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고맙습니다

우리 사회의 희망씨, 희망제작소 후원회원님을 소개합니다.

* 편집자 주 : <이 달의 희망감자>는 희망제작소의 든든한 버팀목, 후원회원님들을 소개하는 꼭지입니다. 이 달의 주인공은 이경희 후원회원님이십니다.


 

그는 전직 교수이지만, 선생님이란 호칭보다 ‘샘’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린다. 머리보다 발을 먼저 쓰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시원시원함이 있고, 무엇보다 활기가 넘치기 때문이다. 과감히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용기와 자신의 생각을 행동을 옮길 수 있는 실천력을 갖춘 그는 한마디로 열....이였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하면 되는거야”

 

2009 1 8일 희망제작소에서는 신년을 맞아 신영복 교수의 강연을 준비했다. 신영복 교수는 학기 중은 물론이고 외부강연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이 같은 대중강연을 듣는 건 흔치 않는 기회였다. 수강료가 있었음에도 120여명이 참석해 강연장이 미어터질 정도였다. 미리 기증받은 신영복교수의 서화 열점도 성황리에 판매되었다. SDS 1, 2기가 합동으로 준비했던 이날 강연은 대성공이었다. 이 강연을 성사시키기 까지 많은 이들의 노고가 녹아있었지만, 뭐니 뭐니해도 이 강연을 주역은 SDS 1기 이경희 선생이었다.

 


 

<진지하게 경청하는 청중()과 열강하는 신영복 교수(아래)>

 

이 모든 건, 한 사람의 꿈에서 시작됐다. SDS 1기 이경희 샘은 6개월 전, 수업 종강식에서 신영복교수의 강연을 듣고 싶다는 꿈을 발표했다. 이를 들은 박원순 상임이사가 직접 신영복 교수에게 연결을 시켜줬고, 소셜디자이너 스쿨 1,2기 회원들이 나서서 그 꿈을 착착 실행해갔다.

 

“개인 꿈이기도 했지만 함께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공동의 꿈이 된 게 아닌가한 사람 한 사람 감동을 받았다고 얘기하니까, 마치 내 꿈을 이뤘다기보다는 많은 사람 꿈을 한꺼번에 이룬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안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봐!

 

이경희 샘은 평소 인터넷을 즐겨 하는데, 해피시니어 프로그램에 관심이 커서 그와 관련된 자료를 검색하다가 희망제작소를 알게 됐다. 그 때 우연히 SDS 1기 뽑는다는 공고를 봤다. 박원순 상임이사가 강연한다는 걸 보고 바로 신청했지만 때는 늦었다. 마감 하루 전이라 이미 정원이 꽉 찼던 것. 더 이상 신청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경희샘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는다. ‘안된다고? 하게 해야지’ 당장 담당 연구원에게 전화를 걸어서 “나를 1번 대기자로 넣어달라” 고 부탁했다. 결국 제작소측은 그를 포함해 다른 대기자들까지 모두 넣어주겠다고 결정했다.

 

“내가 끝까지 해보는 성격이 있어요. 되든 안 되든. 나는 학생들한테도 말해요. 원하는 게 있으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봐라. 그래도 못하면 ‘아,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되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끝까지 가봐야지. 내 인생에 그런 게 많아요.

 

그는 지난학기를 끝으로 중앙대학교 교수 자리를 그만두었다. 20년을 넘게 해온 일이었고, 그것도 남들의 선망의 자리인 교수직이었다. 동료교수들은 그 소식을 듣고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패닉상태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건 그의 문제였다.

 

 

<신영복 교수 강연에서 진행하는 이경희 샘>

 

 

“그동안 열심히 살았지만, 이게 뭔가 사회와의 관계에서 내가 얼마큼 공헌하고 있는가에 대해선 미진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논문이 어떤 역할을 하고 사회를 얼 만큼 변화시켰나 하는 데엔 점점 비판적인 생각이 들었지요. 작년부터 이걸 곰곰이 생각해오다, 11월초 ‘그만두자’ 완전히 결심했어요. 계기가 된 건 여러 가지였는데, 어떻게 보면 자잘한 것들이 어느 날 빵 터져버린거지.

