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본사’는 일감을 따오기만 한다. 일은 일단 하청업체로 간다. 거대한 작업을 수십 수백개의 작은 단위로 쪼갠다. 작업을 모두 외주로 돌린다. 가장 고된 일은 주로 마지막까지 넘어가고 또 넘어간다. 마지막에 남은 ‘물량팀’과 ‘돌관팀’은 촌각을 다투며 이리저리 움직여 작업을 쳐낸다. 고용안정도 4대 보험도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한 곳이다. 가장 높은 보상은 일감을 따온 이들에게 돌아간다. 그들이 ‘대기업’이고 ‘본사’이고 ‘정직원’이다.

이곳이 바로 정부가 한국은행의 발권력으로 10조원을 마련해 지원하려고 하는 조선소 현장이다. 조선업계 부실이 메워지더라도 부실한 작업 구조는 그대로 남을 것이다.

어쩌면 작은 곳이든 큰 곳이든 한국 사회 여기저기가 닮은 모양이다. 부실의 프랙털 구조다.

서울 구의역에서 청년 노동자가 안전문을 고치다 사망한 최근 사건도 결국 이 구조의 산물이다.

구의역 사건의 근본 원인은 성과는 내야겠는데 비용은 치르지 않겠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공기업 효율화 정책이다. 지하철에 안전문이 생겼다면 그걸 설치하고 유지보수하는 데 비용이 추가로 든다. 세금이든 요금이든 지하철 노동자의 임금삭감분이든 내놓아야 한다. 공사 적자도 줄이고 빚도 줄여야 하니 인원도 비용도 절감하고 시간 맞춰 빨리빨리 작업하면서 승객에게 불편은 끼치지 말고 일터 안전은 모두 지키라는 말은 모두 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하지만 구의역 사건의 직접 원인은 가장 위험한 일을 가장 약한 이들에게 떠넘긴 ‘본사’이고 ‘정직원’이다. 어리고 책임감 있는 하청업체 비정규직 직원은 가장 말을 잘 듣고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으로 보였겠지만, 그것은 가장 약하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요구에도 저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담합해서 그 일을 피할 수 있었던 이들에게는 이런 상황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한국 사회가 여전히 ‘72년 체제’의 그늘 안에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권위주의 정치와 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와 저부담 저복지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체제가 그때 시작되어 지금도 강력하게 남아 있다는 이야기다.

나는 그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72년 체제의 핵심인 ‘담합을 인정하는 가치체계’에 ‘97년 체제’의 산물인 ‘경쟁지상주의 가치체계’가 겹친 모습이 현재 한국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국 사회의 현재를 뜯어보면, 곳곳에 크고 작은 담합구조가 자리를 잡고 있으며 무한경쟁의 가치는 여기 들지 못한 약한 이들에게만 적용된다.

이미 사람들은 72년 체제와 97년 체제가 겹친 이곳이 어떤 모습인지를 알고는 담합구조에 끼기 위한 무한경쟁을 시작했다. 공무원시험도 공기업 입시도 의사·변호사 자격증도 담합구조로 가는 티켓처럼 여겨지면서 따려는 사람들로 들끓는다.

그나마 담합구조 안에서 작은 기득권이라도 지키며 안심하던 이들조차 이제 생존에 위협을 느낀다. 결국 모두가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부른다. 모두가 피해자이고 고통받는 이들이라고 부르짖는 사회, 그곳이 바로 팍팍한 헬조선이다.
국민 전체가 조금씩 나눠 낸 것이나 마찬가지인 한은의 10조원은 72년 체제를 유지하는 데, 또는 97년 체제를 강화하는 데 쓰일 것이다. 비극이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좀 더 안전해질까. 우선 담합구조를 깨뜨려야 약한 이들에게 위험이 몰리지 않게 될 것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모두가 좀 더 비용을 부담하고 덜 누리겠다는 각오를 할 수밖에 없다. 세금이나 요금을 더 내거나, 지하철을 좀 더 기다렸다가 타거나.

[ 한겨레 / 2016.06.19 /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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