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근] 21세기 ‘중국관’과 ‘일본관’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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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우수근의 한중일 삼국지”
는 현재 중국 상하이 동화(東華)대학교 외래교수(外敎)이자, <한일아시아기금> 대표 및 상하이 복단대학 한국학 연구센터 겸임 연구원인 우수근님이 연재해 주고 계십니다. 그 동안 일본 및 중국은 물론, 빈번하게 왕래하던 아시아 각국에 대해 ‘One Asia’를 호소해 왔습니다. 앞으로 “우수근의 한중일 삼국지”는 한중일 3국의 정치 경제 및 사회문화 일반 비교를 중심으로 격주에 한 번씩 연재될 예정입니다. 특히 우리 사회가 현재의 중국을 좀 더 적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우수근님이 그 동안 직간접적으로 바라보고 접하며 고민해 온 중국에 대해 다각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세계적인 석학자라 일컬어지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제프리 삭스(Sachs) 경제학 교수는 < Weekly BIZ>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경제 위기 극복과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방안의 하나로 ‘한?중?일 3국의 보다 긴밀한 경제 협력’을 권했다. “동북아의 한?중?일 3국은 당면한 경제 위기와 이로부터 파생된 각국의 통화 부담 때문에도 오히려 더 긴밀한 협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를 잘 살려 3국이 ‘공동 통화(common currency)’ 등을 도입하고 더욱 밀접하게 협력해 나간다면 세계경제 질서에서 더욱 중요한 축(軸)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3국 간의 더욱 긴밀한 협력 앞에는 역사적 장벽이나 신뢰 부족, 정치적 문제 같은 장애물들이 놓여 있지만, “’그래도 그 굴레를 벗어던져라” 고 하고 싶다. 이러한 정책적 협력이 경제적 성공과 번영에 너무나도 소중하므로 극복하려고 노력하면 안 될 리가 없다. 몇 세기나 전쟁을 하고 역사적 응어리가 많은 유럽이 EU를 만들 정도로 가깝게 협력하고 뭉칠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거의 없었지 않았는가” 라고 덧붙이기도 하였다….

한국과 중국, 더 나아가 한?중?일 3국은 지근 거리에서 수천 년에 걸친 교류의 역사를 공유해 왔다. 과거에는 다양한 중국문화가 한반도로 또 한반도의 찬란한 문화가 일본으로 전달되며 일본의 독특한 전통문화의 토대가 되었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경위 때문일까, 혹은 동일한 동양인의 외모 때문일까, 동북아의 우리들은 서로에 대해 부지불식간에 자신들과 다를 바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근거 없는 기대 속에 행동하고 그러한 반응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생각과 기대는 상호 이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커다란 장애 요소가 되기도 한다. 자기도 모르게 자신들의 관습과 전통, 문화 등을 중심으로 상대방을 파악함으로써 상대방의 관습과 전통, 문화 등도 자신들의 그것과 유사할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상대방이 지닌, 자기와는 다른 그들만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질감을 느낀다.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다르므로 자연스러운 그 모습에 대해 실망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이를 고려할 때, 우리가 중국과 일본을 더 잘 이해하고 이를 기반으로 이들 국가와의 교류를 심화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나와 우리 위주의 ‘상호발전장애적’ 사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서로가 다르다는 기본 인식 속에 서로 존중하고 양보하며 공생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다. 이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우리가 유럽이나 아프리카 사람들 혹은 서남아시아나 중동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인식과 그들을 대하는 태도로 이들을 바라보며 대하면 되기 때문이다. 즉,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우리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에 맞는 행동이 교제와 교류의 토대가 된다면, 우리는 이들과의 관계를 더 자연스럽고 더 객관적인 자세에서 더한층 발전시켜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 ‘핵 공포의 균형’ 시대에 사는 우리가, 아직도 활과 창으로 무장한 수십 만 대군이 국경을 넘어 침략해 오던 시대를 떠올리며 우려한다는 것 또한 시대착오적 발상일 수도 있다. 과거에는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기마병과 보병으로 이뤄진 대군을 이끌고 침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찬가지로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핵무기와 같은 첨단 무기를 사용하기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만약 일본이 미국과 국경을 맞댄 캐나다나 멕시코였다면, 미국이 과연, 미국에게도 파급되어 질 온갖 직?간접적 피해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국경을 맞댄 그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수 있었을까?….

사실, 동북아의 안정과 공동번영을 위해서는 중?일 양국 또한 서로에 대한 마이너스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이 두 나라가 놓여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양국은 서로가 상대에 대한 경계와 대립 자세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물론 중국과 일본도 원만한 관계를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원만하게 된다 해도, 사실상 그것은 양국 사이의 일시적인 혹은 전략적인 현상에 불과할 것이다. 중?일 양국의 서로에 대한 현재와 같은 의식과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중국의 지속적인 국력변화는 중?일 양국의 대립 각만을 더욱 첨예하게 세워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는 한쪽이 아무리 대승적인 제안을 한다 해도 다른 한쪽은 그 저의를 의심하며 경계할 것이다. 그들 또한 상대방에 대한 자신들의 경계가 과도할 수 있다고 여기며 이를 위해 소모되는 막대한 국방비를 아까워한다. 하지만 이러한 내심과는 달리, 양국 문제는 이미 양국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고 만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 동북아의 핵심 중견 국가인 우리 한국이 해야 할 시대적 소명이 놓여 있다. 즉, 그들에게 필요한, 하지만 그들 스스로가 해내지 못하는 것을 우리 한국이 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상호간의 입장을 이해시키며(易地思之), 서로 다른 모습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할 수 있도록(求同存異) 중계, 조정하고 주도하는 가운데 동북아의 윈?윈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 바로 이를 위해서도 우리는 먼저 이웃 나라에 대해 좀 더 올바르게 다가가야 한다. 싫건 좋건,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웃 나라들을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0세기적 낡은 사고와 접근 방법으로는 무한하게 변화하고 있는 21세기 오늘날의 중국과 일본이 제대로 보일 리 만무하다. 또한 하나의 관점만을 고집한다면, 이들 국가가 온통 이상하고 이해하기 힘들며 기괴한 곳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인식으로는 이들과의 제대로 된 교제와 교류를 기대하기 힘들다. 따라서 이제는 일본과 중국을 우리로부터 놓아 주어야 한다. 이들은 내 마음 속에서 내가 만들어 낸 나의 중국과 일본이, 또한 우리가 빚어낸 우리의 일본과 중국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그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이들을 잘 활용하여 우리가 발전해 나가고 그 속에서 이들과의 윈?윈을 이뤄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먼저 우리 안의 낙후된 전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우리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에 걸맞은,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한국’의 국익에 적합한 ‘우리만의 중국관’과 ‘우리만의 일본관’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은 졸저, <중국을 이해하는 9가지 관점>을 토대로 현재에 맞게끔 적절한 첨삭과 수정을 통해 이뤄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앞으로 이어질 본 칼럼은 그 동안에 출간된 졸저와 논문, 기고 등도 적절하게 수정하고 업그레이드 하는 가운데 적극 활용해 나갈 것임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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