 

그에겐 멘토 같은 선배가 있다. 대학부터 알고 지낸 그 선배는 일에 치여만 사는 남편에게 ‘사람답게 살자’며 퇴직을 권고하고 6개월간 휴가를 주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몇 년에 한 번씩 만나는데,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소박하게 사는데도 무척이나 행복해 한다고 했다.

 

“굉장히 씩씩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없어요. 의사결정을 할 때면 늘 생각날 정도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에요. 한번은 교수한다고 했을 때 그 선배가 한마디 했어요. ‘왜 교수하니? 넌 딴 걸 훨씬 잘 할 거 같은데 아깝다. 교수 말고도 할 일은 많아.’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교수 왜할까.

 

당시 그가 생각해낸 답은 ‘막연한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어려운 시대를 겪으면서,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을 가져서 안정적 생활을 해야겠다는 욕구가 컸다. 이건 그 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욕구이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다른 생각이 들었다. 평소 사회적 기업에도 관심이 많아서 여러 단체에 기부도 하고 자원 활동도 했다. 6년 전 지리산 어느 골짜기에 있는 지인 집을 방문했다가 완전히 반해서 그곳에 집을 지어놓고 서울에 왔다 갔다 하며 지내기도 했다. 남들은 이경희 샘에게 하고 싶은 일은 하며 살았다고 하지만, 정작 본인은 한계를 느꼈다. 직업을 가진 이상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완전히 몰두할 수 는 없었다. 지금 교수하는 게 최선 일까? 박원순 상임이사가 말한 직업 10계명에서 ‘마지막이 꼭 필요하지 않은 자리가 아니면 떠나라’ 이게 또 마음에 남았다.

 

“그때 무슨 책을 읽었어요. ‘우리가 확실하게 가진 건 시간밖에 없다’ 이런 말이 나오는데 그게 굉장히 맘에 와 닿았어요. 우린 굉장히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가진 건 시간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이 시간을 어떻게 쓸까 굉장히 깊게 생각하게 됐죠. 그러고 나니 시간이 굉장히 소중해지더라고. 게다가 내가 건강할 때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냐?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지.

 

가족회의를 거쳐서 가족의 동의를 구했다. 두 아이와 남편의 전폭적 지지 하에 사표를 제출했다. 교수자리에 오르는 건 무척 힘들고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그만 두는 건 쉬웠다. 사직서 한 장 쓰는 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말하죠. ‘너무 좋겠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하지만 안 해요. 내가 보기엔 다 할 수 있는데 대부분 안 해요. 전 근데 할 수 있게 됐다는 거. 학생들과 자주 못 만나는 건 서운하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게 마치 유치원생이 된 것처럼 참 신나요.

 

말보다는 행동으로, 머리보단 발로 뛰기

 

그는 희망제작소의 모금 운동 중 하나인 ‘희망 집짓기’ 를 시작한 멤버이기도 하다. SDS 교육프로그램 중 모금론 강의를 통해 그의 팀에서 나온 모금기획안이었다. 집터 마련을 목표로 기부를 받는데, 금액에 따라 벽돌하나, 주춧돌 놓기 등 시각적으로 보이게 만들어 아이디어를 실제 행동으로 옮겼다. SDS 활동도 열심, 기부운동도 열심인 그가 만약 희망제작소 연구원으로 일하게 된다면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궁금해졌다.

