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의 희망탐사 79 평범한 마을을 가꾸는 섬세한 여성 리더

면담일시 – 2008년 7월 20일 오전 9시
면담장소 – 경기도 이천시 율면 석산2리 278번지
면담인사 – 고경필(부래미 마을 마당쇠)



그토록 유명한 부래미 마을을 이제야 찾았다. 전국에서 농촌 체험마을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곳이 바로 이 마을이다. 아주 평범하고 보잘 것 없다는 이 마을을 대한민국의 으뜸마을로 만들어낸 배경에는 한 여성 리더가 있다.

부래미 마을 마당쇠로 불리는 고경필, 바로 이 여성이다. 기꺼이 자신의 명함에 마당쇠라는 직함을 적어놓은 그녀가 바로 부래미 마을의 홍보대사요, 견인차, 후견인이자 배후 인물이다. 이 마을에는 위원장과 총무, 사무장이 따로 있다. 웹 매니저, 식당 관리인도 있다. 한 달 매출이 천여 만 원에 이르는 이 마을은 작은 기업이다. 전국 평균에서 한참 떨어지던 이 마을의 한 가구당 소득은 이제 전국 평균을 훨씬 웃돈다. 다양한 학습모임이 만들어지고 문화클럽들이 생겼다. 스스로 배우고 성장하려는 동기가 커졌다. 여기에 이 마을의 미래가 있다.



[##_1C|1053585415.jpg|width=”550″ height=”541″ alt=”?”|부래미 마을의 마당쇠는 섬세하고, 사려 깊다. 주민을 섬길 줄 아는 머슴이다. _##]물론 저절로 된 것은 아니다. 성문법에서부터 불문법에 이르기까지 이 마을의 규정과 관행은 정말 다양하다. 작은 체험 행사 하나, 마을의 단합을 이루기 위한 배분의 원칙 하나가 너무나 세심하고 공정하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마당쇠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섬세한 여성의 리더십이 오늘의 부래미 마을을 있게 했다. 작은 것이 아름다운 법이다. 그 미세하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마당쇠라는 이름을 쓰는 여자


분명 여성인데 마을의 마당쇠라니! 어제 밤 부래미 마을에 도착해 민박을 한 집에서 아침을 먹고 기다리는데, 한 곱상한 여성이 나타났다. 마당쇠라는 명칭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도대체 왜 마당쇠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을까.

“마을 회관에 둘러앉아 마을 이름을 지을 때, 마을 위원장님은 상머슴, 총무는 암머슴, 길머슴, 벌머슴 등으로 이름 붙였죠. 나는 무슨 이름으로 할까 물었더니 마당쇠로 하라고 해서 그렇게 됐습니다. 여자에게는 쓸 수 없는 이름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지었죠.”

고씨는 계속 자신은 농업을 몰랐다는 말을 되풀이 한다. 너무나 겸손한 말이다. 사실 농업 경영자, 농업 기획자가 반드시 농업을 잘 알 필요는 없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좋은 친구와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 오늘 인터뷰에 등장하는 몇몇 이들에게서 그녀는 엄청난 영감과 조언을 얻었다. 사실 훌륭한 경영자에게는 역량 있는 주변 전문가로부터 지원을 잘 받는 일이 중요한 것 아닌가.

“지역개발, 농업발전에 전혀 관심이 없는 평범한 주부였어요. 중소도시인 경주에서 자랐고요. 사회활동을 하다가 놀고 있는 중이었죠. 시동생이 배 농사를 잘 지었는데, 다른 물건과 함께 똑같은 가격으로 팔리는 것이 못마땅했죠. 브랜드가 없었으니까요. 형제간에 어떻게든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남편의 소개로 민승규 박사라는 분을 만났는데, 이 마을에 이런 일을 해 보라고 해서 시작했죠.”

한 걸음씩 차근차근 마을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막막했지만 곧 지원자들이 등장했다. 정부의 지원도 힘을 보탰다.

“시장 개척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죠. 공식적인 제도권에 들어가서 좋은 가격에 농산물을 팔기 위해서는 자금과 식견이 있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농업벤처 기업을 운영하는 권영미 사장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간단하게 사이버 농장을 만들어 회원들에게 분양 했습니다. 사이버 상으로 자기 몫의 농장을 분양 받은 회원들은 가을이면 농산물을 사 가고, 직접 현장에 와 작업을 돕기도 했죠.
2002년부터 정부가 녹색체험마을을 모집하기 시작했는데, 2003년에 신청해 선정됐습니다. 체험마을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때죠. 정부에서 컨설팅 회사를 붙여줘 지금까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컨설팅 회사에서 구해준 일본의 사례가 담긴 비디오를 보면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조금씩 배워나갔습니다. 홈페이지도 만들었죠. 마을 만들기 운동의 사례로 유명했던 토고미 마을의 홈페이지를 연구하고, 직접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고급스럽게 웹 디자인을 해 줄 사람을 찾았죠. 아주 예쁘게 만들어 대단한 것처럼 보이고 싶었어요. 제가 여성이라 더 그러지 않았을까 싶네요.”


