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례이야기 4
세계는 1센티미터씩 바뀐다

■ 소개

‘도가니법’, 감사합니다?

‘도가니법’으로 불리는 성폭력 범죄 특례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특수학교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도가니〉 열풍 덕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장애인과 그 가족들은 자극적인 이슈에 기댄 일회성 관심을 경계하고 있다. 이런 공분이 정작 장애인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차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관한 진지한 고민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지역사회의 힘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려고 나선 사람들이 있다. 《세계는 1센티미터씩 바뀐다》는 장애 인권 조례가 만들어지기까지 3년 동안 고군분투해온 일본 지바 현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장애아의 아버지이자 인권 침해 현장을 누벼온 기자, 그리고 조례 연구회의 위원장으로 조례 만들기에 깊숙이 관여하기도 한 저자 노자와 가즈히로는 장애 인권 조례가 어떤 고민에서 출발해 어떤 장벽을 마주하고 헤쳐 나갔는지, 그 소박하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주민의 손으로 지키는 장애 인권, 지역의 힘으로 만드는 장애 인권 조례

《세계는 1센티미터씩 바뀐다》는 2004년 가을 처음으로 지바 현 장애 인권 조례 연구회가 만들어진 때부터 2007년 의회에서 통과될 때까지 시간 순으로 따라가며 주민들이 조례를 만들어온 과정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조례 연구회는 장애인과 그 가족들을 중심으로 복지 관계자, 교사, 의사, 기업가 등 다양한 분야의 위원을 모집했다. 일상의 차별을 해소하려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생각이나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하고도 함께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례안 작성에 앞서 연구회는 800건이 넘는 장애 차별 사례를 수집하고 현의 각지에서 타운미팅을 열어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교육, 의료, 노동, 복지 등 여러 분야에서 차별 사례를 수집하고, 사례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조례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할지 차츰 윤곽이 잡힌다. 연구회 위원들은 다양한 사례를 접하면서 명백하게 악의적인 차별뿐 아니라 오해에서 비롯된 차별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애완동물을 키울 수 있는 방을 빌렸더니 장애인을 애완동물로 간주해 할증 요금을 요구했다’, ‘저녁 5시 이후 어린이의 가게 출입은 금지라며 성인 지적 장애인을 내쫓았다’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례는 황당하지만 의외로 우리 주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이다.

장애에 관한 사회적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법 제도와 처벌에만 의지해서는 부작용이 오히려 더 크다. 조례 연구회는 이런 일상적인 차별과 몰이해를 지역 공동체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 한다. 저자가 소개하는 조례안의 요점에서도 그 의도가 잘 드러난다. 각 지역마다 담당 기관을 설치해 처벌이나 법적 분쟁 전 단계에 소통과 이해를 이끌어내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장애 당사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토로할 수 있는 상담원, 차별 사례의 조사와 중재를 담당하는 차별 해소 위원회, 그리고 장기적으로 차별적인 인식과 환경을 개선하는 다양한 사업을 벌이는 추진회의를 설치해 장애 차별을 해소하는 중심이 되게 했다. 장애의 정의, 통합 교육과 분리 교육, 탈시설 등 장애 인권 문제의 주요한 쟁점에 관해서도 되도록 장애 당사자의 관점을 반영하려 한 점도 돋보인다.

장애 인권이라는, 자칫 딱딱하고 어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주제를 다양한 에피소드와 연구회 사람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통해 부드럽게 풀어낸 점도 새롭다. 현장을 발로 뛰어 취재한 경험을 바탕으로 특수학교 성폭력 사건이나 약물 부작용 소송 등의 사례를 통해 재판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는 대목은 설득력을 더한다. 지적 장애아인 딸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고 몰래 보러간 아들의 소프트볼 경기가 끝난 뒤 딸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 아들 친구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어머니, 보수 야당의 반대에 부딪혀 대폭 수정을 각오하고 조례안 철회를 결정한 연구회의 심경을 토로한 장면 등 마음을 울리는 여러 에피소드는 조례 만들기 과정을 마치 내 일처럼 느끼게 한다. 부록으로는 최종 통과된 조례와 연구회가 만든 조례 원안을 함께 실어 한국에서 장애 인권 조례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참고할 수 있게 했다.

1센티미터씩이지만, 세상은 바뀐다

어느 아파트 주민들이 정신 장애인과 그 가족을 동네에서 내쫓으려 협박을 일삼고 각서까지 받은 사건이 있었다. 주민들의 반대로 장애인 입소 시설이 지역에 자리잡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는 뉴스는 이제 그리 놀라운 소식도 아니다. 《세계는 1센티미터씩 바뀐다》가 전하는 지바 현의 사례는 그래서 더 값진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지역이 먼저 나서서 주민들의 손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동네를 만들려고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바에서 장애 인권 조례가 만들어질 때까지 2년 10개월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조바심 내지 않고 천천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장애는 틀린 것도 모자란 것도 아니라 그저 ‘다를’ 뿐이라고 설득하려 했다. 지역과 사회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손을 잡고 차별 해소를 향해 큰 걸음을 내딛은 지바 현의 이야기는 1센티미터씩, 조금씩,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사람들에게 큰 격려와 도움이 돼줄 것이다.

