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지금의 그리스를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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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경제란 궁극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존속을 위한 ‘제도화’의 문제이며, 따라서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제대로 된 경제제도가 작동한다면 자원의 부족으로 고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류경제학의 핵심 화두인 ‘자원의 희소성’(경제학은 부족한 자원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문제는 경제의 ‘본질적인’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란, ‘건전한’ 시민적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당시 사회가 생존에 필요한 생산활동의 대부분을 노예가 담당한 사회였음을 감안한다면, 시민적 삶이란 정치토론이나 공공업무, 예술활동 등 주로 정신활동에 해당되었을 것이다. 제대로 된 경제제도란, 공동체의 존속에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자급자족하는 구조를 의미한다.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거래나 교환 시장(market)도 공동체의 유지와 결속을 강화할 수 있을 때만 유의미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경제란 ‘필요를 재편하고 욕망을 관리하는 시스템’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욕망은 결코 무한하지 않으며, 욕망 그 자체는 제도와 관습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유한한 자원으로 무한한 욕망을 채우는 방법’을 찾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현대 경제학과는 상당히 다른 관점으로 인간과 경제제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가 말한 ‘필요’와 ‘욕망’의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요(Need)란 삶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조건(꼭 있어야 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욕망(Desire)이란 생물의 행동을 유발하는 동인(動因)이다. 예를 들어, 결혼식을 위한 신부화장은 ‘필요한’ 일이지만 성형수술을 하는 것은 좀 더 예뻐 보이기 위한 ‘욕망의’ 결과다. 얼마 전 입적한 법정 스님은 ‘사람들은 무엇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모르는 목마름의 병에 걸렸으므로,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지 말라’고 설파하지 않았던가?

욕망의 가정 VS 필요의 가정

고대 희랍문명의 발상지이고, 민주주의의 요람이며 찬란한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운 나라. 무려 3,500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를 가진 그리스(Greece)가 지금 심각한 재정위기를 맞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급자족과 필요의 경제가 아니라 과도한 빚과 한도를 넘은 욕망으로 말미암아 나라 살림을 거덜 내고, 이웃나라들에게 구걸을 해야 하는 비극적 상황에 빠져있다. 만일 이 노 철학자가 무덤에서 깨어나 자신의 후손들에게 닥친 참담한 현실을 보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인간의 욕망은 제도와 관습의 산물이다)이 옳다면, 욕망은 관리되어야 하고 또 관리될 수 있으며, 필요를 뛰어넘는 욕망의 분출은 사회를 망가뜨리는 요인으로 기능한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가설’은 수천 년 전에 자신이 살았던 바로 그 땅에서 그대로 현실화되고 있다. 인류는 옛 성현들이 당부했던 충고를 외면하고, 판도라의 상자에 담겨있던 ‘욕망’을 꺼냄으로써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를 심각한 위험에 빠뜨리는 심각한 ‘죄’를 저질렀다.

현대 소비사회는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고 부추기며, 더 나아가 욕망 그 자체를 조작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주체할 수 없는 탐욕의 바다로 밀어놓고 있다. 시장경제는 욕망을 관리하기는커녕 거꾸로 욕망을 확대 재생산한다. 욕망은 더 큰 욕망을 낳고, 결국 인간의 삶이란 욕망을 채우는 과정으로 규정된다.

사람들이 꿈꾸는 삶의 목표는 욕망의 기제(機制)를 얻기 위한 과정 즉, 돈을 많이 버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들 모두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가면서 끊임없이 부(富)를 추구하는 ‘사회적 질환’에 중독되어 있다. 이 가공할 집단 최면 상태는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가짜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거대한 코드상자(code box) 속의 세계.

