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 네트워크’를 구축하라

세계화(globalization) 바람이 한바탕 지나간 뒤 세계화(globalization)와 지방화(localization)의 합성어인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이 새로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세계화로 국가간의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국가’가 아닌 ‘지방’이 정치, 경제, 문화의 실천적인 주체로 떠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희망제작소는 고양시와 함께 12회에 걸쳐 주목할만한 해외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한국의 지방자치단체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보려합니다.


(2) 일본 삿포로 사회혁신 클러스터    

우리가 사는 마을을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부나 공공기관이 국민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려면? 침체된 지역경제를 살리고 생산과 유통,소비가 선순환되는 구조를 만들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상품과 서비스를, 기존의 패턴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혁신하는 것을 사회혁신 (소셜 이노베이션, Social Innovation)이라고 한다. 만일 이러한 작업을 다양한 이해관계자(stakeholder)들이 ‘더불어 함께’ 힘을 모아 추진하게 된다면, 결과는 훨씬 좋을 것이다.

사회혁신을 공동으로 추진하는 물리적 공간 혹은 집합체를 일컬어, 소셜 이노베이션 클러스터(Social Innovation Cluster, 이하 SI 클러스터)라고 부른다. SI 클러스터란 사회적기업, 중간 지원조직, 자금 제공기관, 대학 및 연구기관들이 인접한 지역 안에서 협력적인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다양한 사회적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조직 및 사업의 집적 상태를 의미한다. 낡은 관행에서 벗어나 새로운 운영질서를 고민하고, 혁신하며, 공생하는 협동사회 경제 네트워크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사회적기업(Social Enterprise)이 자리하고 있다.   

[##_1C|1095953521.jpg|width=”450″ height=”372″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출처: <소셜 엔터프라이즈, 사회적기업의 대두>, 타니모토 간지, 2006_##]

                                   
맥주와 눈 축제로 유명한 일본 북부 홋카이도(北海道)의 삿포로(札幌)시는 대표적인 SI 클러스터 지역이다. 90년대 초반,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정부의 사회서비스 지원이 축소되자 홋카이도 지역 역시 사회경제적인 활력을 잃어갔다. 삿포로시 주민들은 적극적으로 대안을 찾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회적기업들이 탄생했다. 하지만 삿포로에서 사회혁신이 가능했던 주요인은 사회적기업이 많이 생겨서가 아니라 지방정부, 기업, 학교, 금융기관 등 지역의 사회경제 주체들이 사회적기업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협력하는, 이른바 거버넌스(governance)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삿포로대학 등 대학교들은 사회적기업 관련 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신용금고들이 사회적기업 융자제도를 만들어 자금을 제공했으며, 지역 기업체 직원들의 자발적인 자원봉사 활동이 이어졌다. 시 정부는 관련 과(課)를 신설하여, 제도와 인력 지원을 통해 개별 주체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삿포로 SI 클러스터의 튼튼한 그믈망(network)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_1C|1132674463.jpg|width=”500″ height=”345″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출처: <소셜이노베이션 클러스터의 창출과 사회적기업>, 오오무로 노부요시, 2011_##]

                       
삿포로 혁신 클러스터 생태계 조성에 크게 기여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시민펀드다. 시민들이 조성한 돈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활용되었는데, 직접 (사회적)기업을 만들어 출자하는 방법과 증권화 과정을 통해 펀드를 조성하는 방법으로 기업이 필요로 하는 자금을 제공했다. (시민펀드는 홋카이도 그린펀드라는 이름의 비영리법인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이 모델은 후일 일본 전역으로 확산된다)

지원조직들의 활약도 큰 몫을 했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이용, 주로 외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마을만들기 센터, 사회적기업을 양성하기 위한 인큐베이션센터 네오스(NEOS) 등이 대표적인 중간 지원조직들이다. 현재 홋카이도 전역에 존재하는 수많은 자연학교들 대부분이 이들의 지원과 도움으로 탄생했다. 다양한 풀뿌리 단체와 소셜 벤처, 지원조직들이 거미줄처럼 관계 네트워크를 만들고 함께 공생하는 새로운 개념의 지역 생태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_1C|1000100259.jpg|width=”450″ height=”310″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삿포로 마루야마 자연학교 (출처: NEOS 홈페이지)_##]                   
‘자연을 테마로 도시와 농촌의 교류를 촉진하는 시스템 코디네이터’라고 자신을 명명하고 있는 홋타이도의 대표적 지원 단체 네오스(NEOS)는, 조직의 비전을 ‘은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은하 네트워크란 각각의 개성 넘치는 네트워크가 서로 연결되어 더욱 큰 네트워크를 만든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서로 이질적인 네트워크와 접촉하면서 성장한다’는 원리와 철학을 현실에 직접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SI 클러스터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사회적기업이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가치와 수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하는 사회적기업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창업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성장이다. 따라서 지역사회에 튼튼히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이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작은 묘목이 아름드리 나무로 성장하려면 비옥한 땅이 필요한 것과 같은 섭리라고 보면 된다.

