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길 위에 지식이 있다

<박원순의 희망탐사 23>

길과 강의 철학자 신정일 소장

사람의 향기는 코로만 전해지지 않는 것 같다. 눈을 통해서도, 손을 통해서도, 그 사람의 향기는 전해진다. 그리고 자기만의 길을 걸어온 사람에게는 남다른 향기가 있다. 땀 냄새라고 하기도 어렵고, 스킨 냄새도 아닌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그 향기 말이다. 옹골진 그 향기를 맡고 있자면 그저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그의 성실과 열정, 고집이 전해지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전주에서 만난 신정일 씨는 그런 향기가 묻어났다. 그가 소장을 맡고 있는 황토현문화연구소는 별도의 건물조차 없다. 그의 집이 곧 연구소다. 집인지 연구소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세간보다 책이 더 많은 듯 했다. 어렸을 때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그는 학교가 아닌 삶의 모든 곳을 배움의 장소로 여겼다. 그는 내가 만난 이들 가운데 유독 다른 사람의 말을 많이 인용했는데 이도 그러한 배경의 소산이 아닐까 싶다. 시의적절하며, 구체성을 더해주는 그 인용들은 그의 말을 더욱 풍부하게 했다. 그에게 그 많은 책이야말로 좋은 스승이었을 것이다.
[##_1R|1079058403.jpg|width=”552″ height=”367″ alt=”?”|▲ 황토현문화연구소 신정일 소장, 그의 모습에서 우리의 길과 강의 향기가 묻어난다. ⓒ희망제작소 _##] <택리지>와 <다시 쓰는 택리지>

신정일 씨는 향토사학자다. <다시 쓰는 택리지>를 시작으로 <한국사, 그 변혁을 꿈꾼 사람들>, <신정일의 한강역사문화탐사>, <지워진 이름 정여립>, <한국사의 천재들> 등의 책을 냈다. 그의 책들은 역사와 지리가 만나는 어느 지점에서 시작한다.

“황동규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뚫어놓은 길만 다니는 자들이죠. 그것은 편해요. 하지만 올바른 창조는 아닐 겁니다. 그 생각으로 걷다보니 전체를 볼 수 있었어요. 금강을 열나흘동안 걷고 책을 냈어요. 그다음에는 섬진강, 한강, 낙동강, 영산강을 걸었어요. <한강역사문화탐사>를 내고 나서 나온 책이 5권짜리 <다시 쓰는 택리지>입니다. 택리지에 대한 책이나 논문을 모두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자료를 접했어요. 그러면서 지리를 공부하는 사람은 역사에 대해 쓰지 않고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또 지리에 대해서 쓰지 않는 것을 발견했어요. 자신의 전공분야에만 집중하는 거죠. 그래서 각 분야를 쓰는 사람은 오늘날 <택리지>를 다시 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가 역사지리학을 통합할 수 있는 <택리지>를 다시 쓸 수 있는 행운을 얻은 것 같아요.”

하지만 그에게 <택리지>는 단순히 책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가 250년이 지나서 이중환의 <택리지>를 현대에 맞게 수정, 보완했다면 그의 삶 또한 이중환과 닮은 꼴이다.
[##_1L|1327849003.jpg|width=”283″ height=”378″ alt=”?”|▲ 신정일 소장이 쓴 5권의 역작 <다시 쓰는 택리지> ⓒ희망제작소_##] 신정일과 이중환

“책을 쓰고 들은 말 가운데 하나가 이중환과 내가 닮았다는 이야기였어요. 잘 알다시피 그 분이 청년시절에는 화려한 관리였는데 30대 들면서 불우하게 지냈거든요. 국문을 다섯 번이나 받고 유배를 받았어요. 보통사람들은 절망했을텐데 절망하지 않고 20년 이상을 떠돌아다니며 쓴 것이 <택리지>였어요. 저는 정규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혼자 공부했어요. 어찌어찌해서 전북대 앞에서 카페를 시작했는데 정말 하는 족족 힘들었어요. 그러다가 신채호 선생의 글이 계기가 되어 역사를 공부하게 됐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국토를 답사하기 시작했죠. 저 또한 20년 동안 안돌아 다닌 곳이 없어요. 그러한 것들이 바탕이 된 게 <다시 쓰는 택리지>입니다. 그러니 비슷하단 소릴 들을 밖에요.”

어려움에 굴하지 않는 용기와 하루같이 길을 걷는 성실함으로 <택리지>를 완성한 이중환 씨와 신정일 씨는 그래서 닮았다. 그의 삶은 남다르다. 어려움도 컸다. 하지만 그 어려움들이 오히려 그를 남다르지만 특별한 그의 삶을 만들어낸 듯 했다.

