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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가, 무역회사 회사원, 해외 떠돌이, 인터넷 신문 대자보 편집국장, 민주노동당 기관지 온라인 편집국장… 이렇게 다양한 삶의 편력을 가진 한 여성이 농사를 짓겠다며 시흥으로 내려왔다. 인도의 환경운동가 반다나시바를 만난 이후 그의 삶과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는 가난한 여성들과 함께 자활을 위한 농업을 꿈꿨다.

2월 16일 시흥 연두농장의 변현단 대표를 만나 귀농 이후 4년 동안 그가 그렸던 삶의 궤적, 농사의 궤적을 살펴봤다.‘농(農)’이라는 열쇳말을 가슴에 품고 살아오면서 그는 이미 철학자가 된 듯했다. 변 대표가 풀어내는 지난날의 경험에서 농업의 대안, 아니 새로운 삶의 대안을 볼 수 있었다.


화폐가 필요 없는 농업, 삶을 치유하는 농업


“여기 온 지 4년이 지났습니다. 생태문제에 접근하면서 그 열쇳말이 무엇인지 고민했죠. 과거에는 혁명을 이야기했는데, 그 변화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삶의 변화입니다. 귀농지를 구한다는 핑계로 전국을 떠돌아다녔습니다. ‘농(農)’이야말로 생태 환경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한 할머니가 추운 겨울날 약초를 캐기 위해 산을 오르는 모습을 보며 도시의 삶을 되 돌아봤다고 한다. ‘산에는 겨울에도 먹을 것이 있구나. 도시에서는 화폐가 없으면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는데… .’

“안동에서 10년 동안 귀농생활을 한 자폐장애인을 만났습니다. 아주 좋아졌더군요. 평생 가져가야 하는 병을 앓고 있지만, 대인관계가 가능해졌습니다. 동상으로 다리를 잃은 지체장애인이 파종을 하고 있는 모습도 봤습니다. 부인이 아이와 함께 도망을 간 아픈 과거가 있었지만, 농사를 통해 힘든 과정을 벗어났다고 하더군요.”

그는 “농사를 지으면 자연과 함께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정서적, 물질적으로도 치유가 된다”고 했다.

“우리는 소비와 상품 속에서 돈의 노예가 됩니다. 농사를 짓는 삶은 자신의 손으로 의식주를 직접 만들어내죠. 화폐로부터 독립할 수 있습니다. 함부로 버리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농의 삶입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삶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초생활보장수급자들과 시작하다

변 대표는 2005년부터 10명의 기초생활보장수급자 여성들과 함께 자활영농사업단을 꾸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도시의 삶에서 밀려난 이들이 농사를 통해 경제적 자립을 이루고, 삶의 가치를 찾아 나선 것이다.

“저는 농사를 지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취재를 하면서 돌아다녔죠. 함께 농사를 짓는 10명의 아주머니들도 기초생활보장수급자로 살았던 사연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농사를 몰랐기 때문에 주경야독을 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행정업무를 처리한 후 밤 11시부터 생리학, 병리학, 유기농 등을 공부했죠. 병충을 보면 사진을 찍어 함께 연구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농사만 함께 지은 것이 아니다. 서로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듬고, 아픔을 나누며 공동체를 꾸려왔다.

“함께 일하는 분들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도 다 압니다. 농사짓고, 돈 버는 일 뿐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회원들의 아픔은 모두 진행형입니다. 신용불량, 모자 혹은 부자간의 갈등, 가난의 대물림도 있죠. 알코올 중독자 남편이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전에는 ‘한탕주의’ 발상을 갖고 살았던 사람도 있구요.”

”?”회원 가정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회원 가족 모두를 불러 함께 어울린다고 한다. 농번기에는 남편과 자식들이 농장으로 나와 함께 일하고, 저녁이면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가족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일 끝나면 오순도순 술 한 잔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죠. 어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알게 됩니다. 여행도 가족단위로 모두 함께 가려고 노력합니다.”


새로운 농업 실험의 콘셉트는‘전통’


연두농장에서는‘어떻게 지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끊이지 않는다. 전통농업 방식을 재현한 새 농장도 계획 중이다.

“하우스 시설을 갖추면 사계절 내내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먹고 사는데 도움은 되겠죠. 그러나 저는 하우스를 짓는 일에 반대합니다. 토양이 나빠지기 때문이죠. 계절 채소 중심으로 윤작을 합니다. 감자를 심은 땅에 김장채소도 심죠. 사실 연두 농장에서 유기농은 힘듭니다. 유기농은 윤작 중심이지만 저희는 주로 단작을 하죠. 이곳은 공기도 안 좋고 물도 안 좋아요. 다만, 농약은 치지 않습니다.”

변 대표는 ‘시흥에 천착하는 농업은 무엇일까’고민 했다고 한다. ‘한 번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에 시흥 물항리 일대에 토종 종자를 심어 전통 방식으로 농사를 짓기로 했다.