 

“글쎄 ……. 제가 하고 싶은 건 온 도시, 온 마을 꽃으로 덮는 거예요. 되게 주책 맞은 생각이죠? 돈이 되는 건 아닌데, 여러 나라 여행하면서 항상 마음속에 좋다고 느꼈을 때를 보니까 정말 꽃이 많은 도시더라고요. 시민들이 다 같이 도시를 아름답게 꾸며갔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예전에 단독주택 살 때 이웃집 몇 군데에 꽃 화분을 2개씩 나눠준 적이 있었다. 다들 꽃을 심어서 집밖에 달았는데, 그게 바이러스처럼 퍼져서 2-3년 뒤에는 스무 집 이상이 그렇게 꽃을 달았다고 했다. 그렇게 작게 시작해도 충분한 일이다. 참 멋진 일이라 동조했더니, 이경희 샘은 <우리나라 골목에 맞는 화분> 빨리 디자인 시작하자며 대뜸 사업제안부터 해오셨다. 정말 행동력 하난 못 말리신다. 그랬던 그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교수’라는 직업을 빵 걷어차 버리고 나올 수 있었을 테다.

 

“전 책상에 앉아 기획 하는 거보다 한 송이라도 직접 꽃을 심고 싶어요. 신영복 선생님 강의에서 인상 깊었던 게 머리, 가슴, 발이 있는데 나는 발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SDS? 안가면 네가 손해야

 

그는 SDS 오면 좋은 게 많은데, 무엇보다 좋은 건 사람들이라고 꼽았다. 젊은 사람부터 나이든 사람까지, 직업도 각양각색인 사람들이 오직 ‘꿈을 꾸고 실천하기 위한 열망’하나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서 있는 위치는 다르지만 금방 친해지게 된다. 사람들끼리의 네트워크에서 많이 배운다고 했다. 그가 꿈꾸는 세상도 ‘더불어 사는 사회’다.

SDS 수업은 그에겐 너무 아쉬운 강의다. 이유는 단 하나. 너무 적은 수가 듣기 때문이다. 40명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 특히 젊은 사람들이 들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도 추천해 듣게 했다. 이경희 샘은 더 많은 홍보가 더 필요하다고 적극 주장을 펼치셨다.

 

“미국에서 지내면서 놀랐던 점은, 학교 청소부한테 물어봐도 자기가 관여하는 조직이 대 여섯 개는 될 정도로 사회에 대한 의식이 높다는 거였어요.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게 좀 부족해서 아쉽죠. 어렸을 때부터, 자원봉사든 기부든 무엇이든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에 대한 봉사나 기여를 해야 하는데 그런 교육이 부족해요.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고요.

 

마지막 고별강연에서도 학생들에게 강조했던 것은 ‘꿈’이었다. 그는 내가 얼마나 기여했고, 어땠다 이런 애기를 하는 대신 내가 학교를 그만두면 할 수 있는 게 뭘까 그걸 ‘버킷리스트’로 만들어 학생들에게 얘기했다. 그가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는 하나.

 

“나도 이 나이에 이런 꿈들을 품고 사는데, 너희들도 더구나 젊지 않니. 이 말이 마음에 와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막연한 꿈이 아니라 구체적인 꿈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걸 가지고 절대 포기하지 말 것.

 

아직 무엇을 할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교수직을 그만두고 나니까 생각이 너무 복잡해졌다. 주위에서 이것저것 요청도 많이 들어온다. 하지만 우선은 6개월을 아무것도 안하고 주변정리 할 계획이다. 연구실 책도 주변에 다 나눠줬다. 그렇게 정리를 싹 하다보면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정리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어느 정도 생활도 안정되었으니, 정말 봉사를 맘 놓고 할 수 있는 시기인거 같아요. 어떤 일인지 모르지만. 또 알아요. 희망제작소에 들어가서 할지. 호호호”

 

남은 시간 뭘 할까……. 고민하고 있지만, 그의 말을 들으면서 이미 마음속에 길은 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봉사, 발로 뛰는, 더불어 살기, 교육……. 몇 가지 키워드가 이미 그의 주위에 맴돌았다.

 

 

 

[글, 사진 _ 김귀자 / 희망모울 인턴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