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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만난 희망
2009년 12월 30일(수)~2010년 1월 1일(금)? 2박3일간의 지리산 산행을 마치며

1월 1일 새해가 시작되는 특별한 날, 나는 매년 일기를 쓰며 새로운 다짐을 하곤 했다. 적어도 20대까지는. 하지만 성인이 되고 결혼한 이후 통과의례처럼 해왔던 그런 습관은 없어졌다. 특별히 계획 세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직장에선 세워진 계획대로 일하면 그만이고, 가정에서는 시댁이다 친정이다 인사 다니고 아이들 키우느라 바쁘니, 삶이란 것이 특별할 것도 없는 밋밋한 생활의 반복일 뿐이었다. 새해 해돋이를 보면 뭐가 달라지나? 해돋이를 보겠다며 밀물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사람들의 행렬도 그리 좋아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냉소적인 나의 인생이 어느덧 15년이 지나 40대 중년이 되었다. 일상에 바쁘고 찌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언젠가부터 가슴이 헛헛하고 답답함을 느낀다. 그러다 갑자기 찾아온 희망제작소의 메일을 우연히 열어보고는 지리산에서의 해돋이를 아무런 망설임 없이 신청하게 된 것이다. 행운은 그렇게 갑자기 그리고 우연히 찾아오는 것일까? 다만 난 그걸 잡았을 뿐인데…


2009년의 마지막 저녁놀

촛대봉에 올라 첩첩산중 백두대간의 모습을 바라본다. 일출 뿐 아니라 전날 세석산장에 도착하면서 본 저녁노을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학창시절 학교동산에 올라 노을을 바라보며 성스러움마저 느끼곤 했는데, 지리산의 노을이 그랬다. 그리고 아침 해가 밝아오는 그 주변의 모습이 그랬다. 인간은 왜 산에 오르는 것일까? 정작 지리산 기슭에 사는 식당 아주머니와 할머니는 지리산에 한 번도 간적이 없다면서 우리가 왜 그 추운날 고생을 하며 산에 오르려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하셨다. 글쎄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 오히려 63빌딩에 가본 적이 없듯 늘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의 특별함을 모르나보다.


지리산의 신갈나무 숲

높이 솟은 산은 하늘과 가깝고 그래서 더 영험하게 느껴진다. 예부터 산은 신령님이 사는 곳으로 여겨졌고 숭배의 대상이었다. 산은 존재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 신성을 내뿜으며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도시에서 바쁘게 일에 파묻혀 살 때는 그걸 몰랐다. 산은 오르기 힘든 곳이고 쉬는 날 차라리 집에서 잠을 자거나 쇼핑을 하는 것이 내겐 더 편했으니깐. 산의 소중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직장을 그만두고 ‘문화해설사’라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주로 유적지나 문화재를 설명하는 일이지만 지역에 관련된 설화와 이야기들을 찾아보면서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살았던 과거 선조들의 삶에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무지와 무관심으로 편리한 것과 쉬운 것을 찾아다녔던 나의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다.

지리산은 그렇게 내게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해준 산이기도 하다. 20여년 만에 처음 본 일출의 모습은, 그걸 보기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지리산 해돋이(2010. 1. 1. 촛대봉에서)

예수는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고 하였다. 찬란히 떠오르는 태양은 어둠과 먹구름을 물리치고 빛을 발했다. 역시 빛의 힘이 세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예수가 말하지 않은 다른 것들이 생각났다. 빛은 어둠을 이길 수 있다지만 따뜻함이 과연 차가움을 이길 수 있을까? 부드러움이 딱딱함을 이길 수 있을까? 우리사회의 차갑고 냉소적이고 딱딱하고 고집스런 것들은 더 강해 보인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기는 힘든 세상이지 않던가! 이긴다 하더라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이 문제다. 너무나 요원한 것이다.

동상에 걸린 일행을 돕는 모습

하지만 산에 오르다 동상 증세를 보인 한 사람을 위해 서로가 가진 것을 꺼내 도와주는 과정에서 따뜻함이 차가움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버너를 켜서 손을 녹여주고 따뜻한 옷을 입혀주고 가방을 나누어 짊어지며 동상은 금세 나아졌다. 힘든 산행일수록 서로 도와가며 나눔의 소중함을 체험한다고 한다. 먼저 산장에 도착했다고 일부러 내려와서 가방을 들어주시고, 나중에 도착한 사람들을 위해 먹을 것을 나눠주시던 그분들의 따뜻한 정이 없었다면 이 산행이 온전히 희망의 산행일 수 있었을까? 그밖에도 아침저녁으로 몸을 풀 수 있도록 요가를 가르쳐 주신 요가 선생님, 시와 노래로서 즐거움을 선사해준 시인, 애교로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주신 아줌마들, 끝까지 산행의 안전을 책임져준 구조대원들…? 평범한 한사람 한사람이 각자 자기 것을 나누고 상대방을 배려하였기에 이번 산행은 낯선 사람이 만났어도 결코 낯설지 않은 희망의 불씨를 발견하는 산행이 될 수 있었다. 이는 내게 일출을 본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1년을 살 수 있다면 내겐 그 어떤 여행보다도 값진 여행으로 기억될 것이다.

글 : 최선경(여성문화유산해설/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