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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준의 유럽에서의 사색

현대 사회에서 정치는 이른바 국회의원과 그들의 주변에 위치한 직업 정치가들만이 담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지난 20여 년간의 민주화 경험 속에서 그리고 최근 벌어지고 있는 입법전쟁과 국가-시민사회의 새로운 갈등을 통해서 다양한 방식의 정치적 주체들의 정치적 선택과 그들 간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이 어떻게 정치가들의 선택에 영향을 기치고 있는지, 그 역동적인 정황을 지켜 보아 왔고 또 지금도 보고 있다. 질이 좋은 정치학이 정치사회학이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명목상 비정치적이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인 영향력이 높은 여러 주체들 중 전문가 집단이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세계 여러 나라들은 행정부의 범위에 속한 여러 위원회들을 두고 있다. 이들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 집단에 의해 구성되기도 하고, 혹은 사회적으로 각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정부 위원회들은 특수한 영역의 정부 정책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일반적 식견 이상을 지닌 이들의 판단을 토대로 자문을 제공하는 역할이나, 여타 갈등하는 사회 세력들의 목소리를 조율하는 독특한 기능을 담당한다. 나아가 국회라고 하는 공식적인 이익대변 기구가 갖는 전문성과 대표성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기여하면서 다수결의 폐해 내지 정치의 중우화를 막는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른바 ‘위원회 정치’라는 표현은 이들이 때로 상당히 정치화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예컨데, 1998년 2월 경제위기와 권력 교체의 상황에서 사회협약을 체결할 당시 급조되었던 노사정위원회는 전문가, 이익단체, 정당관계자, 행정부의 대표들이 모두 참석하여 국회에서의 의사결정에 앞선 응집된 사회적 압력을 형성하였던 하나의 ‘위원회 정치’의 대표적 사례였다고 기억한다.

오늘날 마치 ‘트로이의 목마’처럼 현정부의 범위 안에 남아 정부의 정국 운영 방식과 마찰을 빚는 것도 불사하고, 우리나라 인권 수준의 수호를 위해 이런 저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 정부에서의 인권 신장을 위한 정책추진 과정에서 활용된 ‘위원회 정치’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위원회 정치를 잘 이용하면 정치적 묘미가 살고 의회의 한계를 보충할 수 있고 정책에 진한 내용적 정당성을 가미할 수 있지만, 잘못 이용하면 정부의 정치적 도구로 악용되고, 의회와 해당 분야의 사회적 담론을 위축시킬 여지도 있다. 따라서 위원회를 구성하는 방식이나 그것이 지니는 권한 그리고 그것의 독립성에 대해서 면밀하고 타당한 고려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통심의위)는 일정한 독립성을 지니고 있지만 넓게 보아 전체적인 정부 행정체계에 속한 여타 위원회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방통심의위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지며 언론에 자주 부각이 되고 있는 듯하다. 그다지 반기고 싶지 않은 방식으로 말이다.


”?”방통심의위는 지난 주 한 여성 뉴스 앵커가 미디어 법의 처리 과정에서 행한 멘트에 대해 요컨대 편파적이고 사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행동이라로 평하며, 시청자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 중징계를 내렸다. 같은 방송국의 여러 시사 관련 프로그램들에 대해 유사한 방식의 제재를 취하기도 했다.

방송의 정치화를 비판하는 이러한 행동은 그 자체로 다분히 ‘정치적’이다. 겉으로 공익을 표방하고 그것에서 벗어난 방송국의 방송 행태를 비판한다고 하지만, 그러한 사이비 공익수호정신이 망가뜨리고 있는 것은 바로 국민들이 바보가 되지 않고 정부 정책과 기득권층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정치적 의견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누려야 한다는 진정한 공익적 가치이다.

현대사회의 공익성이란 정부나 일부의 친정부 성향의 전문가들이 그것을 독점적으로 정의를 내리는 것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다. 다양한 사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집단들끼리 서로 공감하고 동의하는 방식으로, 즉 ‘사회적으로 구성’되어야 하고 그러한 틀을 만드는 과정 자체도 이미 일정한 정치적 성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방통심의위는 그 구성 자체에서부터 정말로 공익을 대변하는 기구가 될 수 있을지 그 사회적 정당성이 심대히 떨어진다. 대통령과 정부여당이 9명의 위원들 가운데 6명을 추천할 수 있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그 구성 방식 자체에서부터이미 상당한 정도로 편파성이 내재되어 있다. 방통심의위가 진정한 공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위원회의 구성에서부터 공정성과 공익성을 담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내세우는 공익 지향성은 설득력이 약하다.

