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모] 선택적 기억상실증후군

정광모의 국회를 디자인하자

국정감사가 한 고비를 넘고 있다. 이번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은 지금 겪는 국정 어려움은 노무현 정부가 한 잘못된 정책 때문이라며 과거 실정을 파헤치는 반면 야권은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10개월’이라며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실타래 끊듯 나라 운영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으니 지난 정부가 했던 국정을 비판하는 것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치인은 이런 비판이 지나쳐 자신에게 유리한 사건만 기억하고 불리한 일은 잊어버리는 선택적 ‘기억상실증’이란 중병에 걸려 있다.

인간에게 기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과연 옛날 있었던 일을 사진으로 재생하듯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가? 인간의 뇌는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은 살려두고 자신의 생존에 불리한 기억은 어두침침한 지하실로 보내버리는 방식으로 기억을 가공하고 처리한다. 정당과 정치인뿐 아니라 모든 인간집단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기억을 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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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모든 과거 일을 생생하고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으면 생존에 유리하다고 할 수 없다. 러시아의 신경과학자 루리야는 뛰어난 기억력을 간직하고 기억술사로 일한 사람을 30년 간 관찰하고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란 책을 썼다. 이 책의 주인공은 망각하기 위해 애쓰다 말년에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보르헤스가 쓴 ‘기억의 천재 푸네스’란 단편은 비상한 기억력을 지녀 모든 일을 기억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기억을 잘 보관할 뿐 기억의 무게에 짓눌려 아무런 정신적 일도 할 수 없는 처지다.


우리 정치는 잊는 ‘능력’을 비상하게 발달시켜


때로 적당하게 잊어버려야 좋은 일도 있지만 우리 정치는 이런 잊는 ‘능력’을 비상하게 발달시켜왔다.

지금 정부는 대통령 철학을 이해하는 사람과 함께 일을 해야 한다면서 곳곳에 낙하산 인사를 하고 있다. 지난 정부 때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부의 코드인사와 낙하산 인사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한나라당이 노무현 정부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국익은 안중에도 없고 대통령과 친한 사람들, 대통령 마음에 걸리는 사람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는 발상만 있을 뿐”이다. 물론 지금의 한나라당은 그런 말을 현 정부에게 하지 않는다. 과거의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8. 15특사로 재벌총수들을 사면하자 민주당 대변인은 “국민적 합의와 동의 없이 마구잡이로 재벌총수들을 사면한 것은 국민 분열용 사면”이라고 했고 민주노동당은 “사면권의 남용일 뿐만 아니라 오용”이라고 비판했다.

노무현 정부가 대선 뒤인 작년 12월 31일 임동원, 신건 등 전 국정원장들과 박지원, 한화갑 등이 포함된 사면을 하자 한나라당은 “노대통령은 자신의 측근을 포함하는 등 임기 종료 직전까지 사면권을 남발했다”고 비판했다. 노무현 정부 때 민주당은 대통령의 사면권 남용에 대해 별다른 비판을 하지 않았고, 지금 한나라당은 과거와 달리 대통령 사면권에 대해 ‘국민 화합을 위한 조치’라며 환영하고 있다.

최시중 방통위원장은 KBS 수신료를 올려야 한다고 했다. 그는 수신료 2500원을 책정한 지 25년이 지났는데 지금도 2500원이라며 물가 인상 등을 생각할 때 그대로 두는 건 무리가 아닌가라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때 한나라당은 KBS 수신료 인상에 반대했고 민주당은 찬성했다. KBS가 처한 수신료 관련 환경은 똑같은데 정권과 방통위원장이 바뀌자 서로 입장이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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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증후군은 관료들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이 노무현 정부에 감세 정책을 주장하자 재정경제부는 2005년 11월 ‘감세논쟁 주요 논점정리’란 자료를 내었다. 이 자료는 감세 정책이 왜 문제인지 더 잘 정리할 수 없을 정도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조목조목 감세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기획재정부는 감세가 기업투자를 늘리고 성장을 높인다면서 앞장서서 감세정책을 홍보하고 소득세와 법인세를 비롯한 많은 감세안을 발표하고 있다. 언론은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에서 일어난 똑같은 사안을 두고 정 반대로 보도를 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정치인과 관료, 언론인 모두 ‘영혼이 없는 집단’이다. 이런 사례는 너무 많아 정치학자들이 수십 개의 흥미 있는 박사 논문 감으로 삼을 만하다.


‘수권 정책 정당’이 되는 가장 좋은 처방


지금 민주당의 지지도가 높이 올라가지 않는 이유도 국민들이 민주당이 야당일 때 한 말과 공약을 권력을 잡았을 때 뒤집고 다시 야당이 되자 자신은 그런 적이 없었다는 듯 이명박 정부를 맹공하는 선택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정권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억상실’ 증상을 보인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국민들도 그 사실을 잘 깨닫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는 특이한 질병에 걸린 두 환자 정당이 그런 질병에 대한 성찰은 꿈도 꾸지 않고 번갈아 가며 정권을 잡은 셈이니 국민들이 정당과 정치인을 ‘브로커’로 봐도 억울해 할 수 없다.

지금 민주당은 다음에 정권을 잡으면 대변인이 현 정부를 상대로 낸 논평을 모두 모아 그 논평에서 비판한 대로 낙하산 인사와 사면권 남용 등 모든 제도를 고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당은 과거 노무현 정부 때 한 논평과 비판을 찾아보고 그 날카로웠던 비판의 십분의 일 만이라도 이명박 정부에 하는 건 어떨까?

‘100년 가는 정당’과 수권 정책 정당’이 되는데 이 보다 좋은 처방은 없을 것 같다.


[##_1L|1285759074.jpg|width=”120″ height=”91″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_##] 정광모는 부산에서 법률사무소 사무장으로 10여년 일하며 이혼 소송을 많이 겪었다. 아이까지 낳은 부부라도 헤어질 때면 원수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인생무상을 절감했다.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하며 국록을 축내다 미안한 마음에 『또 파? 눈 먼 돈 대한민국 예산』이란 예산비평서를 냈다. 희망제작소에서 공공재정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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