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2011년 1월, 공감만세의 필리핀 공정여행에 참가한 동화작가 이선희님의 여행 에세이 ‘편견을 넘어’를 1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공감만세는 공정여행을 진행하고 있는 청년 사회적기업으로 희망제작소의 청년 소셜벤처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희망별동대 1기를 수료했습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조금 더 많은 분께 공정여행을 알리고, 또 다른 여행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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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을 넘어 (6) ‘천상의 녹색계단’ 앞에 말을 잃다 

끼앙안에서 평화를 만끽하며 세상에 이곳보다 좋은 곳은 없을 거라고, “공정여행 최고”라고 하는 우리들에게 한 코디네이터가 이렇게 말했다.

“갈수록 미친 듯이 좋아질 겁니다.”

무엇이 얼마나 좋기에 미친 듯이 좋다는 걸까? 여행자들을 한껏 기대에 부풀게 만드는 그의 자신감이 좋았다.

끼앙안을 떠나 바나우에(Banaue)로 왔다. 지프니(Jeepney)를 타고 한 시간. 지프니는 필리핀의 대표적인 대중교통 수단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버스 같은 건데 미군의 지프차를 개조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양쪽에 기다란 의자가 마주보게 되어 있고 승객은 뒷문으로 타서 뒷문으로 내린다.

“바얏뽀(Bayad po, 요금이요)”라고 하며 요금을 옆 사람에게 건네면 승객들의 손에서 손으로 운전수에게 전달된 뒤, 거스름돈은 다시 손에서 손으로 주인에게 돌아온다. 정해진 정류장이 없어 내리고 싶은 곳에서 천장에 달린 쇠로 된 바(Bar)를 동전 등으로 통통 두드리거나 “빠라뽀(Para po, 멈춰주세요)”라고 하면 세워준다.

”사용자지프니가 정말 재밌는 건 가지각색의 페인팅 때문이다. 뼈대만 같을 뿐, 필리핀에서 똑같이 생긴 지프니는 찾을 수가 없다. 각자의 개성을 뽐내는 다양한 그림과 장식품으로 꾸며진 지프니. 한 명 한 명 각기 다른 인간이듯이, 한 대 한 대 다른 차라는 것이 마치 그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같다. 마닐라 시내에서도, 이푸가오 주의 산악지대에서도 씽씽 달리는 지프니는 생명력이 넘치는 야생의 동물 같다. 그러나 그런 지프니도 한 시간만 타면 엉덩이가 아프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배기가스 냄새는 고약하다. 끼앙안에서 한 시간가량 지프니를 타고 바나우에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모두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끼앙안에서 정성스런 대접을 받았지만 매일 세 끼를 기름진 고기로 배를 채웠기 때문에 담백한 음식과 야채가 그리웠다. 바나우에에 도착하자마자 들른 곳은 ‘하프 웨이(Half way)’라는 레스토랑이었다. 한 면이 전부 창으로 되어 있는 그곳에서  보이는 풍경에 우리는 모두 넋이 나갔다. 계단식 논과 기묘한 형태로 쌓아올려진(!) 건물들이 어우러진 그 풍경은 아슬아슬하면서도 경이로운 느낌을 우리에게 선물해주었다. ‘저런 위치에 어떻게 저런 형태로 건물을 세울 수가 있지?’ 싶었다.
 


넋 나간 우리 앞에 따끈한 음식이 왔고, 그 맛에 우리는 눈물을 흘렸다. 마늘과 후추 맛이 살아있는 계란국! 한국에서 먹는 맛 그대로의 계란국이었던 것이다. 그 시원함에 감탄하며 게 눈 감추듯 후루룩 마셔버리고 나자 다시 튀긴 닭과 계란후라이와 야채볶음과 밥이 나왔다.

바나우에에는 필리핀 고액권인 1000페소 화폐에 그려진 계단식 논의 실제 배경이 된 곳이 있다. 하지만 바나우에는 배낭여행객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급속히 관광화가 되었고, 이는 바나우에의 계단식 논이 빠르게 허물어져 가는 결과로 이어졌다. 우리는 바나우에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자리한 바타드(Batad)의 계단식 논을 보기 위해 서둘러 바나우에를 떠났다.

다시 지프니를 타고 한 시간, 말안장 같이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진 바타드의 새들(saddle)에 도착하였다. 새들은 바타드로 들어가는 입구다. 물과 음료수를 파는 작은 가게가 있어 트레킹을 하기 전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다. 35ℓ 배낭이 야속하기도 하고, 고마워지기도 하는 순간. 나보다 더 큰 배낭을 챙겨온 친구를 보며 이만하면 감사하지 하며 내 배낭을 단단히 조여 맸지만 새들에서 바타드의 산장까지 한 시간을 걷다보면 왜 그렇게 바리바리 가방을 쌌을까, 내 자신이 미련스럽고 원망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앞서간 일행의 탄성이 들렸다.
“와아―!”
뭐지? 호기심에 부리나케 달려가지는 못하고 걸어가 보니 내 입에서도 똑같은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와아!!!”
어마어마한 규모의 녹색 계단이 원형 극장의 형태를 띤 채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2년 전 EBS <다큐프라임>에서 아시아의 재발견이라고 하여 ‘천상의 녹색 계단, 바나우에 라이스 테라스’를 방영했었다. 그 제목을 그대로 이곳에 가져다 붙여도 될 것 같다. 천상의 녹색 계단, 바타드 계단식 논.

