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싱크탱크를 가다(2)]미쯔비시 종합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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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일본의 싱크탱크를 가다” 기획 연재가 이번 주부터 격주 월요일 게재됩니다. 희망제작소에서 기획한 세계의 싱크탱크 조사는 2006년부터 일본, 미국, 독일에서 동시에 시작ㆍ진행되었습니다. 현재 미래자원연구원의 선임연구원인 이영근 박사는 당시 츠쿠바대학(University of Tsukuba)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고, 1996년 일본에 발을 디딘 후 일본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일본사회의 움직임을 유심히 보아왔습니다. 앞으로 본 연재는 일본 싱크탱크들을 소개하는 차원 뿐만 아니라 입체적인 정보와 분석을 제공할 예정입니다.

필자 : 이영근
미래자원연구원 선임 연구원

일본의 싱크탱크를 가다 – 미쯔비시 종합연구소

미쯔비시 종합연구소를 방문한 것은 2007년이 거의 저물어가는 12월의 어느 날 이었다. 쾌청한 날씨가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그 날은, 방문하기 전부터 나름대로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미쯔비시 종합연구소를 방문하기 약 2주전에 이 연구소의 수석연구이사를 지냈던 일본싱크탱크 아카데미의 오카모또(岡本憲之) 이사장과 한 시간이 넘도록 대화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카모또 이사장은 미쯔비시 종합연구소가 설립된 후 바로 입사한 후 35년 가까이 현역 싱크탱커로서 일한 장본인이다. 일본 싱크탱크 전모에 대해 누구보다 상세하게 알고 있었으며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미쯔비시 종합연구소에 대해서는 초창기부터 구석구석까지 파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은 일본 싱크탱크 아카데미의 이사장으로서 대화를 청한 터였는지라 그 스스로도 미쯔비시 종합연구소에 자체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는 필자에게 미쯔비시 종합연구소의 후배이자 현역으로 근무하고 있는 아오야기(?柳雅)씨를 소개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 했다.
[##_1R|1014192865.jpg|width=”290″ height=”244″ alt=”?”|미쯔비시 종합연구소 빌딩_##]도쿄 오오테마찌(大手町)역에서 내려 5분쯤 걸어가니 유독 검은 건물이 눈에 띠였는데 이것이 노무라 종합연구소와 함께 일본 싱크탱크 계를 양분한다는 미쯔비시 종합연구소이다. 6백명의 연구원과 천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일년에 약 3천억원의 예산을 움직이며, 매년 수천건의 과제를 수행하는 거인은 40여년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설립

미쯔비시 종합연구소(이하, MRI)는 1970년 주식회사의 형태로 출발하였다. 당시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싱크탱크 붐이 일어난 시기였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당시 금융계열 기업들은 앞을 다투어 싱크탱크를 설립하였다. MRI 역시 은행계열에서 출발한 싱크탱크란 점은 다른 기관들과 동일하지만, 설립 모체가 대기업이 아니라는 점이 크게 달랐다. 즉, 2차대전 전의 미쯔비시 그룹은 거대한 재벌기업으로 일본 사회전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대대적인 재벌 해체작업으로 미쯔비시 그룹은 각각의 독립 기업으로 나뉘어 졌던 것이다. 노무라 종합연구소, 다이와(大和) 종합연구소, 후지(富士) 종합연구소들이 각각 금융계를 강력한 자금지원 모체로 탄생한 것에 비해 MRI는 설립 당시부터 취약한 재정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하여 설립 후 10여 년간은 적자체제에 시달려야 했다.

70년대 수많은 주식회사형 싱크탱크들이 설립되기는 하였지만 어떤 식으로 경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에 가까운 상태였기 때문에 영업에서 연구, 활동 보고, 평가에 이르기까지 적은 수의 연구원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고 한다. 아오야기(?柳雅) 감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미쯔비시 그룹에 속해 있는 MRI였지만 사실 다른 미쯔비시 그룹으로부터 재정적으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고, 실제 현재에 있어서도 그들로부터의 위탁연구는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설립 초기 다른 금융계 싱크탱크들은 모기업의 윤택한 자금지원 아래 운영이 되고 있었던 반면 MRI의 경영은 늘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하고 항상 궁리하였고, 하루에 수 십 킬로를 걸어 다니는 영업활동은 당연한 일과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념 & 성격

MRI는 주식회사 형태의 싱크탱크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경영”상 어떠한 이념을 가지고 운영을 지속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중요시된다. MRI의 근저를 관통하는 이념은 ‘스스로의 강점을 살려 독창적인 지견(知見)에 근거한 기업활동을 행함으로써 21세기 사회의 발전에 공헌’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영지와 정보에 근거하여 사회에 공헌’, ‘공명정대한 기업활동’, 그리고 ‘다채로운 개성에 의한 종합력의 발휘’로 집약된다.

