학교 교수에서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위원(senior fellow)으로 자리를 옮기셔서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한 일본 관련 이슈들에 대한 최고 전문가로 명성을 얻으셨고, 이후 다시 현재의 조지워싱턴대학교 정치학과 및 국제관계대학원 교수가 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대학교수에서 싱크탱크의 연구위원으로, 그리고 다시 대학교수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가 그리 흔한 것 같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마이크 모치즈키(이하 모치즈키) : 홍박사님, 저도 반갑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저는 하버드대학에서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 예일대학 정치학과 조교수와 남가주대학교(USC) 국제관계학과 조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제가 남가주대학교에서 가르치던 당시 랜드연구소(RANN Corporation)의 “냉전 이후 아시아 변화”라는 초대형 프로젝트에 컨설턴트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맡았던 분야는 냉전 이후, 특히 1993년 소위 ‘55년 체제’의 붕괴 이후 일본 정치의 변화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 프로젝트 책임자가 제 하버드대학교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남가주대학교의 <미일 관계 센터>(US-Japan Relation Center)를 <아시아-태평양 정책 센터>(Center for Asia-Pacific Policy)로 확대, 개편하였습니다.

이때는 아직 제가 남가주대학을 떠났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제가 속했던 남가주대학교 국제관계학과와 랜드연구소의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더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랜드연구소는 유시엘에이(UCLA)와 소련 연구에 관한 파트너쉽을 맺고 있었는데 상당히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달리 아시아, 태평양 문제를 전문으로 다루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게 1993년, 1994년경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1982년에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1988년까지 예일대학교 정치학과에, 1989년부터 1994년까지 남가주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1995년에 브루킹스연구소로 자리를 옮겼고, 1999년에 조지워싱턴대학교로 다시 옮겼습니다. 1999년부터 2년간은 브루킹스연구소 비상근 연구위원(non resident senior fellow)을 맡았지만 2001년에 완전히 관계를 정리했습니다.

이처럼 대학과 싱크탱크를 오가는 것이 아주 흔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매우 드문 것이라 말하기도 곤란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 예일대학교에서 정년보장교수 자리를 포기하고 미국기업연구소로 옮겨 간 마이클 오슬린도 있지요. 모든 교수들이 브루킹스연구소나 미국기업연구소로 간다고 말할 수는 물론 없지만 많은 이들이 싱크탱크와 대학교를 오가고 있습니다.

홍 : 브루킹스연구소를 떠나 조지워싱턴대학교로 옮기시게 된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있었던 것인가요?

모치즈키 :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을 당시, 현재 홍박사님과 제가 속해 있는 조지워싱턴대학교 엘리옷 스쿨(국제관계대학원) 아시아 연구소인 시거센터(Cigur Center)에서 일본 연구를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상당히 좋은 조건의 제안을 했습니다. 당시 제가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려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엔 거절했다가 결국 제안을 받아들여 옮기게 된 것입니다.

홍 : 흔히 싱크탱크 소속 연구자들은 대학교수들에 비해 훨씬 더 정책지향이 강하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차이점을 얘기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모치즈키 교수께서는 이런 차이를 별로 못 느끼시나요?

모치즈키 : 물론 그런 일반적 차이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 엘리옷 스쿨은 정책훈련과 정책분석에 비교적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대학원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런 차이가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워싱턴 디씨라는 곳 자체가 그렇습니다. 만약 제가 아이오와 대학교 같은 곳으로 갔다면 구체적인 정책분석과 상당히 멀어졌겠지만 여기에선 그렇게 하기도 어렵습니다.