”사용자믿을 수 없는, 믿기지 않는 장엄한 모습에 압도되어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았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풍경을 모른 채, 못 본 채 살아가는 걸까? 이제야 이런 곳을 온 것에 심술이 날 지경이었다.

우리가 묶을 곳은 사이먼(Simon)이라는 이푸가오족 출신의 지역 토박이가 운영하는 숙소이다. 레스토랑 겸 휴게실 용도로 쓰이는 널찍한 테라스는 계단식 논을 향해 뻥 뚫려 있다. 계단식 논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이 여행자의 눈과 코와 마음을 뻥뻥 뚫어준다. 그곳에서는 특별히 무얼 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앉아만 있어도 새롭고 벅찬 기운이 샘솟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장에서 지내는 2박 3일 동안 정말 많은 시간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물론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다. 중학생 삼인방으로부터 체스를 배웠으니까. 한국에서 초등학교 6학년에게 장기를 배운 경력이 있으니, 체스쯤은 쉽게 배울 수 있었다! 게임에서 지는 것을 싫어하는 나는 머리는 없지만 타오르는 승부욕으로 거침없이 밀고 나가다가 어이없이 지고 마는 게임을 반복했다. 그래도 즐거웠다. 고개를 들면 체스를 이기는 것만큼이나 가슴 설레는 풍경이 눈앞에 있었으니까.


체스를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부르고, 밥을 먹고, 그런 일상의 일들을 바타드의 사이먼 산장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실컷 누렸다. 우리 같은 이들이 어디 한 둘이었을까? 사이먼 산장의 벽은 세계 각지에서 찾아와 이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사진과 명함과 메시지들로 가득했다. 메시지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한국인 남성이 쓴 것인데(결코 영어를 못 읽어서가 아니다!) 8년 전 친구들과 찾았던 이곳을, 8년이 지난 어느 날 아들과 다시 찾았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또 다시 이곳을 찾게 되는 날이 올까? 

부엌으로 들어가는 가장 안쪽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이 눈에 띄었다. 사이먼 아저씨와 호형호제(까지는 아니겠지?) 하는 코디네이터가 설명해주길, 사이먼 아저씨가 사진 속 집을 그리며 이 산장을 지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웃고 말았다. 산장은 사진 속 으리으리한 건물과는 터무니없이 다른, 벽돌 모서리만큼도 닮은 모습이라고는 없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에.

사이먼 산장의 테라스 모서리에는 철골 기둥이 어쩌면 흉물스럽다고 볼 수 있게 제 몸체를 그대로 드러낸 채 서 있다. 왜 저렇게 방치해두나 의아스러웠는데, 아직 산장을 짓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돈이 생기면 기둥 하나 세우고 또 생기면 또 하나 세우고, 이런 식으로 차곡차곡 산장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중이라는 것이다. 사진 속 으리으리한 집보다 사이먼 산장이 백 배 천 배 만 배 아름답게 느껴졌다.


사이먼 아저씨의 꿈을 기억하는 의미로 으리으리한 집 사진을 찍어왔다. 가만히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사이먼 산장이 보이는 것 같은 환상이 든다. 이 작은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된, 이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아름다운 산장의 모습을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린다. 사진에서 눈을 돌리면 산장의 테라스가, 그 너머에는 계단식 논이 펼쳐질 것만 같다. 저녁으로는 화덕에서 구워낸 토마토 피자를 먹고 싶다. ‘백숙 500페소’라고 적힌 메뉴판이 붙은 기둥도, 천장을 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철근 기둥도, 테이블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얌전한 개들도, 바람에 펄럭이는 여행자들의 빨래와 벽에 기대어 있는 기타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 수 있는 체스, 이 모든 것이 지금 내 옆에 있는 것만 같다.  


글ㆍ사진_이선희
가늘고 오래 공부한 끝에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다방면에서 부족함을 절감, 불꽃 튀는 경험을 원하던 중 공정여행에 반해 청년 소셜벤처 공감만세의 일원이 되었다.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북촌을 여행하며 아이들이 스스로 동화를 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월간 토마토에서 어른이 읽는 동화를 연재중이다. 
● E-mail: sunheemarch@gmail.co?m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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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만세는
‘자유롭게 고민하고 상상하며 길 위에서 배우는 청년들이 모여 세상을 바꾼다!’ 라는 구호 아래, 대전충남 지역에서 ‘최초’로 법인을 설립을 한 청년 사회적기업이다. 현재 필리핀, 태국, 제주도, 북촌, 공주 등지에서 공정여행을 진행하고 있으며 공정한 여행이 필요한, 공정한 여행을 실현할 수 있는 지역을 넓혀갈 생각이다. 공정함에 감동한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보자.  ● 홈페이지:
fairtravelkorea.com  ● 카페: cafe.naver.com/riceterrace


● 연재 목록
1.
나는 왜 공정여행을 떠났는가    
2.
필리핀 ‘골목길 미소’에 반하다  
3. 여자 여섯 명, 수다로 지새운 필리핀의 밤  
4. 끼앙안, 천국보다 평화로운    
5. 이푸가오의 독수리
6. ‘천상의 녹색계단’ 앞에 말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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