분명하게MRI의 이념은 정책 싱크탱크를 표방하는 곳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기업활동을 통하여 연구를 수행하고 정책제언을 행하며, 그리고 자신들의 정책이 실현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기업활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MRI의 정책실현 수단은 미디어를 통한 방식도 아니며 정치인들과 열띤 토론의 장을 제공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지 않다. MRI는 사회가 앞으로 무엇을 요구하게 될 것인지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며, 그러한 능력 자체가 정책을 실현시키는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90년대 초 종합조사부 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사토우(佐藤公久)의 지적은 눈길을 끈다.

“싱크탱크의 기본기능은 정책제언이며 전략제언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그러한 제언을 구체화 할 다음 단계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훌륭한 보고서’로 끝나버린다면 관료가 작성한 문장과 별반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싱크탱크의 결과물 자체가 모래 위의 성으로 끝나버릴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가지고는 고객으로 부터도 외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훌륭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만으로 종결되는 것이 90년대의 싱크탱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다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는 체제를 기업이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험부담도 분명히 클 테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앞으로 비즈니스 찬스를 더욱 넓혀줄 것이고, 연구원의 책임체제도 더욱 명확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구사업

MRI는 현재 크게 3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래지향적이고 학제적인 연구를 전개하는 THINK-TANK (두뇌제공) 부문, 경영 수뇌들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Consultation (해결책의 제시) 부문, 변혁을 실현할 시스템을 구축하는 Solution (해결책의 실현) 부문이 그것이다. 각 부문이MRI내에서 유기적으로 결합하며 최선의 결과를 지향하게끔 의도된다.

싱크탱크 부문의 기능을 따로 떼어내서 보면, 우선 ①지혜를 집결하여 초 장기적인 시점에서 미래그림을 그려나가며, ②객관성과 신뢰도를 높이기 위하여 과학적 수법을 구사하며, ③다양한 테마에 대하여 장기에 걸친 고도의 연구축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추구한다.

싱크탱크 부문이 행하는 연구는 다음의 5개 분야로 집약된다.

먼저, 경제, 경영분야로 매크로 경제정책, 산업전략, 신 사업제안, 사업영역의 재구축 등의 정책제언 사업이다. 이는 또한 ①경제, 재정, 경영분석 분야와 ②정책 창발(創發) 연구 분야로 나누어진다. 다음으로 사회공공 사업이며, 여기에는 사회시스템, 지역경영, 인간/생활, 그리고 해외사업 추진 분야로 나뉘어 진다. 세 번째 연구사업은 과학기술 분야이다. 여기에는 환경/에너지 사업, 과학/안전정책 사업, 정보기술 사업, 그리고 선진 비즈니스 사업이 전개된다. 네 번째는 컨설팅으로 경영 컨설팅, 금융 컨설팅, 그리고 관서지역에 국한되어 지적 창출사업이 진행된다. 끝으로 다섯 번째 사업이 솔루션으로 여기에는 비즈니스 솔루션, 공공 솔루션, 시스템 엔지니어링으로 분류가 된다. 하지만 컨설팅을 비롯하여 솔루션 사업은 싱크탱크 부문이 담당하는 사업 영역에 해당하지 않는다.

테사구리(手探り)와 시행착오의 결과

인터뷰가 행해진 한 시간 반 정도의 대화 중에 아오야기(?柳雅)는 테사구리(手探り)라는 말을 여러 번에 걸쳐 사용했다. ‘테사구리’란 가령 어둠 속에서 손으로 더듬거리며 무엇인가 찾을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 초기 MRI의 상황과 일본 싱크탱크 첫 주자로서의 역할이 얼마나 어려웠었나 하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나 보다.

“제가 처음에 MRI에 입사했을 때가 1980년 이었으니까 설립 10년째가 되는 해입니다만, 저희 부모님은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물론 이런 곳이 있었는지 조차 모르셨습니다. 전국의 회사를 찾아다니며 영업활동을 하였지만, 당시 사회는 정보나 지식은 거저 얻는 것이지 돈을 지불하면서 까지 얻어야 하는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 지배적 풍토였기 때문에 좀처럼 실적을 올리기가 어려웠습니다. 당시 제 상사였던 오카모토씨에게 매일같이 욕을 들어 먹는 것이 제 일과였으니까요.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위탁 수주를 올릴 수 있을까, 누구를 찾아가면 지식과 정보의 가치를 알아줄까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면서도 그 해결방법은 늘 ‘테사구리’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초기 MRI는 신입사원에 대한 특별한 교육 프로그램을 두고 있지 않고, 이른바 도제(徒弟)제도로 바로 윗 상사와 같이 행동하면서 업무를 익혀나가는 식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도제제도에 의한 운영체제로 직원 상하간의 유대와 단결은 강했고, 늘 발로 뛰어야 하는 당시의 MRI에 있어서는 그것 자체가 커다란 활력소로서 기능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직의 규모가 커지고 인원이 늘어감에 따라 종래의 도제식 교육으로는 업무의 통일성에 중대한 문제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현재는 입사후 3년까지 매년 단계에 맞는 교육을 행하고, 4, 5년차에는 그룹 리더 연수교육, 그리고 20년차에는 본부장 연수교육이 진행된다. 1992년 당시 사장을 역임하였던 나라(奈良久彌)가 “연구자는 이른바 ‘의사’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연구원의 연수를 강화하여 오진하지 않는 ‘의사’를 키우고 싶다”고 한 것도 싱크탱크에 있어서 인재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_1L|1147744482.jpg|width=”327″ height=”244″ alt=”?”|아오야기(?柳雅) 감사역_##]일본의 민간 싱크탱크, 특히 주식회사형 싱크탱크를 거론하는 경우 노무라와 미쯔비시는 반드시 거론된다. 양자의 사이는 경쟁 관계에 있으면서도 설립부터 늘 선두의 자리를 노무라 종합연구소에 내어주는 MRI의 마음은 그리 편치는 않아 보인다. 아오야기와의 대화 중에서도 노무라 종합연구소는 늘 MRI와의 비교 대상이 되었고, 한편으로 선구자적 존재로 인정되기도 하였다. MRI가 노무라 종합연구소와 다른 점은 수없이 많지만 결정적인 것은 싱크탱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시각의 차이였다.