“시흥시에서 물항리 100만 평 부지에 생태공원을 조성하려고 하는데, 그 중심에 우리 농지가 있습니다. 근처에서 자라는 산나물이 모두 토종이죠. 안철환 선생(희망탐사 64에 소개)과 함께 토종 종자 모임을 갖기도 했습니다. 전통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바이오에너지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생태학습이 가능한 체험 공간으로도 꾸려나갈 겁니다.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체험공간을 제공하면 수익도 낼 수 있죠.”

변 대표의 계획은 단단했다. 새 농장에서 고집스럽게 지켜갈 원칙이 하나 둘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농기구 기계화도 안 할 겁니다. 휘발유도 가능한 안 쓰고요. 여기서 농사를 짓다보니 계속 전 경작자가 사용했던 비닐이 땅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비닐을 안 쓸 겁니다. 모든 것은 우리가 만들어 씁니다. 물론 소규모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물항리까지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자고 결의했답니다. 물항리 농장에는 자동차가 못 들어가게 할 생각입니다.”

물항리에서 시행될 생태학습 프로그램은 이미 연두농장에서 그 씨앗이 자라고 있다.

“복지관과 지역봉사단체협의회에서 지역 주민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달라고 하더군요. 먹을거리 뿐 아니라 의식주 모두를 자기 손으로 직접 꾸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원했습니다. 생태적으로 사는 것을 체험하는 거죠. 가족 단위 참가자들과 함께 똥 이야기로 시작해 프로그램을 이끌어나갑니다. 참가자들이 곧 연두농장의 소비자가 되죠.”

주민들을 대상으로 주말농장도 열 계획이다. ‘연두텃밭’이라고 이름 붙인 주말 농장을 50가구 정도에게 분양한다고 한다. “직접 해보는 것”이 농업을 받아들이는 가장 빠른 길이다.

“연두 농장 바로 앞이 아파트 단지입니다. 주말농장을 분양하겠다고 하니 반응이 좋더라고요. 아무리 농업을 이야기하더라도 직접 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장에서 돈을 주고 사는 음식은 집착의 대상이 되지만, 연두텃밭에서는 주말 저녁 마다 음식을 같이 해 먹을 수 있습니다. 주말농장을 통해 문화를 공유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은 주민들은 연두농장의 홍보대사가 되어줄 겁니다.”


“사회적 약자의 귀농센터가 될 것”


천 오백평 규모의 연두 농장에서는 다양한 사업이 이뤄지고 있다. 각기 다른 재주를 지닌 사람들이 힘을 모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씩 특기가 있죠. 농장에 나오는 아저씨 한분은 퇴비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는 퇴비 재료로 한약 찌꺼기를 모으고, 아미노산을 만들기 위해 음식쓰레기를 수거해오고 있습니다. 조개껍질도 모으고 있답니다. 이렇게 퇴비를 만들면 주말농장 회원들에게 판매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계속 사게 해서는 안 되고, 스스로 만들 수 있게 도와줘야죠.”

”?”연두농장에서는 양계사업도 하고 있다. 직접 만든 사료를 먹여 토종닭 30마리를 키운다. 발품을 팔아 모은 재료로 사료를 만드니 돈이 들어갈 이유가 없다. 병아리도 외부에서 사오지 않고, 인공부화를 할 계획이다.

“콩 농사를 지어 콩나물을 만들고 있습니다. 두부도 만들려고 합니다. 두부, 콩나물, 유정란 세 가지 생산물을 일주일에 두 번씩 회원들에게 배달하는 시스템을 구축할겁니다. 밭에서 나는 고추로 김치를 만들어 시장 가격 보다 저렴하게 판매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맛 좋은 연두 농장의 김장배추는 없어서 못 팔 지경이지요.”

변 대표는“이런 사업 분야 하나하나가 사회적 기업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연두 농장에서 축척한 지식과 정보는 앞으로 귀농을 꿈꾸는 이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그는 “연두농장이 저절로 사회적 약자들의 귀농센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아직 기획 단계에 있는 또 다른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직업 재활에는 농사만 한 것이 없죠. 직업 훈련과 함께 치료의 효과가 있습니다. 장애인들을 복지관 안으로 밀어 넣어서는 안 됩니다. 탈 시설화해서 바로 농업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변 대표는 현재 전국 100여개 농장이 가입해 있는 자활영농네트워크의 대표직을 맡고 있다.
자활을 위해 농사를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농업교육을 실시하는 자활영농교육센터 설립도 그의 계획 중 하나다.

“농사를 단순한 일자리로 생각하면 어떠한 비전도 없습니다. 농업에도 포트톨리오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사람 농사가 안되어 있는 상태니 교육에 초점을 두어야 하죠. 농업 철학에서부터 퇴비 만드는 법에 이르기까지 배우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자활영농교육센터를 세워 대화도 나누고, 실제적인 영농 기술 교육을 할 겁니다. 양질의 교육을 통해 자활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을 농업 인력으로 키워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정리_이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