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팎에서 본 미국 싱크탱크(3)] ‘여성’, ‘소수자’, ‘신진’ 들이 진입하기 힘든 ‘그들만의 리그’

홍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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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15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약 1시간 30분 동안, 아시아 정책 핵심(Asia Policy Point, 源, http://www.jiaponline.org/index.html)의 대표 민디 코틀러(Mindy Kotler)와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아시아 정책 핵심은 1991년에 창립한 이후 현재까지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관련 정보들을 연구자와 연구기관에 제공하는 역할을 주로 해 오고 있다. 특히 이곳에서 발간하고 있는 주간 캘린더는 워싱턴 디씨는 물론 미국과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일본과 아시아 관련 각종 세미나와 컨퍼런스들의 일정을 꼼꼼하게 정리하여 보여 주고 있다(주로 다루고 있는 행사 주제는, 일본, 중국, 에너지, 외교정책, 국제경제, 지적재산권, 중동, 북한, 과학기술, 안보, 남아시아, 남한, 대만, 무역, 미국정치 등이다).

수백개의 싱크탱크들이 모여 있는 워싱턴 디씨의 경우 하루에만도 수십, 수백개씩의 다양한 세미나와 강연, 컨퍼런스가 개최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체계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얻는 것이 결코 용이하지 않다. 많은 경우 개별 기관에 ‘회원등록’을 하여 이메일을 통해 행사 안내를 받게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거나 때로는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기 쉬운 ‘싱크탱크의 도시, 워싱턴 디씨’에서 이와 같은 체계적인 정보 제공자를 만나는 것은 매우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런 정보는 ‘무료’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회원이나 기관회원 등의 형식으로 ‘구입’하여야 하기 때문에 개인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다만, 필자는 시거센터 방문연구원으로써, 시거센터가 아시아 정책 핵심의 ‘기관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어 자동적으로 캘린더를 받아보고 있다). 민디 코틀러는, 1991년 이 단체를 창립하기 이전 아시아 문제와 관련된 ‘독립 연구자(independent researcher)’로 활동하였고, 특히 일본의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연구와 활동을 전문으로 하였다. 2007년 7월 미 하원 본회의를 통과한 마이크 혼다 의원(민주당)의 ‘위안부 사죄 결의안’ 통과 운동에 적극적인 지지자 역할을 수행하였고, 특히 지난 1월 이용수, 김군자 할머니의 미 의회 증언이 이루어지는데 큰 도움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민디 코틀러 대표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의 싱크탱크, 특히 워싱턴 디씨의 싱크탱크들 사이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백인 남성”들을 중심으로 한 폐쇄적 구조가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성이나 소수자, 그리고 신진 인물(또는 기관)이 기존의 경쟁구도로 진입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령 진입한 이후에도 “그들만의 리그”에서 살아남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사실을 생생한 목소리로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진술은 앞서 존 커배너(정책연구소) 므위자 믄탈리(트랜스아프리카포럼), 스티븐 클레몬스(새로운미국재단) 등의 인터뷰 내용과도 합치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미국 싱크탱크들이 벌이는 ‘아이디어 마켓팅’이 결코 ‘공정경쟁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편집자 주>

