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경쟁력을 가진 농민, 이해극

<박원순의 희망탐사 48>

농사꾼, 고추 증산왕, 발명왕, 마을 청년회장, 농민대학 강사, 농민발명가협회장, 전국 유기농생산자연합회장, 친환경농업 전도사, 통일 농부. 이 별칭은 모두 ‘한가지골 친환경농장’ 주인 이해극 씨를 일컫는 말이다. 이 중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바로 ‘농사꾼’이다.

조상 대대로 400년을 충북 제천시 봉양읍 장평리에 살아왔다는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적으로 농사를 좋아했다. 중학교시절 4H활동을 하면서 그는 ‘봉사’와 ‘공동체 삶’, ‘고향의 소중함’을 깨닫고 농사를 지으며 고향땅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는 앞에 열거한 별칭 외에 ‘황당무계당 당수’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없다고 믿는 이해극 씨는 그를 당할 농민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말한다. 황당무계한 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가 만든 비닐하우스자동개폐기가 일본,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까지 전 세계 농민에게 팔리고 있고, 연간 3~5억 원 정도의 농업소득을 올리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이 말이 황당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모자랄 것도, 거칠 것도 없는 농민 이해극. 그는 나이가 60이 되니 인류를 생각하게 됐고, 전 세계 농민과 연대감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 북한까지 가서 비닐하우스 설계와 시공, 기계 설치를 해 주고 다닌다. 그가 별칭 중에 가장 좋아한다는 ‘농사꾼’은 그래서 결코 평범하게 들리지 않는다.

식량자급률 26%와 농민, 그리고 소비자의 책임
[##_1L|1258701711.jpg|width=”309″ height=”418″ alt=”?”|▲ ‘황당무계한 농사꾼’ 이해극. ⓒ희망제작소_##] 농사꾼 이해극은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식량 자급률 문제를 화두로 꺼내 놓았다. 한국의 식량 자급률이 너무 낮으며, 그로 인해 식량 안보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안타까움과 분노가 섞인 발언이었다.

거기에는 점점 경제지상주의로만 접근하는 농업정책에 대한 불만이 서려 있었고, 단순히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농업을 홀대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 그리고 식량이 곧 안보라는 굳은 믿음도 서려있었다.

“나라를 지탱하려면 식량이 풍부해야 합니다. 선진국의 예를 보면 2만 달러 소득 국가의 공통점이 식량 자급률이 80%를 넘는다는 것입니다. 농업은 경제적으로만 따지면 안 돼요. 돈으로 따지면 사다 먹어도 되지만 안보적인 측면에서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70년대부터 식량의 무기화, 화석에너지 한계에 따라 콩과 옥수수의 기름을 활용한 에너지 대체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26%정도의 식량자급률에 불과할 뿐입니다.

1년 12달 중 10달을 외국의 식량에 의존한다면 어찌 안보가 튼튼한 국가이겠습니까? 어느 나라나 농업은 사양 산업입니다. 그러나 한 국가가 유지되려면 자국 농산물이 50-60%는 되어야 국가안위에 문제가 없습니다. 영국은 2차대전 때 식량자급률이 40%였습니다. 하지만 식민지를 많이 가지고 있어 걱정이 없었죠.

그런데 2차대전 발발로 도버해협이 막히면서 엄청난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영국은 식량 자급률을 높이기 시작했고 지금은 80%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급률을 높이는데 40년이 걸린 것입니다. 자급률을 높이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해극 씨가 보기에 한국 사람들은 식량 자급률이 낮아서인지 한국 농산물에 대해 신앙 같은 애정이 있다. 외국농산물이 한국 사람들의 밥상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라지 하나를 사더라도 국산을 사려고 한다. 이 지점에서 이해극 씨는 농민이 국민의 건강을 책임져 주어야 하며, 국민들은 깨끗한 음식을 먹기 위해 한국 농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자기가 생산한 것을 먹지 않습니다. 농약을 줬기 때문이죠. 자기가 생산한 것을 먹지 않는데 과연 누구보고 먹으라는 말인 것인지……. 국민들은 농특세를 냅니다. 농민을 위해 내는 것이 아니라 종국적으로는 자기를 위해서, 좋은 농산물을 먹기 위해 내는 것입니다.

아닌 말로 강 살리기 운동을 하는 것이 물고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국민들이 신토불이를 신앙처럼 붙들고 국산 농산물을 찾는 것도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반면 우리 국민들은 농업 자체에 대해서는 너무 미온적입니다. 국민의 건강을 책임져야 하는 농민, 그런 농민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한국농업이 다 망하고 나면 국민들이 모두 후회할 것입니다.”

‘황당무계당 당수’ 이해극이 한나라당에 준 질문과 대안
-국가가 퇴비 만들어 농민에게 무상제공하면 의료비용 저절로 몇 배나 절감된다.

이해극 씨는 우리나라 농업이 이미 망했다고 진단한다. 식량 자급률이 20%대로 떨어지고, 농업을 이을 후계자들이 없어지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미 망한 농업을 다시 살리는 길은 무엇인가? 이해극 씨는 가장 안전한 농산품을 생산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의 지원이 필요한데 그 지원방법이 독특하다. 들어보자.

