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품 안에 굴러들어왔어요”

20대 청년보다 활기차고,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미국 시니어, 그들에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을까요? 젊은 한국인 경영학도가 ‘세 번째 장을 사는 사람들’ 이라는 제목 아래 자신의 눈에 비친 미국 시니어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적극적으로 노년의 삶을 해석하는 미국 시니어의 일과 삶, 그 현장으로 초대합니다.  


세 번째 장을 사는 사람들 (8) 

미국 시니어 분들을 인터뷰하면서 놀랐던 것은 자원봉사 기회가 그 분들의 생활 도처에서 다양하게 주어진다는 것과 대부분의 시니어 분들이 단 하나의 자원봉사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난 글에서 소개해드린 로라 씨는 일주일에 이틀, 화요일과 수요일 오후를 SOAR55에서 시니어들에게 자원봉사 자리를 소개하는 일을 하며 보냈고, 다른 날에는 종합병원에서 도우미(Greeter: 병원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위치 정보를 알려주고 배웅도 하는 일) 자원봉사일도 하고 맘에 맞는 친구와 보석 사업 구상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보스턴 근교에 있는 뉴헴프셔(New Hampshire) 주에 위치한 작은 별장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미국 시니어 바바라 훼이(Barbara Fay)씨의 삶 속에서도 이와 같은 기회의 다양성과 일의 다양성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_1C|1378232213.jpg|width=”400″ height=”377″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_##]메인(Maine) 주에 있는 오두막 커뮤니티*(Cottage community) 이사, 비원어민들의 영어 선생님*(ESL/EFL teacher), 유치원생과 초등학교 저학년 국어(독해, 작문 등) 담당 보조 선생님, 써드베리 지역사회 여성 투표자들의 모임*(League of Women Voters of Sudbury) 언론 홍보 담당자, 써드베리 정원 클럽*(Sudbury Garden Club) 이사, 그리고 일곱 손주들의 할머니.

바바라씨에게 현재 무슨 일을 하시냐고 묻자 이 모든 역할을 한 시간에 걸쳐 하나하나 짚어주셨습니다.

대학 시절 중고등 교육학을 전공하고 초등교육학 석사를 받은 바바라씨는 석사 졸업 후 사립 학교에서 십 년간 초등학교 및 유치원 선생님으로 활동했습니다. 한창 아이들 교육비, 양육비가 많이 들던 시절에 바바라씨는 월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선생님 일을 관두고 컴퓨터 산업 대기업에서 마케팅 및 언론 홍보 담당 매니저로 십 년간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테크놀로지 관련 산업의 거품이 빠지기 시작할 무렵, 퇴사를 하고 다른 직장을 찾았습니다. 그 이후 8년간 바바라씨는 터프스 건강보험회사
(Tufts Health Plan)에서 언론 홍보 담당 및 회장 직속 비서로 근무했니다. 테크놀로지 회사에서 일했을 때보다 훨씬 더 여유롭고 상사와의 관계도 원만했지만, 그 사이 결혼을 한 자녀들이 아이를 낳자 손주 돌보는 일을 돕고 싶어서 시간의 제약을 덜 받는 교육계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선생님이 아니라 써드베리 공립학교에서 정부 교육 프로그램 개발 연구비를 관리하는 행정일을 맡아 또 8년 간 일했다고 합니다. 행정직에서 은퇴한 후 자주 가는 동네 헬스클럽에 붙어 있던 SOAR55 광고를 우연히 본 바바라씨는
프래밍험(Framingham) 유치원 및 초등학교에서 선생님 자원봉사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담임 선생님들을 도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보조 선생님 일을 한 지 벌써 4년입니다.

비원어민들의 영어 선생님 일 역시
신문 광고를 보고 우연히 지원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바바라씨는 현재 앞서 말씀드린대로 오두막 커뮤니티 이사, 써드베리 지역사회 여성 투표자들의 모임 언론 홍보 담당자, 써드베리 정원 클럽 이사, 그리고 할머니로서의 역할을 모두 소화해내고 있습니다.