지붕 색깔 하나도 마을 규약으로


무슨 일이든 하나의 조직을 운영하는 데에는 원칙이 중요하다. 동시에 그 원칙이 너무 고지식하지 않고, 유연성 있게 적용되는 것이 중요하다. 마을 전체가, 혹은 개별 농가가 해야 할 일을 잘 배분하고,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고경필씨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마을의 운영원칙을 세웠습니다. 농민들이 정부지원을 받거나 상자를 주문하고, 팸플릿을 찍고, 마케팅을 할 때는 공동으로 합니다. 식당운영도 공동으로 하고요. 이런 경우 다 흩어져 모래알이 되면 손해를 보죠. 그러나 소비자를 상대로 할 때는 개인 단위로 해야 유리합니다.
소비자 만족도와 체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각 농가가 개별적으로 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예를 들어 포도농가 A, B, C가 있다면 각자 농사를 짓게 합니다. 이들을 묶어서 이익을 공동으로 계산하면 서로 농사에 신경을 안 쓰게 되죠. 자기 사업이 되어야 열심히 합니다. 또 농민들은 3월부터 5월까지 각자 농사를 짓고, 이 기간 동안 개별적으로 농사체험 고객을 받습니다.
경쟁이 열려 있어 누구에게나 기회를 줍니다. 잘하는 집에 사람들이 몰리죠. 개별적으로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곳도 있고, 각자 마케팅을 하기도 해요.”



[##_1C|1398926201.jpg|width=”500″ height=”375″ alt=”?”|개관 1주년을 맞은 다목적체험관은 강당, 세미나실, 펜션식 숙소 등을 갖추고 있다. ⓒ희망제작소_##]우리는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혹여 마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분쟁과 갈등을 사전에 방지하는 세밀한 규정이 부래미 마을에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나의 작은 공화국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각 농가의 지붕 색깔을 정해놓은 규정도 있다.

“문장으로 이루어진 마을규약도 있고, 문장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규약도 많습니다. 지붕 색깔에 관한 규약도 있어요. 새롭게 짓는 건물의 지붕 색깔은 원색을 쓰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외지인이 이 동네에 이사를 오면 1년간은 우리 사업에 참여할 수 없다는 규약도 있고요. 물론 이런 규약들은 회의를 통해 바꿀 수 있죠.”

이 마을의 재무 처리에 관한 규정은 농림부가 발간한 <주민참여형 마을가꾸기>라는 교재에실리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이 마을의 사무장은 항상 100만 원의 자금을 보관하면서 마을 사업에 필요한 경비를 지출한다. 사무장은 경비를 사용한 당일 영수증과 수입, 지출내역을 정리해 결제를 받고, 인터넷 상으로 정리한 다음 퇴근하도록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임원의 임기 등 조직의 규칙, 운영위원회 규칙 등은 서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공동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할 때에는 체험에 참여한 농가 수입의 10%, 농산물 판매의 경우에는 농가 수입의 5%를 뗍니다. 식당운영의 경우 식자재를 공동으로 사고, 이익은 마을 운영비로 쓰며, 연말에 남는 비용은 식당 아주머니들에게 배당한다는 원칙도 있죠. 자꾸 이런 제도를 만들어 노력이나 봉사에 대한 대가를 공정하게 배분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모든 체험 프로그램에 준비사항이나 매뉴얼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부래미 마을은 작은 중소기업이다


한 조직의 운명은 결국 구성원과 집행부에 달려 있다. 매우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조직 구성은 이 마을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전문성을 갖춘 사무장의 영입이나 웹디자이너의 채용은 다른 마을에서는 보기 어려운 일이다. 일은 결국 사람이 한다. 인재를 중시하는 조직은 잘 될 수밖에 없다.

“사무장에게 220만원의 월급을 지급합니다. 다른 곳에서 모신 분인데 4년 째 일하고 계시죠. 마을에 정착하시라고 대학원도 보내드렸죠. 학비의 70%를 지원했습니다. 주방을 관리하는 동네 분에게도 월급으로 120 만원을 드리고요. 그 외 운영위원장, 총무, 마당쇠인 저는 전혀 월급이 없습니다. 천천히 유급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처음부터 돈을 받으면 화합에 걸림돌이 되죠. 제 나름의 수입구조가 있습니다. 전국 150개 마을에서 매년 시찰을 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연구차 찾아오죠. 이 때 강의를 하고 강의료를 받는데, 금액의 10%는 마을기금으로 사용합니다.”

