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스마트폰을 켜세요.”

강의실에 들어서자 많은 학생들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거나 인터넷 서핑 중인 듯했다. 특강을 하기 위해 방문했던 서울대학교의 한 강의실이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끄고 강의에 집중하라는 말을 하는 대신, 내 이야기 중 의문 가는 내용이 있으면 검색해보고 알려달라고 했다. 때때로 스마트폰 사용을 청했다.

“이야기하다 보니 이 부분이 잘 생각이 안 나는데, 누가 검색해서 알려주실 수 있나요?”

“스마트폰 카메라로 서로 인터뷰 촬영을 해볼까요?”

학생들은 곧 강의에 집중했다. 스마트폰은 켜둔 채였다.

미국 보스턴을 방문했을 때다. 공항까지 우버를 사용했다. 기사는 쾌활한 성격의 중동 출신 이민자였다. 차가 막히는 동안 그는 말을 쉬지 않았다. “하루에 12시간 일할 때도 있고, 밤새 일하기도 해요. 제가 조절하는 거죠.” 과로한 기사 차를 타고 있다는 게 잠시 불안해졌다.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피곤하면 알아서 쉴 수 있으니 괜찮아요. 내년에는 돈 때문에 포기했던 대학도 다시 들어가서 일하면서 학위를 따보려고 해요.” 불안했던 마음은 다시 훈훈해졌다.

새로운 기술적 현상이 등장하면 전문가들이 한마디씩 보태기 마련이다. 우버나 에어비앤비에는 공유경제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었다.

제러미 리프킨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교수는 환호했다. 우버나 에어비앤비 같은 공유경제와 소셜네트워크와 사물인터넷이, 기존의 자본주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공유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했다.

한병철 독일 베를린예술대 교수는 비판했다. 공유경제는 친절마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첨병이라고 한탄했다. 자기 방을 낯선 여행자에게 내주는 친절은 별점 평가와 가격표에 맞물려 상품화되고 만다고 했다.

데자뷔다. 인터넷 기사에 ‘댓글’이 달리기 시작하고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처음 등장하던 시절, 그게 진보라며 환호하던 이들이 있었다. 전통적 언론사의 독점이 깨지면서 언론지형이 진보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던 이들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이들이 주로 기대감에 부풀어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다.

과잉반응이었다. 잠시의 적응기가 지나자 인터넷 공간은 다시 사람들의 일상적인 대화와 수준을 맞췄다. 험한 정치토론이 오가기도 하고, 맛집이나 여행지를 자랑하기도 하며, 편견과 혐오가 남김없이 드러나기도 하는 그 자리를 보라. 그저 사람들이 동네 주점에서 나누는 취기 어린 대화일 뿐이다. 그 대화를 좀더 많은 이들과 쉽게 나눌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기술이 유토피아를 가져온다는 말도, 디스토피아를 부른다는 말도 같은 이유에서 과장이다.

기술은 도구다. 그 내용은 결국 사람들이 지닌 가치와 생각의 깊이에 맞춰 채워진다. 강의시간의 딴짓을 쉽게 만들기도 하지만, 활용하기에 따라 강의를 더 효과적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것은 고용 불안정성과 장시간노동을 강제할 수도 있지만,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춰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일자리를 없애는 괴물이 될 수도 있지만, 새로운 일을 공급해줄 수도 있다. 환호작약할 일도, 공포에 떨 일도 아니다. 적절한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 잘 활용하면 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했던 말처럼, ‘공포스러운 것은 오히려 공포 그 자체’다. 그는 뉴딜 등 개혁정책으로 미국을 중산층의 나라로 변모시켰다.

신기술에 환호작약하며 자신들의 사적 욕망을 극대화하는 데 십분 활용하려 드는 월가 투자자들과, 기술에 대해 공포감을 가지라고 부추기는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이 맞붙으면 승자는 누가 될까?

[ 한겨레 / 2015.2.24 /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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