원더우먼의 비결

학생 역할, 연구자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일주일이 휙 지나가는 제 눈에 바바라씨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원더우먼 같았습니다. 화요일, 금요일에는 유치원생 및 초등학생 보조 선생님 일을 하고, 수요일에는 정원 클럽 이사회 모임을 갖고, 5월부터 10월, 날씨가 따뜻할 때는 거의 매 주말마다 메인 오두막집에 올라가서 이사회 일을 봅니다. 월요일과 목요일은
중국인 커플과 한국인 한 분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지역사회 여성 투표자들의 모임은 한 달에 한 두 번 날을 잡아 모이지만 언론 홍보 담당이기 때문에 이메일과 전화로도 일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서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바바라씨는 현재 하는 이 모든 일을 사회에 환원하는 마음으로, 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즐기는 마음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심적, 육체적 부담을 주는 일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기쁘게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바바라씨가 하는 일 중 대부분은 바바라씨의 눈 앞에 우연히 나타났습니다. 바바라씨의 표현을 빌면 “품 안에 굴러들어온 (fell into my lap)”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다니던 헬스클럽에 붙어 있는 광고를 보고 유치원생, 초등학생 보조 국어 선생님 일을 시작했고, 신문에서 우연히 본 광고를 통해서 비원어민 영어 선생님 일도 시작했습니다.

자원봉사 기회가 도처에 있고 사람들은 그 기회 중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 일을 시작한다는 것. 사회 자체에 녹아있는 자원봉사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바탕이 되었기에 “품 안에 굴러들어오는”, 혹은 우연히 발견하는  자원봉사 일거리가 많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사회에도 자원봉사 일거리에 목말라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 않을까, 바바라씨처럼 자신이 그동안 해온 일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에 즐기면서 환원할 수 있는 길을 찾으시는 분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공급은 많은데 공급과 수요를 연결해주는 기회가 드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이 필요한 비영리단체 혹은 지역사회단체들이 인생의 세 번째 장을 사시는 분들이 주로 다니는 취미생활 단체, 친목모임 장소 등에 자원봉사 일거리를 홍보한다면 마음이 맞고 시간이 맞는 분들이 찾아오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다양한 일을 하는 바바라씨이지만 이 분에게도 특별히 마음을 두고 하는 한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바바라씨의 표현을 빌리면 일을 할 때마다 “정말 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일입니다. 어린 친구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삶에 부대끼고 돈 버는 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기르는 보람과 가르치는 즐거움을 잘 느끼지 못하며 긴장 상태에서 산 것 같은데, 할머니가 되어서 손주를 키우는 일과 유치원생,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스트레스를 덜 받고 여유롭게 즐기면서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린 생명 하나하나를 대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이며, 주의를 다해야하는 일인지를 이제야 느낀다고 하셨습니다.  바바라씨의 도움으로 작문과 독해가 좋아졌다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아이들을 보면 어린 친구들을 가르치는 일은 그들의 삶에 큰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며, 그러하기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일임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큰 부담감과 책임감을 안겨주는 일이기도 하지만, 자신에게는 가장 자연스럽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마음을 다해 하는 일이기 때문에 SOAR55에서 매해 실행하는 자원봉사자 활동 평가에서도 줄곧 최고점수를 받는 것 같다며 웃으셨습니다.

바바라씨의 냉장고에는 지난 해 가르친 유치원 학생 네 명과 초등학교 일학년생 대여섯 명이 학년 말에 바바라씨에게 쓴 감사 편지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훼이 (바바라씨의 성) 선생님 감사합니다!’, ‘훼이 선생님 사랑해요!’, ‘훼이 선생님 덕에 글을 더 잘 쓰게 되었어요!’, ‘선생님 정말 보고 싶을 거예요!’. 꼬불꼬불 아이들이 쓴 카드를 손에 들고 바바라씨는 환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_1C|1350881601.jpg|width=”400″ height=”225″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_##]바바라씨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각기 다른 성격과 성향을 가진 아이들을 각자에게 맞는 교육 방법으로 다가간다는 점에서 퍼즐을 푸는 일이기도 하고, 쉽게 다칠 수 있는 아이들을 조심조심 다룬다는 점에서는 갓 딴 토마토를 떨어지지 않게 두 손으로 받쳐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또, 아이들을 하나하나 이끌어준다는 점에서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일이며, 무엇보다 조용한 호숫가에서 배를 타는 듯한 평화로움을 주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자원봉사로 하는 보조 국어 선생님 일은 바바라씨에게 마음 깊은 평화와 보람을 느끼게 해주며, 아이들은 바바라씨의 도움으로 조금 더 잘 읽고 조금 더 잘 쓰게 됩니다. 그렇게 바바라씨와 아이들은 서로 조금씩 영향을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또 어떠한 일을 하고 싶냐고 물으니 바바라씨는 “거창한 미래 계획은 없어요. 또 뭔가 품 안에 굴러 들어오는 것이 있겠지요. 늘 그랬던 것처럼요. 그 중에서 마음이 가는 일을 하면 되는 거겠죠?” 라며 밝게 웃습니다.