“한나라당 연수회 때 ‘고정관념의 탈피와 창의력개발’이라는 제목으로 두 시간동안 강의를 했습니다. 당시 저는 저를 황당무계당 당수 이해극이라고 소개하고, 한국농업은 이미 망가졌다, 농업을 이을 후계세력이 없어졌고, 식량자급률은 20%대로 떨어졌다는 내용의 강의를 하고, 그 대안을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지구촌에서 가장 안전한 농산품을 생산하는 것이 우루과이 라운드의 대응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약 덜 치고, 지력을 회복시켜 생태계가 복원되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사실 지금 축분이 갈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무를 심기만 하고 가꾸는 데 소홀했습니다. 이것을 가꾸어야 합니다. 중간에 가지치기도 하고 일부는 솎아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합쳐 농업에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가지치기 한 나무를 톱밥으로 만들고, 축분과 섞어 퇴비를 만든 다음 이것을 농민에게 무상으로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유기농이 더 확산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1조 원 어치만 투자하면 3조 원 어치의 의료효과와 건강효과가 날 것입니다.”
[##_1R|1249683462.jpg|width=”451″ height=”336″ alt=”?”|▲ 건강한 먹거리를 위해 유기농산물을 재배해야 한다. ⓒ희망제작소_##] 건강한 먹거리는 단순히 농업을 위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게 이해극씨의 생각이다. 불임인구 150만 쌍, 청년들의 정자 수가 줄어드는 현실, 그리고 아토피 환자의 급증 등이 모두 먹거리 문제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전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은 농업뿐만 아니라 국민의 건강한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다.

“저는 40년 동안 주사를 맞지 않았습니다. 산비둘기가 주사 맞고 삽니까? 사스가 러시아의 기러기가 호주가다가 싼 똥 때문에 발생했다고 하는데 기러기가 언제 주사 맞고 날아다닙니까? 축산물에 항생제 들어가는 것을 발표를 못할 정도라고 합니다. 비정상적인 음식은 비정상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농업을 살리기 위해 그는 은퇴자들을 활용하는 대안도 내놓는다. 남는 인력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구 소련의 대차농업(텃밭농업)을 대농장과 더불어 병행해야 합니다. 은퇴자들이 많아지는데 저런 인력을 등산만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일본에 가보면 80넘은 노인들이 마당에 풀을 뽑거나 정원을 관리하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도 퇴직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국민이 건강해 지려면 이런 퇴직자들을 활용해야 합니다. 퇴직자들이 농지를 500평정도 매입하는 것에 대해 세금을 면제 해 주고 농자재나 퇴비를 대주는 방법도 하나의 대안이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식에게 농약 쳐 먹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국민 모두가 건강해집니다.”

모든 것이 된다고 믿고 실천한다-발명왕 이해극

이쯤해서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해극씨의 대해 잠시 알아보자. 그는 앞에서 열거한 대로 여러 별칭을 갖고 있다. 그런 별칭이 그냥 생길 리는 만무할 터. 그의 별칭이 생기게 된 연유를 살펴 올라가면 그가 농사꾼으로 걸어온 이력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해극 씨는 발명왕, 그리고 농민발명가협회장이라는 별칭이 있다. 그가 이 별칭을 갖게 된 계기는 바로 비닐하우스 자동개폐기를 발명해 전 세계로 수출했기 때문이다. 비닐하우스 옆문을 열고 닫는 일이 큰 노동인 시절, 그는 아내가 비닐하우스 문을 여닫느라 인대가 늘어날 정도라는 하소연을 듣고 자동개폐기를 생각해냈다. 그리고 동생과 함께 제작에 들어갔다.

“비닐하우스 자동개폐기를 동생과 함께 개발했는데 이는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기계입니다. 이 기계는 전 세계의 농민들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동개폐기는 90년도에는 1대에 15만 원정도 했는데 17년이 지난 지금 6만 원 대로 값을 내렸습니다. 생산비절감을 통해 가격을 내렸더니 독일, 일본, 프랑스, 네덜란드 등 전 세계에서 1순위로 팔리고 있습니다.”

아내의 호소에 귀 기울여 만들어낸 비닐하우스 자동개폐기는 농사꾼 이해극에게 발명왕이라는 칭호를 안겨주었다. 그뿐 아니었다. 이해극 씨는 1996년까지 직접 기계를 생산하다가 그 후에 부산에 공장을 지어 세계 각국에 이 기계를 수출하고 있다. 직접적인 개발은 자신이 했지만 현재는 동생들이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_1L|1010656523.jpg|width=”452″ height=”334″ alt=”?”|▲ 이해극씨가 발명해 해외로 수출하는 비닐하우스 자동개폐기. ⓒ희망제작소 _##] 그가 발명한 것은 비단 자동개폐기만이 아니다. 1973년에 온실 다목적 경보기라는 것을 개발했다. 비닐하우스 농법이 시행되면서 비닐하우스 안의 온도를 살펴볼 필요가 생기자 만든 것이었다.