독일에는 우리나라 방통심의위 또는 방송통신위원회와 똑같은 모습의 기관은 아니더라도, 유사한 명목을 지니는 제도적 기구가 존재한다. 그 모습은 진정한 공익을 대변하는 위원회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지방 분권화가 잘 이루어져 있는 독일은 기본적으로 각 주별로 공영방송 공중파 채널들을 하나씩 갖고 있다. 그리고 각 주별로 우리나라의 방통위와 같은 기능을 하는 소위 미디어위원회(Medienkommission)가 구성되어 방송을 포함한 각종 미디어들의 규제자로서 기능을 한 다. 미디어위원회는 각 주별로 이름도 약간씩 다르고, 그 구성원리도 조금씩 다르지만 구성방식의 큰 원리는 대체로 동일하다.

예컨대, 독일에서 가장 큰 주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RW)주의 미디어위원회의 위원은 총 25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7인은 주정부의 국회의원들이다. 나머지는 개신교와 구교의 대표, 유태인 문화단체 대표, 노동조합 대표, 기자협회 대표, 사용자단체 대표, 대학총장대표, 개방대학 총장 대표, 문화인 협회 대표, 영화/비디오 관계자 대표, 사회복지단체 연합회 대표, 여성 및 가정 단체 대표, 아동보호 단체 대표, 사회단체 대표, 소비자 단체 대표, 환경보호 단체 대표, 지역 이민자 단체 대표 등 각계 각층, 특히 시민사회와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단체들의 대표들이 다수 참가하고 있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그 동안 필자는 수 년간 독일에 체류하면서 이 나라 각 주들에 지역적인 기반을 두고 있는 여러 공영 방송들을 시청하면서, 진정한 공영성이란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하루 종일 어린이 프로만 방송하는 채널(KIKA)이 따로 존재한다. 이 채널은 인터넷에서도 실시간으로 무료로 쉽게 볼 수 있다. 사회적 약자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전 세계 후진국들의 어려움과 문제들을 조명하는 다큐와 르포성의 프로그램들이 독일의 TV에서는 늘 홍수를 이룬다. 노동조합의 의견이 매우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알려진다. 왜 독일의 공영방송들이 공영적이고 공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은 미디어위원회의 구성에서부터 단적으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현재 우리나라의 방통심의위(또는 방통위)는 지극히 비사회적이고 대표성과 정당성이 결여된 보수 엘리트들의 집단으로 보여진다. 방통심의위의 이번 결정은 진정한 공과 사를 공평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혹은 그것의 정의를 편향된 정치적 시각에 입각해 행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언론이 정부를 비판하는 당연한 관행을 사익이라고 몰아부치며, 지금과 같이 특정 정권의 정치적 이해에 편승하는 방통심의위(또는 방통위)는 스스로 존립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있다. 혹시 방통심의위(또는 방통위)의 구성원들은 현 정부와 코드를 맞추며, 마치 정권의 도구로 이용되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방통심의위의 지금의 결정은 공익을 표방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족벌신문의 방송장악을 정당화하고 방송을 그들과 그들이 대변하는 기득권층의 이익 옹호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여, 한국 사회에서 공익실현의 장을 협소화시키고, 대중들의 우민화를 부추기는 매우 반공익적인 태도이다.

친여성향의 방송엘리트들이 지배하는 방통심의위의 결정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현재의 관행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된 흐름에 배치되는 모습이다. 그들은 공익을 정의내릴 대표성을 갖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지금과 같이 한편에 치우치는 정치적 결정을 일삼는 모습이 나타내듯이, 그 중립성도 결여되어 있다.

진정한 공익을 구현하고 그 결정에 진정으로 수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미디어 위위회처럼 방통심의위나 방통위를 다양한 사회적 집단들의 참여를 통해 민주적으로 재구성 하는 방안을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글_ 박명준 (희망제작소 객원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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