홍 : 그렇다면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위원으로서의 일상생활은 어떠했었는지 얘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모치즈키 : 물론 연구자들마다 조금씩 다르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싱크탱크라고 하더라도 랜드연구소와 브루킹스연구소가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랜드연구소의 경우,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연구는 정부 프로젝트입니다. 브루킹스연구소에서도 정부 프로젝트가 가끔 있지만 랜드연구소만큼은 아니었지요. 대부분은 재단 프로젝트였고 그것은 훨씬 더 독립적 성격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랜드연구소에서는 프로젝트 진행과정과 결과를 정부 관료들에게 설명해야 하는 의무가 부여되었기 때문에 캘리포니아와 워싱턴 디씨를 자주 왔다갔다 해야 했습니다. 특히 펜타곤(국방성)에 출장이 잦았습니다. 하지만 브루킹스에서는 그럴 필요가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랜드연구소에 있을 때는, 정부 기밀 자료 등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곳을 떠나면서 더 이상 그것을 볼 수 없을 뻔 했지만, 클린턴 행정부에서 무기통제와 군축 관련 정부기구의 자문위원이 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기밀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랜드연구소에서처럼 고객인 정부기관을 대상으로 설명해야 할 의무는 사라졌지만, 정책 커뮤니티 자체로부터 완전히 멀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브루킹스연구소로 옮기면서 생긴 또 하나의 큰 변화는 바로 언론과의 관계입니다. 물론 랜드연구소에 있을 때도 언론과 접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워싱턴으로 온 후엔 무슨 일만 생기면 전화기가 울려 댔습니다. 브루킹스연구소 또한 조직 전체 차원에서 연구자 개인들의 언론 접촉을 장려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뉴욕타임즈나 워싱턴포스트와 같은 고급 신문들에 많은 글을 기고하길 원했고 연구자들이 방송 인터뷰에 제대로 응할 수 있도록 별도의 훈련을 시키기도 했지요. 몇 일 전 아베 일본 수상이 갑작스레 사임을 했는데요. 만약 제가 브루킹스연구소에 있었더라면 하루 종일 전화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학교에 와서는 그런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냥 무시해도 되었지요. 전화를 안 받아도 되고, 텔레비전 인터뷰에 나가지 않아도 되구요.

브루킹스연구소에 있을 때 절친한 동료였던 마이클 오핸런 박사는 항상 언론에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게다가 브루킹스연구소 자체 스튜디오가 있어서 아주 쉽게 인터뷰에 응할 수도 있는 구조입니다. 제가 처음 학교로 왔을 때 언론들은 제가 계속 브루킹스연구소의 연구위원과 같은 역할을 해 주길 기대했습니다. 연구소로 카메라를 들고 찾아오는 경우도 많았지요. 그런데 한 방송사와 인터뷰를 하면 다른 곳도 해 줘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 성가신 일이지요. 그래서 이젠 아예 하지 않습니다. 아주 친한 친구 사이의 기자들이 전화를 하면 가끔 받지만 가능하면 언론과 직접 접촉하는 것은 삼가려 하고 있습니다.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위원의 일상과 관련해서 보자면 역시 가장 큰 몫은 프로젝트 수행입니다. 저도 미일동맹이나 일본의 외교정책에 관한 수많은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숫자의 컨퍼런스에 발표자로, 토론자로 참석해야 했구요. 또 국무성이나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등에서 어떤 사안에 대한 브리핑을 원하면 그것에 응하는 것도 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의회 청문회 증언이나 그런 브리핑 같은 것은 준비에 시간도 많이 걸리고, 항상 최신 정보를 취합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연구조교가 늘 매일매일 신문기사를 정리해서 알려 주곤 했습니다.
[##_1L|1004382809.jpg|width=”253″ height=”172″ alt=”?”|<이라크 정책 보고서> 토론회 모습(2006년 12월 16일)_##]홍 : 정말 바쁜 일상이었던 것 같군요. 그럼, 연구조교는 직접 고용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브루킹스연구소가 고용해서 배치를 해 주는 방식인가요?