또 자동파종기도 발명했고, 트랙터 뒤에 붙여 밭을 갈고 두둑을 만들고, 여기에 비닐까지 덮어주는 일괄피복작업기도 그의 작품이다. 모두 농사와 관련된 발명인데, 그것은 이해극이 “죽었다가 태어나도 농사밖에 지을 것이 없다.”고 말하는 농사꾼이기 때문이다.

농사꾼 이해극 씨는 순수한 농업소득으로 1년에 3억 원에서 5억 원정도의 매출을 올린다고 한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가 우리나라 유기농업 1호 농장을 직접 만들고 농사 일에 쓰이는 기계를 직접 만들었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이해극 씨는 1990년 강원도 정선에 있는 청옥산 1200고지에 600마지기가 되는 농장을 만들었다. 1994년 유기농업 1호 농장 지정된 이 농장을 만든 것은 농사 안 되는 곳을 골라서 갔던 탓이다. 한번도 작물을 받아본 적 없던 땅에서 이해극씨는 3년간 고생해 지금은 수많은 작물을 생산해내고 있다.

농업과 관련된 다양한 시도를 펼친 이해극 씨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뜻한 바를 일궈내는 실천력을 갖추고 있다. 모든 것이 된다고 믿고 실천하는 이해극 씨의 의지 덕분이다.

“저는 모든 것이 된다고 믿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 중에 안 된다고 하는 사람 보면 내쫓습니다. 제가 세명대학교 혁신포럼에 갔더니 모두 안 된다는 소리만 하더군요. 그걸 보고 다시 안온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농장에 와보고서는 안되는 말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달을 노래한 당나라 시인 이태백만 외치는 사람은 달나라 못 가지만 달나라 가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는 것처럼 전 제가 하는 일을 믿고 실천하면 그 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이 60이 되니 인류를 생각한다-전 세계의 농민을 생각한다.
[##_1R|1341544756.jpg|width=”230″ height=”309″ alt=”?”|▲ 유기농산물로 다양한 농가공품도 생산한다. (유기농 브로콜리국수) ⓒ희망제작소_##] 농사꾼 이해극 씨는 나이 60이 되니 전 세계 농민들을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른바 농민과의 연대의식이 생긴 것이다. 그는 농업이 전 세계적으로 사양사업이다 보니 세계 여러 나라의 농민들이 과도한 노동에 시달린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비닐하우스 자동개폐기를 싸게 만들어 공급하려 한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것, 자신이 개선시킨 것 등을 모두 공유하려고 한다.

“개발, 개량, 개선은 원천적으로 봉사입니다. 제 좋은 아이디어가 세상을 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에디슨이 전구 만들어 혼자 전구 켜고 살진 않았잖습니까? 저도 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웠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가 북한농업협력사업에 관여하게 된 것도 이런 이유다. 이해극 씨는 1999년 4월부터 북한농업협력사업에 관여하고 있는데 그 사업에 참가하는 사람 중에 농민은 흔치 않은가보다.

“지난 7년 동안 600일가량 북한에 체류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사람들이 밥을 먹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북한에서 230만 명이 굶어죽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보니 그곳에서는 생활이라는 말은 사치스러운 말이고, 생존하고 연명한다는 말이 맞습디다. 그곳에서 저는 하우스 설계 시공, 자동화설비를 해왔습니다. 파종, 관리 등 모든 것은 북한에서 맡았습니다.

원산농업대 나온 처녀 동무들 100명과 북한 고성 국영남새온실에서 비닐하우스 76동, 70개작목의 연중생산체제를 구축했습니다. 한번에 1주일씩 출장을 가면 농촌지도비 1600달러를 받게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안 받았습니다. 봉사라는 생각에서요.”

북한에서 보고 느낀 것 중 가장 심각한 것은 북한에 나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해극 씨는 북한에서는 무엇보다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남아도는 축분을 퇴비화해서 북한에 유기질 비료로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병든 어머니가 건강한 아기를 낳을 수 없는 것처럼 척박한 토양에서 좋은 작물이 자랄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그는 이렇게 퇴비를 지원해 북한 땅의 지력을 높여야 북한 농업이 살아날 수 있다고 말한다.

농업은 돈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국민 공감대가 중요하다.

농사꾼 이해극. 농업은 이미 망했다고 주장하는 그는 농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여러 대안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국민의 공감대, 즉 농업은 단순히 돈으로만 환산할 수 없는 것이라는 국민의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이제껏 해온 말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식량 자급률 26%, 사양산업이 된 농업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개선시킬 수 있는 것은, 또 그가 말한 대안들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국민의 공감대, 농민과 소비자 간의 교감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저는 정말 농사를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것 하니까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는 농사꾼 이해극은 자신이 천직으로 아는 농사가, 그리고 한국의 농업이 살아나길 꿈꾸며 오늘도 땅과 호흡하고 있다. 국민과 함께 호흡하는 미래를 꿈꾸며 말이다.

면담일시 – 2007년 5월 17일

면담장소 – 충북 제천시 봉양읍 장평리 949-2

면담인사 – 이해극(농사꾼. 농민발명가협회장. 전국 유기농생산자연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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