■ 목차

프롤로그

1장 왜 지바에서 시작됐을까
뜨거운 열기 속에서 | 지바가 움직이기 시작하다 | 그룹 홈으로 찾아간 장애복지과장 | 지바 현의 조례 만들기, 시작되다 | 꼴찌 프로야구 구단처럼 | 기업도 참여하다 | 참았던 이야기가 쏟아져나오다 | 다양한 불합리들 | 말할 수 없는 괴로움

2장 차별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800건이 넘는 사례가 모이다 | 장애를 차별하는 학교 |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 장애인은 일하지 마! ? 노동 분야의 차별 | 이 애는 포기하고 한 명 더 낳으세요 ? 의료.복지 분야의 차별 | 차별의 다양한 얼굴 | 업신여기는 눈길, 차가운 느낌 |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

3장 당신만 슬픈 게 아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쫓겨난 사람 | “장애인이라고 응석부리지 말라” | 타운미팅이 전해준 감동 | 불 꺼진 거리 | 빛나는 박수의 파도 | 가면 속의 외침 | 여고생들의 콩트 | “승리의 여신이네”

4장 우리들의 조례가 만들어지다
교육을 둘러싼 논란 | 처벌은 효과가 있을까 | 조례안을 완성하다 | “시끄러워, 병신들이!” | 장애인 차별은 왜 일어날까 | 평등이란 뭘까 | 남의 일이 아니다

5장 벽
조례안을 제출하다 | 뉴스레터를 보내다 | 격론 | 심사를 계속하기로 하다 | 차가운 봄 | 비오는 날의 보고회 | 마지막 밤 | 가슴 떨리던 광경

6장 세계는 1센티미터씩 바뀐다
곳곳에서 열린 조례 공부 모임 | 야시로 에이타로도 달려왔다 | 다시 한 번, 왜 필요한가 | 좋은 시설에서 학대받는 장애인들 | 부모를 속박에서 해방시키려면 | 재판은 사람을 행복하게 할까 | 잃어버린 30년 | 재판을 대체하는 문제 해결 시스템 | 공부 모임 최대의 고비 | “1센티미터씩 바뀌고 있다”

7장 철회
격렬한 공방 | 공은 우리들에게 넘어왔다 | 조례의 불씨가 꺼지지 않기를 | 작전상 후퇴 | 넘쳐흐르는 눈물

8장 작은 기적
나팔꽃을 들고 | 의회에 서다 | 제시된 수정안 | 9회 말 역전승을 노린다 | 도망치려고 움직이면 진다 | 막판에 단념하다 | 최종안에 남은 것 | 모두 함께, 의회로! | 각 회파를 방문하다 | 의회는 재미있어! | 노 정치가의 마음속 | 망둥어 한 마리 | 상임위를 통과하다 | 드디어 통과되다 | 왜 그렇게 반대한 걸까 | 사진 한 장

참고 자료
1. 통과된 조례
2. 조례 원안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

■ 저자 소개

노자와 가즈히로 지음

시즈오카 현 아타미 시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1983년에 마이니치신문사에 입사한 뒤 보도부, 사회부, 과학환경부 부부장을 거쳐 지금은 사회부 부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일본인 모두가 손을 잡는 모임’ 이사, 지바 현 장애인 차별 철폐 연구회 위원장을 지냈다. 《사람은 왜 학대를 하는가》 등을 썼고, 함께 쓴 책으로 《발달장애와 미디어》, 《다시 복지 시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죽이지 마세요 ? 아동학대라는 범죄》, 《약해 에이즈 ? 빼앗긴 미래》, 《복지를 빼앗다 ? 학대받는 장애인들》 등이 있다.

정선철 옮김

요코하마시립대학교 국제학 박사로 요코하마시립대학교 연구원, 부산발전연구원 연구원, 조선대학교 강사를 거쳤다. 현재 서울형사회적기업 사회설계연구소 소장으로, 마포구·중구 살기좋은 마을만들기 심의위원회 위원, 은평구·강동구·강북구 사회적기업 육성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한일관계의 현상과 미래비전〉, 《순환형도시 가꾸기 추진전략 연구》 등을 썼다.

김샘이 옮김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다. 도쿄외국어대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한 경험을 계기로 일본 연구를 시작했다. 지금은 마을만들기연구소 연구원으로 일본 선진 지역 사례 분석과 한일 교류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