민디 코틀러(이하 코틀러) : 홍박사님, 저 역시 좋은 시간을 함께 하게 되어 기쁩니다. 미국의 싱크탱크에 관한 연구를 하고 계시다고 하셨으니 제임스 스미스가 쓴 <아이디어 브로커>(Idea Broker)라는 책은 이미 읽어 보셨으리라 생각되는데요. 제가 보기엔 이 책이 미국 싱크탱크에 관한 가장 좋은 안내서가 될 듯합니다. 그 책에서 말하고 있듯 미국의 싱크탱크는 원래의 ‘학술적’ 연구를 수행하는 기관과 소속 연구원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사업, 이익, 돈과 같은 것이 더욱 중요한 요소이자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 워싱턴 디씨에는 외교안보정책을 전문으로 하는 많다고 하는 것도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 20~30년 동안 미국 싱크탱크들에 있어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좀 더 엄밀하게 보자면 레이건 대통령 시기부터 싱크탱크들의 정책적 영향력이 확실히 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은 ‘좋지 않은’ 방식으로 말이죠. 과거에는 싱크탱크의 영향력 또한 주로 학술적인 방식이었고 그러다보니 다소 느리게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는 과거와 달리 박사학위를 갖지 않더라도 싱크탱크 연구원이 될 수 있었고, 대학의 학문분과와는 관계없는 방식으로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싱크탱크는 단순히 대학교수가 되지 못한 이들의 저장소 역할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기관으로 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 싱크탱크의 세계에는, 매우 폐쇄적인 ‘그들만의 모임’이라는 성격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유명 재단과 관계가 있거나 아이비리그를 나온 남성이 중심인 세계이죠. 많은 싱크탱크들은 여전히 여성이나 소수자를 자신의 주요 연구원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코스모스 그룹’이라는 워싱턴 디씨의 사교 모임에서는 1980년대까지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출입구를 사용하기까지 했습니다. 바로 이 미국에서 말이죠. 이와 같이 정책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아이디어 브로커는 ‘제한된 소수’의 역할인 것처럼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일본의 경우 미국 싱크탱크의 이러한 속성을 비교적 빨리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소위 ‘닉슨 쇼크(Nixon Shock)’라고 불리는, 미국과 중국의 외교관계 복원 양상을 지켜 본 이후 일본 정부는 일본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일본 연구자들의 모임들을 키워 내기 위한 적극적 노력을 시작하였습니다. 싱크탱크와 재단들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붇기 시작한 것이죠. 이렇게 되면서 1990년대까지 미국의 수많은 싱크탱크들은 일본이 제공하는 엄청난 연구비를 가지고 일본 연구를 수행하였습니다. 실제로 1970년대에만 하더라도 일본 연구는 주로 하버드 대학교나 예일대학교와 같이 아이비리그라 불리는 미국의 동부 명문대학교의 소수 연구자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던 것이죠. 미국 재단들에 대한 일본 쪽 지원이 커지면서 이를 더 받기 위한 재단들의 경쟁도 격화되었습니다. 일본 연구를 지원하면 더 큰 후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보수파들이 싱크탱크를 중시하게 되는 정치적 맥락과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소위 ‘회전문’ 현상이라는 것 또한 1970년대 이후 본격화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료 생활을 마친 이후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런 회전문 현상은 실제로 싱크탱크들의 재정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어디서 어떻게 돈을 모을 것인가가 싱크탱크의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재단의 조성금 지원방식은 주로, 아는 이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는 사람의 존재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따라서 관련된 정부 부처에서 관료로써 일했던 사람이 선호되는 것입니다. 다만 과거와 달리 좀 더 많은 서류들을 작성할 필요가 많아졌을 따름이죠. 그런데 미국의 재단들, 특히 규모가 큰 재단들은 조성금 지원에 있어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합니다. 자신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기관이나 사람에 대해선 지원을 비교적 쉽게 하는 반면, 자신들이 전혀 모르는 새로운 싱크탱크나 연구자에겐 지원을 잘 하려 하지 않습니다.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처럼 재단들의 신중한 지원태도로 인해, 새로운 아이디어나 혁신적 아이디어만을 가지고서는 조성금 지원을 받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재단들에 있어 ‘보다 독창적인 연구 결과’라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상을 벗어나는 결과가 도출되는 것을 오히려 부담스러워 하지요.

또한 회전문 현상이라는 것 자체가 싱크탱크 소속 연구원들이 매우 조심스럽게 발언하도록 만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부나 정부 관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나치게 그것을 ‘사적’인 것으로 만들게 하는 것이죠. 또한 자신이 내놓는 아이디어보다는 ‘자기 자신(me)’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라는 이가 많습니다. 싱크탱크 연구원들 가운데는 ‘한 때’ 관료였다가 다시 연구원으로 있고, 다시 관료가 될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각을 세워 날카롭게 말하기 보다는 모호한 ‘합의’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물론 이와 반대로 ‘문제의 해결’ 그 자체보다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더욱 집착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자신의 입장과 다른 쪽의 정책제언에 대해선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하기도 합니다.

*전문은 PDF 파일로 첨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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