모두(冒頭)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MRI는 미쯔비시 그룹에 속한 자회사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완전히 독립된 기업체로 설립되었다. 물론 재정적인 면에서 미쯔비시 계열 기업으로부터 다소 도움을 받기도 하였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책임은 MRI 자신이 져야 했고 그러한 상황이 MRI를 누구보다도 강한 싱크탱크로 키우게 하였다. 초기 싱크탱크 붐이 일면서 같은 시기에 설립되었던 수많은 금융계 싱크탱크들은 일본의 거품이 빠지기 시작하고 모기업인 은행의 경영상태가 악화되자 가장 먼저 사라지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싱크탱크 그 자체 아무런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곳들도 단순한 기업내의 조사기관으로 전락하거나 노무라 종합연구소의 경우처럼 시스템 기능을 통합하는 등 수익성 높은 체질로 속속들이 이행하였다. 그런 와중에 단 한군데 끝까지 싱크탱크로서의 모습을 유지한 곳이 MRI였다. 그들의 무수한 시행착오와 테사구리는 도미노처럼 넘어가는 금융계 싱크탱크들에게 한줄기 가능성을 남겼던 것이다.

1988년 노무라 종합연구소가 계열 회사인 노무라 컴퓨터 시스템(NCC)과 통합함으로써 거대한 종합연구소로 거듭나는 것을 본 다른 금융계 싱크탱크들이 앞을 다투어 시스템 부문을 통합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MRI만이 싱크탱크 본래의 업무에 초지일관한 것에 대해 아오야기는 진정한 싱크탱크를 위한 순수한 열정만은 아니었다고 고소(苦笑)한다.

For the Future

MRI에는 이사회가 없다. 연구이사 2명을 제외하고 이사가 없기 때문이다. 왜 이사가 없느냐고 아오야기에게 물었더니, 이사가 필요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이사회가 없다는 것은 단순한 외형상의 모습 그 이상의 의의를 가진다. 그들이 지향하는 미래상에 이사회는 장애물로 인식된다는 이야기다.
[##_1C|1176656479.jpg|width=”358″ height=”202″ alt=”?”|For the Future_##]MRI의 메인 홈페이지를 보면 위의 사진이 올려져 있다. “미래를 共創한다”, 즉 개개인의 미래, 지역사회의 미래, 그리고 국가와 전 세계의 미래를 모두 함께 힘을 합쳐서 창출하자는 뜻인데, 싱크탱크가 그 길을 제시해 주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MRI가 가고 있는 길,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 오랜 기간 싱크탱커로서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베테랑 아오야기조차도 확신을 하지 못하는 것은 가고자 하는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불확실한 곳이란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MRI는 설립 이후 매년 매년이 위기적 상황이며, 우리는 살아남기 위한 승부를 매번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은 지금도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MRI는 늘 싱크탱크로서의 길을 걸어가려 하였고, 그것에 대한 자부심이 큰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작년에 DSC라는 컴퓨터 회사를 매수하였고, 시스템 부문을 강화하려는 움직임 역시 날로 커져가고 있습니다. 노무라 종합연구소들이 싱크탱크임을 포기하고 대규모 정보기업으로 변신한 것을 보면서, 이제 진정한 주식회사형 싱크탱크는 MRI만이 남아있다고 하지만, 말을 바꾸어 보면 MRI만 역사에 남겨져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도 있습니다. 시스템 부문을 강화하려는 지금의 움직임도 그러한 불안에 대한 반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싱크탱크에 속한 우리들이 어떻게 존재감을 나타낼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지금 고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 연재순서

0. [공지]기획연재 & 필자 소개(2/2)
1. 일본 싱크탱크 – 연재를 시작하며(2/2)
2. 미쯔비시종합연구소(2/16)
3. 일본종합연구소(3/2)
4. 東京재단(3/16)
5. 구상일본(3/30)
6. PHP종합연구소(4/6)
7. 공공정책플랫폼(4/20)
8. 싱크탱크2005일본(5/11)
9. 종합연구개발기구(5/25)
10. 지방자치연구기구(6/8)
11. 일본국제교류센터(6/22)
12. 가계경제연구소(7/13)
13. 유타카론(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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