그는 애당초 시를 쓰고 싶어했단다. 학교를 다닐 형편이 못되어 그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러다 15세 때 출가했으나 오래 있지 못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제주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제주도 교육청, 제주도 도청, 제주 MBC 등 제주도에 한참 개발붐이 불 때 돌을 져 날랐어요. 하루에 모래 두 차분을 지어 날랐는데 그때 일당 4만 원 쯤 받았죠. 내가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해요. 그 어려운 형편에도 <문학사상>이나 <창비>, <문학과 지성> 등을 구독하고 클래식을 즐겨 들었지요. 사는 것은 비참했는데 취미가 너무 고상했던 것 같기도 하고…그러다가 80년대 중반에 황토현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시는 400편을 썼는데 아직 책으로는 나온 게 없습니다. 정여립을 공부하면서 동학을 알게 됐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국토를 답사했어요. 2000년 이후 동학에 대해서 책이 많이 나왔지만 제가 동학 관련 책을 내던 1995년 즈음에는 개인적으로 동학에 대해서 책을 낸 건 거의 최초였던 것으로 알아요.”

강물소리에 삼라만상이 들어있다

그가 역사와 지리를 접목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역사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우리 땅에 대한 무한한 애정에서 비롯됐다. 황토현연구소 소장인 그는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 ‘우리 땅 걷기 모임’의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사람의 길을 찾아, 역사의 길을 찾아, 인생의 길을 찾아 길따라 강따라 살아온 그는 우리네 산천에 많은 이야기를 했다. 특히 강에 대한 그의 애정은 5대 강을 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낙동강, 한강 등의 박물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한강의 선사시대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모습을 담고 걸으면서 강에 대해 강의도 할 수 있도록 하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한강의 과거와 오늘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죠. 이상한 박물관 다 만들면서 이런 것을 안 만들어요. 우리나라 5대 강에 대한 박물관을 만드는 건 정말 필요한 일이에요.”

보통 사람들이 강을 즐기는 수준은 그야말로 자동차를 통해 창밖 풍경의 하나로 스쳐지나가거나 때로는 하루 정도 물놀이를 즐기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맨 걸음으로 강을 걸으며 강과 함께 호흡한 신 소장의 눈에 보이는 것이 더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최소한 강을 자동차 밖 풍경으로 보는 이의 말보다 옳은 것 또한 당연하다.

“지리산이나 한라산이나 태안반도나 한려수도나 국립공원처럼 우리나라 5대 강도 국립공원은 아니더라도 특별한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백두대간보존법과 같이 보존할 필요성이 큰 거죠. 상징적으로라도 지정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아무래도 각인이 되고요.”

그는 강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과 더불어 강과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강이 눈에서 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발원지에서 하구언까지 길이 없는 곳이나 벼랑 등은 길을 만들어 강의 발원에서 끝까지를 일주할 수 있도록 하는 코스를 만들자는 것도 그의 아이디어다. 그는 또 종주하는 사람에게 인증서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강을 따라 걷다보면 얻게 되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강은 사람의 일생과 비슷합니다. 강을 보세요. 수많은 우연을 거쳐 마침내 바다로 들어갑니다. 강은 올라가지 않고 내려가면서 모든 것을 경험합니다. 강을 보면서 인생수련의 프로그램을 마련할 수 있는 부분이죠. 낙동강이나 영산강을 혼자 걸었는데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합디다. 강연할 때 헤르만헷세의 싯다르타를 인용하는데 ‘깨달음을 얻는 것은 참는 것, 듣는 것, 기다리는 것’이라는 진리가 담겨있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강물소리는 삼라만상이 내는 모든 소리가 깃들여져 있다는 말도 있고요. 그것을 가르칠 필요가 있어요.”

보행자 전용도로를 만들자

강과 사람이 가깝게 지낼 수 없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길’에 있다. 길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지점이다. 그 곳에서 모든 역사가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길은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했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사람이 다니는 길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버리고 차만 다니는 길이 중심이 됐다. 여기저기 차를 탄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길만 이야기될 뿐이다.

“언젠가부터 사람이 길을 걷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걷는 것이 되어 버렸어요. 완전히 찻길만 있는 것 같아요. 역사적인 길도 중요하지만 고속도로와 국도를 빼놓고 보행자가 다닐 수 있는 길을 옆에다 만드는 거 기본 아닌가요? 차도와 분리된 인도를 만들자는 겁니다. 앞으로 내는 모든 길은 보행자 전용도로를 만들어야 합니다.”

보행자 전용도로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형편에 역사의 길은 아직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보행자 전용도로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의식주와 같은 생물학적 수준의 기본이라면 역사의 길은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역사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인문사회학 수준의 기본이다.

“역사의 길은 보존되어야 합니다. 삼남대로, 영남대로, 관동대로, 강화로 등 조선시대의 9개의 길은 에도시대의 길이나 로마의 길처럼 문화재로 지정해야 합니다. 지금 다 사라지고 있어요. 이제라도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경상도에서도 구미시의 장천면에서 해평으로 오는 길이 아직도 남아있어요. 사대부 외에 일반인이 가는 길이 힘들었기 때문에 그곳을 ‘서울 나들이길’이라고 해요. 그것은 문화자원으로 충분히 활용할 가치가 있습니다.”

