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은 우리가 바꾼다

희망제작소는 지난 5월 13일 일본국제교류기금에서 약40여명의 청중이 모인 자리에서 일본의 지역개발사례에 대한 강연을 열었다. 이번 강연회의 주 연사를 맡은 후지하라케이요 (藤原惠洋, 규슈대학) 는 지난 30년동안 일본의 지역사회 회복을 위해 연구하고 실천해 온 전문가로 최근에는 이 공로로 후쿠오카현에서 주는 ‘마을만들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강의는 일본 희망제작소의 하야시 야스오 이사장과의 인연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도시계획 전문가인 하야시 이사장은 후지하라 교수의 인생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한다. 그것은 설계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설계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 후 완성된 마을에서 ‘제대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었다. 하야시 선생에게 배운 또 다른 한 가지는 바로 사회적 자본, 즉 친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실제로 후지하라 교수는 지역사회에 직접 편입되어 그 사회의 개혁을 계획했다.

송사리 학원의 학원장

본 강연에서 후지하라 교수는 스스로를 ‘송사리 학원’의 학원장으로 소개했는데 송사리 학원은 야와타교구 마을 사람들의 스터디모임 이름이다. 예전에는 작은 강에 많은 송사리가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보기 어렵다고한다. 이는 환경과 마을의 순환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의 무너진 무언가를 바로 세우기 위해 직접 마을에 살면서 지역사회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고, 그곳에서 발견하는 보석 같은 자원들과 도시계획을 연결지었다고 한다.

마을 함께 걷기

오늘날의 마을은 사실은 ‘농업 공장’ 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지금 농촌의 사람들은 농업을 재미없게 생각하고 자신들의 터전에 대한 자부심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역사회에는 병원, 상점 등의 편의시설도 부족해서 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1992년에 도시계획법이 개정되면서 지역을 개발할 때에는 주민의 생각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정책이 마련되었다고 한다.

그는 마을사람들의 자존감을 되찾아 주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마을함께 걷기’를 하려 했는데, 처음엔 거부감이 많았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일요일 아침 4시간을 할애해서 함께 보는 시간을 가졌다. 함께 걷고 회의하는 과정에서 마을의 발전을 위한 생각을 할 수 있었고, 회의 후 함께 마시는 술을 통해서도 지역주민들과 한 층 친밀감이 더해졌다. 그는 야와타교구 마을을 계획하면서 너무 술을 많이 마셔 병원에 입원할 정도였다고 하여 청중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_1L|1072395455.jpg|width=”250″ height=”234″ alt=”?”|후지하라 교수._##]

마을의 주민이 된다는 것

야와타교구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야와타교구의 매력‘ 발표회를 가지면서 비로소 우리마을의 매력을 재발견하고 정말로 마을을 좋아하게 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마을을 좋아하게 되면 그 다음은 문제점과 부족한 점을 찾아 바로잡는 단계로 이어진다.

꽃이 부족한 마을에 주민들이 꽃을 심었다. 마을에서 수확한 야채와 작물을 가지고 시장을 열기도 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서 수입은 적었지만 주민과 교류를 나누는 따뜻한 커뮤니티장이 되었다. 지금은 초등학생도 참여하며, 시장의 남는 공간은 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빈공장과 오래된 시장을 복원하는 데에도 주민들이 직접 나섰다. 강 옆의 빈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서도 주민들이 모였다. 행정기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겨졌던 것을 야와타교구는 주민들이 직접 나선 것이었다. 이는 일본에서도 매우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그는 지역개발의 코디네이터의 3가지 조건은 외부인, 젊은이, 바보라고 했다. 자신은 젊지는 않지만 외부인이었고, 또 바보였기에 마을만들기가 가능했던 것이라고 하며 자신의 경험이 한국의 마을만들기 에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강연을 마쳤다.

질의응답 시간에 있었던 의미있는 몇가지 질문들

Q.지역만들기 코디네이터의 세 가지 유형중 외부사람이 해당하는 이유는?
A.오래된 지역일수록 내부인끼리는 대화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제 3자인 외부인이 개입하면 좋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경우는 보수를 받지 않고 정말 좋아서 한 일이라 그런 점도 주민들에게 통했다고 생각한다.

Q.1992년 만들어진 마을만들기법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실제로 이러한 정책이 주민들에게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는가?
A.1888년도에 도시계획법이 만들어졌으나 105년간 도시계획법 어디에도 주민이 참여하라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도시계획법에는 주민들에게 밝혀서는 안 된다는 부분도 있었다. 특히 일본의 도시계획법에는 용도지역제라는 것이 있는데 이 지역은 상업지역이다. 주택지역이다. 공장지역이다 등으로 정하는 제도이다. 그 과정에서 이해관계가 발생하므로 주민과의 대립을 피하기 위해 숨긴 것이다. 이처럼 주민참여라는 것은 도시계획법 안에서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그러던 중 1992년 건축대사가 각 도도부현에 주민들의 참여를 명령했다. 가장 불편해했던 사람들은 당시 행정의 도시계획법 담당자들이다. 담당자들과 주민들은 적대관계였기 때문. 그 후 하야시 선생님이나 저 같은 사람이 이곳저곳에서 코디네이터를 하기 시작. 주민참여의 방법으로 워크샵을 채택하였다.

[##_1C|1165634766.jpg|width=”400″ height=”259″ alt=”?”|질의시간에 질문하는 청중._##]

강연을 마치며

일본의 근대화과정에서 발생한 농촌소외현상은 그 시기만 다를 뿐 한국에서도 흡사하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개발독재를 통해 근대화, 도시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일본의 경우보다 농촌의 소외감이나 박탈감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농현상이 불러온 결과 오늘날 농촌은 그야말로 60대 노인이 청년소리를 듣는 지경에 이르렀다.

후지하라교수가 지난 30여 년 동안 겪은 일본의 사례에서 우리는 앞으로 우리 농촌의 미래를 생각해 보게 된다. 산업구조나 경제발전 혹은 도시와 농촌 간에 발생하는 문제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에서는 좀 더 나은 마을만들기가 진행되기를 바란다. 아마 오늘 모인 이들은 이러한 바람을 갖고 지역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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