아무리 리더가 위대해도 구성원들이 따라오지 못하면 그 조직은 성공할 수 없다. 한 마을의 통합과 성공은 주민들의 수준과 역량에 달려 있다. 부래미 마을에서는 이런 저런 단위의 평생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역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경쟁력을 갖춰야 합니다. 지역의 리더 그룹을 모아서 지역발전을 위한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부래미 마을이 속한 율면의 이름을 따서 ‘율면사랑 공부모임’으로 이름 붙였죠. 여기 나오는 분들은 자발적으로 모이고, 스스로 돈을 내서 공부합니다. 지역 리더들의 의사소통 공간이기도 하죠. ‘주경야독’은 부래미 마을과 인근의 다섯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공부하는 모임입니다. 마을의 평범한 주민들이 대상인데, 지역개발사업이나 농촌개발사업에 관한 강좌는 기본이고, 수지침이나 마술도 배우죠.”


[##_1C|1101352733.jpg|width=”500″ height=”375″ alt=”?”|마을 쌀 저장고에 풍요가 흐른다. 부래미 마을은 성공을 넘어 행복을 꿈꾼다._##]마을의 학습 분위기가 자못 놀랍다. 게다가 평범한 주민들의 문화클럽이나 동아리가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고 있단다. 주민들의 활발한 참여와 성장이 부래미 마을의 미래를 담보하고 있다.

“국화를 예쁘게 만들어 전시하는 모임, 사진 동호회, 짚공예 모임, 야생화 동호회, 색소폰 동호회, 사물놀이 공부모임 등이 있습니다. 짚공예 모임은 올 봄에 대회에 나가 100만 원의 상금을 타오기도 했죠. 동호회 회원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회도 열고, 부래미 마을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농촌풍경 그리기 대회’도 6회째 열고 있어요. 지역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삶의 형태와 개인적 욕망에 따라 수요가 다릅니다. 앞으로도 수백 개의 모임을 만들 계획입니다. 주민들이 즐기고, 눈을 높여야 하죠. 주민들도 재미있어 합니다. 마침 우리 동네에는 서양화가이자 도예가인 주민도 있고, 추상화가인 주민도 있어서 다른 주민들의 훌륭한 선생님이 되고 있죠.”


부래미 마을이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


부래미 마을이 잘 나가는 이유는 무얼까. 고경필 씨가 술술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쓴다는 점은 이 마을의 중요한 성공 비결이다.

“체험 프로그램이 잘 운영되도록 신경 쓰는 점이 많습니다. 반찬은 밭에서 바로 따오는 농산물로 만듭니다. 가짓수 보다 신선도를 더 중시하죠. 늘 새로 밥을 짓고요. 이런 시스템이 중요합니다. 마을에 대해 신비감을 느끼도록 재료를 철저히 준비하죠. 간장, 고추장, 된장, 김치, 밑반찬은 몸에 좋게 만듭니다. 현대인이 좋아하도록 레시피를 새롭게 만들어 요리를 하고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반찬인 줄 알지만 이런 정성이 들어가는 겁니다.”

가격 정책과 프로그램의 시간표도 치밀한 계획의 결과다. 사소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부래미 마을 사전에‘대충’이란 말은 없다.

“우리 소비자들은 주로 초등학생 자녀를 둔 35 ~ 45세의 사람들입니다. 직장생활을 10여 년 했고, 월 소득이 350 ~ 400만 원 수준이죠. 이들이 한 달에 두 번씩 야외활동에서 쓸 수 있는 돈을 계산해 보면 마을에서 7 ~ 8만원 어치의 농산물을 사갈 수 있어요. 고속도로 통행료와 기름 값까지 합치면 15 만 원가량 지출을 하는 셈이고요. 이 모든 것을 따져서 가격정책을 세웁니다. 또, 이들의 특성을 고려해 시간 계획을 짭니다. 1분이라도 늦으면 이들은 참지 못하죠. 예를 들어 12시부터 1시까지 식사를 하고, 1시부터 프로그램을 시작한다고 하면, 늦게 오는 사람이 꼭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시작 시간을 1시 15분이라고 말해둡니다. 이렇게 미리 예고함으로써 만족도를 높이는 거죠. 도시 사람들의 정서와 코드에 맞추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행복이라는 원칙에 충실해야


부래미 마을이 성공을 거뒀어도 마당쇠의 고민은 계속된다. 마을의 성공 자체가 지향점은 아니다. 주민들이 행복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앞으로의 사업계획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합니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원칙에 충실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이 활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돌아보곤 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더 바쁘게 만들고, 힘들게 한 것은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월요휴무제를 도입했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일본과 중국에 다녀오기도 합니다. 암암리에 공무원들은 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을 요구합니다. 저는 반대로 우리 주민이 언제 가장 행복한지를 연구하죠. 마을기금이 1억 5천만 원 정도 모였는데, 재테크 방안도 연구하고,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기도 해요. 마을 리더인 제가 다른 사람의 요구만을 좇아가다 보면, 스스로 불행해질 수 있어요. 욕심을 내다가 원칙을 잃어버리면 그럴 수 있죠. 우리가 행복한 것이 중요합니다.”

정리_이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