장성갈재 축제를 벌여라

역사의 길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장성갈재’를 떠올린단다. 전남 장성과 전북 정읍 사이에 있었는데 없어져 버렸다는 길이 장성갈재다.

“그 길을 송시열이나 추사 김정희, 전봉준, 다산 정약용 모두가 넘어갔어요. 당시 장성갈재는 서울에서 호남으로, 호남에서 제주도까지 가는 길목이었던 거죠. 차령에서 장성갈재로 내려가면 됐거든요. 옛날 고개나 령은 가장 지름길로 선택한 길이었어요. ‘육십령’은 도둑이 하도 많아 60명이 모여야 넘어갈 수 있다고 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인천에 ‘천명’이라는 고개가 있었는데 1000명이 있어야 넘을 수 있었다고 해요. 충남 부여군 홍산에는 ‘만인재고개’가 있어요? 조용필이나 나훈아 같은 가수가 콘서트를 해도 1만 명 모으기 어려운데 한참 사람을 모아야 했겠죠. 옛 지명을 보면 전국에 도덕동이라는 지명이 많이 나오는데 모두 도둑이 많아 그렇게 나온 지명이라고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축제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장성갈재 축제 같은 것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굳이 정성갈재 축제가 아니어도 좋다. 어떤 길이든 ‘길 문화 축제’가 열리면 좋겠다는 게 신정일 소장의 바램이다.

“지난 2005년 11월 11일에 처음으로 길 문화 축제를 했어요. 11월 11일로 한 것은 두발로 걷자는 뜻인 거죠. 문경세재를 걸으면서 길에 대한 강연도 하고 길 굿도 했는데 돈이 없어서 그냥 우리끼리 모여서 조촐하게 했어요. 옛날 길가에 있던 주막을 만들고 주모를 공모해 운영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길을 통해 전국을 걷다보니 그에게 길을 걷는 것은 도를 닦는 것과 다름없다.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아요. 주자의 말에 견문이 넓은 사람일수록 안목이 좁은 사람이 없다고 했어요. 안목이 좁은 사람일수록 견문이 넓지 않거든요. 사대부들은 시간만 나면 돌아다녔습니다. 김시습, 이중환, 김일손이 다 그랬고, 정철, 서경덕도 그렇습니다.”

그를 보면 제도교육이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중학교도 못 가본 그가 동서의 역사와 철학을 다 꿰고 있는 것이다. 서정주 시인이 자신을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 했지만 그를 키운 건 학교교육보다 더 훌륭한 수많은 책들이었다. 그는 여전히 할 일이 많다. 걸어야 하고 써야 할 일이 많다.
[##_1C|1064925603.jpg|width=”558″ height=”371″ alt=”?”|▲ 책을 좋아하고 책 속에 파묻혀 사는 신정일 소장. 그렇지만 그는 늘 서재를 뛰어나와 길과 강을 거닌다. ⓒ희망제작소 _##] “1914년 폐현이 되면서 97개의 군과 현을 없앴는데 사라진 폐현에 대한 연구서가 곧 나옵니다. 마전군인데 지금은 마전면이 되고 고부군이었는데 지금은 고창과 부안에 쪼개져 작은 면이 되었지요. 문화원을 포함하여 많은 기관들이 있는데 아무도 하지 않아 내 일이 되었습니다. 올해만 해도 15권이 나옵니다.”

그는 책에 이어 강에 대한 이야기도 잇는다.

“북한의 6대강을 걷고 싶어요. 다리 힘이 있을 때 하고 싶은데… 정말 살아 생전 우리 산천을 모두 보고 싶습니다.”

길에 얽힌 역사와 우리의 옛 지명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그의 간절한 바램이다.
그는 어릴 때, 재 너머 장터로 쌀 메고 가던 옛 추억을 되살린다.

“몇 년 전 할머니 묘를 이장하기 위해 고향에 갔어요. 고향이 진안 백운인데, 이장을 끝내고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가는데 임실까지 17km라고 쓰인 옛 길의 팻말을 보고 잊었던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그 길을 많이 걸었는데 모두 잊어버린 거죠. 어머니가 행상을 했는데 어머니와 같이 쌀이나 곡식을 짊어지고 새벽 네 시부터 대운이재를 넘어 임실 성수에 도착하면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 가는 학생들을 볼 수 있었어요. 가난해 학교를 못가서 교복 못 입는 것이 참 부끄러웠어요. 임실에 도착해서 국밥 한 그릇 먹으면 해가 떠오르는데 얼마나 찬란한지 눈물이 다 났죠.”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정말 걷고 싶어졌다. 건강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지만 이왕 걸으면서 역사와 문화를 숨쉬며 걷는다면 우리 삶은 한결 풍요로울 수 있으리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으며 이 땅의 길과 강의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애쓰는 신정일 소장을 우리 시대는 또 하나의 희망으로 기억할 것이다.

면담일시 – 2006년 6월 20일 오후 4시

면담장소 –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황토현문화연구소

면담인사 – 신정일(문화사학자. 황토현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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