SI 클러스터를 만들려면 어떤 요소가 선결되어야 할까? 먼저, 지역사회의 각 주체들, SI의 이해관계자들(Stakeholder)들이 함께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공유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거버넌스를 이루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이해관계의 충돌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 가치와 미션에 대한 몰이해와 상호간의 불신이다. 삿포로 클러스터 형성 과정을 들여다보면, 사회혁신의 가치와 미션을 공유하기 위한 각종 미팅과 회합, 토론회와 세미나 등 다양한 만남들이 촘촘하게 조직화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씨와 열매의 패러다임에 대한 이해다. 100개의 씨앗을 뿌린다고 100개의 열매가 열리지는 않는다. 일부는 발아하지 못한 채 씨앗으로 머물 수 있다. 하지만 열매를 얻으려면 꾸준히 씨를 뿌려야 하며, 동시에 열매가 맺힐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씨와 열매 사이에는 일정한 구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조급하게 서두른다고 열매가 빨리 맺히겠는가? 그러므로 좋은 나무로 키우기 위한 긴 시간의 노력과 인내심이 요구된다.

사회적기업 생태계는 결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올바른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감내해야 하며, 구성원들 사이의 진심어린 협력과 소통이 필요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얻기 위해 조급한 마음으로 접근하면 실패할 위험이 높다. 초를 다투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긴 시간을 뛰어야 하는 장거리 마라톤이기 때문이다.

[##_1C|1120876990.jpg|width=”550″ height=”324″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지속가능한 지역을 만들기 위한 로드맵 (출처:완주 CB센터, 2010)_##]
끝으로, 구체적인 실행계획과 로드맵(Road-map)이 필요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사는 지역에 존재하는 자원과 문제점을 제대로 알아야만 올바른 해법을 도출할 수 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려면 먼저 정확한 진단을 내려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지역을 알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운 다음, 시민의 힘을 모아 대안을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이 따라주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지역 내 각 사회경제 주체들간의 합의과정 즉, 거버넌스다.        

계획과 로드맵을 세우는 것이 반드시 관(官)의 역할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삿포로 클러스터의 경우, 지역사회 혁신의 실질적인 주체는 지방정부가 아니라 풀뿌리 NGOㆍNPO 단체들이었다. 지역민 모두가 잘 살기 위한 시민들의 주체적인 참여와 자발적 협력이 큰 변화를 이끌어낸 원동력이었다. 내가 사는 마을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누가 먼저라는 것이 중요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진짜 중요한 문제는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올 한 해 역시 지역의 핵심 화두는 일자리 창출일 것이다. 일자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일자리 창출 관련 공무원 숫자를 늘리고 직업 재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중소기업 지원센터를 활성화하면 되는가? 맞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런 방법은 언 발에 오줌 누듯 일시적으로 효과를 낼 수 있을지 몰라도, 개인과 가정의 삶의 만족도를 높이고 우리 마을을 건강하게 만들려면 보다 ‘근본적이고 혁신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지역 자원이 선순환(virtuous circle)될 수 있는 구조를 창출하려면 자원조사를 바탕으로 한 미세한 분석과 재설계(Re-design) 작업이 따라주어야 한다. 생산 기반의 유무가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자원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투입, 배분하여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인가가 마을과 지역을 풍요롭게 하는 관건이다. 관광 자원을 활용한 마을 만들기 사업을 통해, 혁신 클러스터를 일구어낸 삿포로를 보라.       

동시에 지역 내 풀뿌리 소기업, 밀착형 사회적기업, 사회혁신 벤처 등 다양한 풀뿌리 조직들이 포자를 뿌리고 온전히 성장할 수 있 는 환경 및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이들의 정착, 발전을 돕는 지원 조직의 숫자를 늘려야 한다. 불요불급한 예산을 과감히 줄여 지역인재를 발굴, 육성하는 일에 우선적으로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여전히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는 사람이며, 사람일 수밖에 없다.   

사회혁신 클러스터를 조성하고자 하는 근본 목적은 일자리 창출을 하기 위함도 아니며, 개발 지상주의에 입각한 지역 토건사업을 부흥하기 위함도 아니다. 반대로 그간 무모한 개발로 인해 파괴된 지역공동체를 새롭게 복원함으로써 살기 좋은 마을, 건강한 도시를 만들기 위함이다. 인간과 이웃, 자연이 더불어 함께 공존하는 행복도시를 만드는 것 말이다.
 
글_ 문진수 (소기업발전소 소장, mountain@makehope.org)
                                                  
월간 고양소식 4월호에 실린 글을 편집해 게재했습니다.  

● 연재목록
1.  세계의 중심은 어디인가 – 연재를 시작하며
2, ‘은하 네트워크’를 구축하라 –  일본 삿포로 사회혁신 클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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