욕망 중심의 사고가 보통사람들의 머리 속에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얼마 전, 모 방송국에서 한국인의 돈에 대한 생각을 알아보는 프로그램을 방송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 정도면 가족 혹은 친구와 관계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10억 이상이면 끊을 수 있다’고 답한 사람이 전체의 53%에 달했다. 돈만 있다면, 가족도 버릴 수 있다는 ‘돈(Crazy)’ 사회의 단면을 여과 없이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학(Economics)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가계(家計, Household)를 뜻하는 ‘오이코스(Oikos)’에서 비롯했다. 이코노믹스(경제학)의 어원인 오이코노미아(Oikonomia)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 ‘살림살이 경제를 잘 운영하는 방법’이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개별 가정경제 차원에서 필요와 욕망을 바라보는 생각의 차이는 각각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까?

욕망을 추종하는 가정은 돈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생각한다. 다른 집과 비교해서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는다. 욕망의 경제학은 곧 소비의 경제학이다. 이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 받고 싶어한다. 따라서 남보다 더 큰 집, 더 좋은 차, 더 멋진 인생을 살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려면 평균 이상의 수입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다.

무한궤도의 머니 게임은 현재진행형이다. 돈 때문에 건강을 해치고, 돈 때문에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고, 지난 달에 소비한 카드대금을 갚기 위해 다시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가불인생은 통제하기가 어려운 법. 어느 순간, 수입과 지출의 균형이 무너지고 ‘빚’이 동원된다. 빚은 또 다른 빚을 부르고, 사람들은 빚더미 속에서 신음한다. 결국 이 화려한 ‘욕망의 잔치’ 는 이 가정의 삶을 서서히 파괴해 나간다.

한편, 필요의 경제학을 믿는 가정은 돈을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바라본다.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지 않으므로, 돈의 많고 적음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경제 행위를 하는 목적은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용할 양식과 작지만 소중한 가족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필요의 경제학은 곧 관리의 경제학이다. 부채 없는 재정, 합리적 소비와 지출, 버는 것과 쓰는 것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이 가정의 재무헌장이다.

빚이란 실체적 크기의 문제라 아니라 정신의 문제이며, 빚을 내어 무언가를 도모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빚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이 가정은 잘 안다. 따라서 빚을 져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노출되지 않도록 관리와 통제에 힘쓴다. 이러한 노력이 이 가정을 항상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할 수는 없으나, 가족구성원이 재무적 무력감 속에서 고통 받거나 절망하진 않는다.

안과 밖의 해법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칼 폴라니(K.Polanyi)는 “시장경제에서는 다양한 동기와 속성을 지닌 총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부정되고, 경제적 요소가 다른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시장경제의 파괴적 속성이 사람들을 시장에 ‘내던짐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호모 이코노미스트(Homo economist, 경제적 인간)로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은 늘 피폐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폴라니의 말대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경제적 요소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곳이라면, 어떻게 해야 돈에 끌려 다니지 않고 ‘행복한 주체’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일정한 해답을 구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성적으로 우리 모두는 돈의 노예가 되고 싶어하지 않으며, 좀 더 인간다운 삶과 생활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답’ 안에서 인생과 삶에 대한 희망의 단서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해법은 있는 것인가? 있다. 답의 절반은 우리들 ‘마음’ 안에, 나머지 절반은 세상 속에 있다.

‘욕망의 덫’에서 빠져 나와 필요한 것 중심으로 생활을 재편하는 것. 세상이 만든 기준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의 원칙을 세우는 것. 스스로 비전을 설정하고 밭을 일구는 농부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가족의 꿈을 만들어 줄 재정의 가치를 소중히 알되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 버는 일과 쓰는 일의 균형점을 잘 유지해 가는 것. 그것이 절반의 해법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절반은? 세상 안에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를 만들어가는 노력일 것이다. 인생은 수익률 게임이 아니며 적게 벌더라도 그 안에서 충분히 지금보다 나은 내일을 열어갈 수 있다는 것을, 더불어 삶 속에는 돈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노력. 그리고 땀 흘려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좌절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휴머니즘 사회를 건설해 가는 작업 말이다.

그것이 지금부터 2,300년 전, 한 위대한 철학자가 남긴 교훈을 계승하면서도 미래 세대를 위해 지금보다 더 좋은 사회를 물려줄 수 있는 길이 아니겠는가.

글_소기업발전소 문진수 소장(mountain@makehope.org)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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