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매뉴얼③] 시민이 요구하고 행정이 응답하다

시민이 정책에 참여하는 일은 일상처럼 가까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는 정보공개, 시민참여예산, 온라인 플랫폼 등 시민이 요구하고, 행정이 답하는 다양한 형태의 참여 통로가 꾸준히 마련되고 있습니다.

특히 정책 결정 과정에서 시민주도가 강화되고, 시민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며, 깊이 생각하고 논의할 수 있도록 활용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숙의’입니다. 숙의 유형으로는 ⓵시민배심원제, ⓶합의회의, ⓷시나리오 워크숍, ⓸공론조사, ⓹타운홀 미팅 방법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숙의 유형들은 특정 정책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정책구상, 비전 제시, 의제 선정, 사회적 논의, 우선순위 결정, 구체적인 대안을 선택할 때 활용됩니다.

지난 글에서는 숙의 방법 중 시민배심원제 사례로 울산 북구(링크)의 사례를 전해드렸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숙의 방법 중 두 번째, 합의회의 방법과 사례를 전해드립니다.

숙의를 위한 시민주도 학습과 토론

합의회의는 주로 가치 갈등적 공공 사안이나 공적규제가 요구되는 사회적 논쟁에 대해 전문가 패널과 시민 패널의 질의응답 및 토론 등을 거쳐 특정 주제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숙의적 문제해결 방식입니다. 즉, 갈등이 예상되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시민과 학습하고, 시민 주도로 전문가에게 의견을 묻고 공론화를 거쳐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회의입니다.


1980년대 덴마크에서 유전 공학 분야에 대한 시민 의견을 모은 것을 시작으로 확산된 합의회의는 이후 의학뿐 아니라 과학기술, 사회, 윤리 등 사회적 이슈로 논의 범위가 확대되었습니다.(참고기사: 링크)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서 ‘유전자 조작 식품의 안전과 생명윤리’를 주제로 합의회의가 진행되었습니다

탐구형 합의방식 모델, 합의회의

합의회의는 기획 → 준비 → 시민 패널 선정 → 예비모임(사전회의) → 전문가 선정 → 본회의 → 결론 도출 순으로 진행됩니다. 먼저 전문가와 이해관계자를 배제하고 구성되는 시민패널은 일반 시민이 중심이 되어 주제에 대한 학습과 반복적으로 질문을 만드는 사전회의 시간을 갖습니다.

본회의에서는 시민이 준비한 질문에 대해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가패널이 직접 응답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응답을 토대로 시민패널의 토론은 반복해서 진행되는데, 이때 시민패널과 전문가패널 사이의 논의 또한 진행되며, 시민 구성원의 합의로 최종적인 결론을 도출합니다.

합의회의는 사전에 제공된 자료를 통한 학습을 기본으로 주제에 대한 반복적인 질의응답을 통해 시민 주도로 탐구하는 동시에, 주제에 대한 시민의 기본 합의를 이끌어냅니다.

국내 첫 합의회의 주제, 유전자조작 식품(GMO)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1997년 제29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된 ‘인간게놈과 인권에 관한 보편선언’에 따라, 생명윤리에 관한 논의를 국내에 촉진하기 위해 1998년 생명윤리에 관한 국내 최초의 합의회의를 개최하기로 하고, 전문가 자문을 통해 ‘유전자 조작 식품’을 주제로 선정했습니다.

사전준비, 예비모임, 본회의 순으로 진행된 합의회의는 사전준비 단계에서 3~5명으로 조정위원회가 구성되어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홍보와 시민패널 선발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시민패널로 총 14명의 시민을 선발했는데 여기에는 주부, 회사원, 자영업자, 농민, 노동자, 학생, 연구원, 공무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20~60대 연령층이 골고루 포함되었습니다. (참고자료: 시민패널보고서 보기)

시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전문 영역

예비모임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1차 예비모임에서는 시민패널이 전문가로부터 유전공학에 관한 기초지식을 학습하고, 본회의에서 제시할 질문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2차 예비모임에서는 본회의에서 다룰 7가지 주요 질문을 선정했습니다.

최종 정리된 질문에 따라 조정위원회는 각 질문에 대답할 전문가패널(유전자조작 식품 개발자, 환경문제 전문가, 농업 전문가, 생명윤리학자, 식품안전규제 담당 공무원, 소비자 단체 및 기타 시민단체, 과학교육 전문가 등)을 구성했습니다.

본회의는 3일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언론과 입법 관련 공무원,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방청객까지 참여하는 열린 회의로 1일 차에는 시민패널이 선정한 7개 질문에 대한 전문가 패널의 주제발표가 진행됐습니다. 주제발표 후 시민패널이 추가 질문을 작성했습니다.

2일 차에는 시민패널이 전문가패널에 추가 질문을 하고, 청중도 질문할 수 있는 열린 토론을 진행했고, 이를 토대로 시민패널이 합의한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이어 국회의원, 정부 정책담당자, 시민사회단체인사, 생명공학 분야 인사, 시민 등이 참석해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첫 합의회의, 성과와 한계

유전자조작 식품에 관한 합의회의는 당시 사회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유전자조작 식품 이슈를 공론화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시민이 수동적 객체가 아닌 바람직한 과학기술을 지향하는 쪽으로 발언하는 능동적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시민의 능동적 참여로 결과가 나왔음에도 정치권의 반응은 미온적이었습니다. 국회에서 1998년 국정감사 자료집을 통해 합의회의 개최 사실을 소개한 사례가 있으나, 정부 부처들은 시민이 참여하는 형태의 행사가 유전자조작 식품에 대한 반대로만 여겨질까 우려했습니다.

합의회의에 정책결정자가 직접 참여하지 않은 것은 물론, 시민패널의 최종보고서를 관련 부처에 전달한 이후에도 어떤 반응과 사후조치가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시민이 직접 도출한 합의를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로 의미가 퇴색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합의회의 과정을 거쳐 도출된 결과를 어느 단위에서 어떻게 반영할 것 인지에 대한 설계도 매우 중요합니다.

최근 시민참여의 통로가 점점 더 다양해지는 만큼 합의회의와 같은 숙의 방법에 참여한 시민이 가시적인 변화를 체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민과 함께 하는 숙의 과정이 단순 참여나 구색 맞추기가 아닌 정책이나 제도에 실질적인 반영과 변화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 글: 안영삼 미디어센터장·sam@makehope.org, 감수: 이규홍 대안연구센터 연구원·diltramesh@makehop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