모치즈키 : 선발에 필요한 인터뷰는 제가 하지만, 급여는 브루킹스연구소가 지급하였습니다. 이들은 전업 연구조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워싱턴으로 와서 이상하게 느꼈던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턴의 존재였습니다.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 아예 돈을 받지 않거나 아주 조금만 받고 있었거든요. 저는 그것을 착취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들 스스로가 원해서 하는 일이라고 했기에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별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경력을 쌓기를 원하는 이들을 고려해서 한명 정도씩의 인턴은 항상 두었습니다.

홍 : 앞서 랜드연구소에 있을 때와 브루킹스연구소에 있을 때의 정부 자료에 대한 접근도에 별 차이가 없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러면 학교로 옮겨 온 후에는 어떠십니까? 아무래도 고급 정보를 많이 접할 수 있는가 여부가 상당히 중요한 관건일텐데요.

모치즈키 :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다시 대학교수가 된 이후 저는 “모든 것에 다 대답”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이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고 수행하고 있는 연구주제에만 집중을 하면 되니까요. 제가 몇 년 전 마이클 오핸런 박사와 『한반도 위기』(Crisis of the Korean Peninsular/한국어 역 『대타협』)라는 책을 썼을 때에도 아주 세부적인 사항까지 다 다루지는 않았었죠. 아마 만약 제가 계속 브루킹스연구소에 있었다면 북핵 실험에서부터 남북정상회담에 이르기까지 언론에서는 항상 제가 질문을 했을 것이고, 저는 그것에 답하기 위해 최신 정보들을 계속 추적하고 있었어야 할 것입니다.

홍 : 브루킹스연구소에 계실 때에는 항상 “대기중”이셨다는 말씀이시네요.

모치즈키 : 예, 그렇습니다. 브루킹스연구소는 원래 두꺼운 책을 쓰는 연구자들로 가득한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실제로 그런 높은 학술적 역량으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지난 30여년 간, 미국의 싱크탱크 세계에는 커다란 변화가 불어 닥쳤습니다. 헤리티지재단이 시작한, 구체적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짧은 보고서”는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싱크탱크 연구자들도 책을 잘 안 쓰게 된 것입니다. 책이라고 하는 것은 주장의 신뢰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수단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장식품 이상 되기 힘든 것 또한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두꺼운 책을 잘 읽지 않습니다. 브루킹스연구소에서도 마치 헤리티지재단처럼 2000자 짜리 정책 브리핑 자료를 쓰고, 언제든지 언론에 기고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연구자를 선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마이클 오핸런 박사는 하나의 이상적 타입이라 생각됩니다. 그는 책도 많이 쓸 뿐만 아니라 엄청난 횟수의 기명칼럼 기고와 방송 인터뷰, 잦은 출장, 항상 블랙베리에 연결된 연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홍 : 마지막으로 워싱턴 싱크탱크에서의 일본 연구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모치즈키 : 최근 중국연구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다고 일본 연구가 줄어들고 있는가에 대해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주로 미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마찰, 경제문제가 주된 이슈였지만 지금은 그와 관련된 연구는 줄어든 반면 외교나 안보 관련 이슈로 연구주제가 크게 전환되고 있는 상황이라 봐야 정확할 것입니다. 미국기업연구소나 전략 및 국제문제연구센터, 외교전략평의회 등에는 일본전문 연구자가 상주하고 있으며, 스팀슨 센터 등 몇몇 다른 싱크탱크들 또한 일본 연구에 강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브루킹스연구소는 일본 연구가 약해지는 동시에 중국 연구가 커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과 미국의 안보, 동맹 문제가 새롭게 강조되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브루킹스연구소에도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홍 : 오랜 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Comments

“[미국 최고의 싱크탱크들 (최종)] 싱크탱크의 대명사 : 브루킹스연구소(The Brookings Institution)”에 대한 2개의 응답

  1. 독자 아바타
    독자

    수고 정말 많으셨습니다! 짝짝짝

  2. 홍일표 아바타
    홍일표

    고맙습니다. 앞으로 좀더 좋은 글과 더 나은 정보를 올리도록 분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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