● 용어설명 (more 클릭)

[#M_ more.. | less.. | * 메인(Maine)주 오두막 커뮤니티 (Cottage community):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 지역 주민들은 피서철에 메인 주를 많이 방문합니다. 보스턴, 뉴욕 등 대도시에서 비교적 가깝고 산도 좋고 물도 좋은 지역이라 여름 휴양지로 각광받습니다.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찾는 사람이 적고, 날씨가 좋은 6월부터 9월 정도가 가장 붐비는 시기입니다. 많은 커플과 가족들이 짧거나 긴 휴가를 얻어서 메인 주에 가서 시간을 보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름 두세 달을 아예 메인 주에서 보내기도 합니다. 1년에 3개월 정도 메인 주에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호텔의 경우 숙박비가 많이 들고, 하계절 휴양지이다보니 별장을 구입해도 일년 내내 관리가 어려워 많은 사람들이 오두막 커뮤니티에 속해 있는 별장을 구입하거나 빌립니다. 경관 좋은 해변가나 호수, 혹은 숲 속에 예쁘게 오두막집을 지어놓고 옹기종기 모여서 여름을 보냅니다. 주인이 직접 와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본인이 이용하지 않을 때는 원하는 사람들에게 빌려주기도 합니다. 바바라 씨가 이사를 맡고 있는 써머 빌리지(Summer Village) 오두막 커뮤니티에는 247 가구가 있습니다. 이 커뮤니티에서는 5월 1일에서 10월 1일까지 사람들이 지내며, 나머지 기간에는 문을 닫습니다.
http://www.summervillagewestford.com

* 비원어민 영어교사: ESL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혹은 EFL (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teacher.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입니다. 십년 전까지만 해도 ESL teacher라고 불렸는데,이제는 영어가 두번째 언어가 아니라 세번째, 네번째 언어인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EFL teacher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 써드베리 지역사회 여성 투표자들의 모임: League of Women Voters of Sudbury. 지역사회 시민단체 모임 중 하나로 지역사회 정책 개발 및 지역 주민을 대변하는 일을 합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일 중 하나는 지역사회 문화재 보호입니다.
http://sudburyleague.com/index.html

* 써드베리 정원 클럽: Sudbury Garden Club. 정원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정원 일 관련 정보 공유와 체험 외에도 자연 보호 활동에 힘쓰고 있습니다. http://www.sudburygardenclub.org/index.htm
_M#]


 

[##_1L|1372875685.jpg|width=”87″ height=”70″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_##]김나정은 영국 런던 정경대에서 조직사회심리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미국 보스턴 컬리지 경영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일터에서 다양한 종류의 변화를 겪는 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박사 논문 주제로 은퇴기 사람들의 새터 적응기 및 정체성 변화를 살펴보고 있다.  najung.kim@bc.edu


● 연재목록
1.
세 번째 장을 사는 사람들
2. 인생의 의미, 한 문장으로 간추리면       
3.
낯선 자신이 두려운 시니어에게 
4.
어떤 자원봉사 자리 찾아드릴까요?
5.
나이에도 종류가 있다  
6.
탱글우드의 시니어는 왜 즐거운가
7. 자원봉사 상담사 로라 씨의 다섯 가지 질문 
8.
“일이 품 안에 굴러들어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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