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에게 ‘성찰’이 필요한 이유

희망제작소는 2009년을 맞아 진보와 보수를 넘어 행동하는 우리시대 공공리더들이 전망을 나누는 강연회를 마련했습니다. 어느 때보다 험난한 길이 예고되고 있는 2009년 신년에 한국사회의 근원적인 성찰과 물음,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모색하는 취지에서 여는 신년강연회입니다. 『희망의 길을 찾다』그 첫 번째 강연자는 신영복 교수입니다. 1월 8일 희망제작소 희망모울에서 열린 이번 강연회에서 신영복 교수는 ‘성찰과 소통’을 주제로 강연했습니다. 오는 16일(금)에는 5년간 진행했던 생명평화탁발순례를 최근 마친 도법스님의 ‘길에서 만난 생명과 평화’ 강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_1C|1300600686.jpg|width=”500″ height=”333″ alt=”?”|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8일 저녁 서울 종로구 수송동 희망제작소에서 ‘성찰과 희망’을 주제로 신년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 희망제작소_##]

2009년 여전히 거리에서는 해직 교사들이 생이별한 아이들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고 해직 기자들은 찬바람 속에 ‘낙하산 반대’를 외치고 있다. 또 정부의 대운하 음모를 폭로한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원은 징계를 받았다.

이명박 정부는 경제를 살린다며 한 손으로는 비정규직 확대와 최저임금 삭감안을 만지작거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1% 강부자를 위해 종합부동산세를 비롯한 대규모 감세 선물을 안겨줬다. 마스크를 쓰고는 시위를 할 수 없고 국가 권력이 개인의 휴대전화와 인터넷 사용 내역을 맘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황당 시추에이션’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여론의 독과점을 불러올 특정 신문과 재벌의 방송 진출도 머지않아 보이는 긴박한 상황이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뭐냐고 묻는다면? ‘싸움’이라는 답이 나오기 쉽다. 때문에 요 며칠 민주주의와 인권을 후퇴시키고 민생을 파탄 낼 정부의 ‘삽질’을 막아내기 위한 싸움이 치열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같은 물음에 다른 답을 내놨다. 지난 8일 저녁 7시 희망제작소에서 마련한 신년 특별 강연에서 그는 ‘싸움의 시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시나 ‘성찰’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사안을 놓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마당 한가운데 앉아 자신을 부단히 바꾸기 위한 ‘성찰’을 하라니, 현실에 바로 적용할 날 선 비판과 현실적 대안을 기대했다면 한숨이 터져 나올 수도 있겠다.

[##_1L|1194256899.jpg|width=”250″ height=”350″ alt=”?”|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 희망제작소_##]

‘싸움의 시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찰’

신영복 교수는 정말 현실엔 무관심한 ‘성찰의 전도사’인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신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현재 우리 사회의 진보의 실패 원인과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직접적이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지는 않았지만 행간의 함의는 그렇게 읽혔다. 민주화 세력이 2번 집권했지만 대중들은 먹고살기 힘들다며 독재정권의 향수에 빠지는 등 역풍이 부는 상황에서 기존의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직접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현실에 맞는 해법을 찾는 것을 각자의 몫으로 남겼다. 무엇보다 사회를 개혁하는 일, 그리고 그 전제가 되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바꾸고 나아가 우리 사회를 바꾸어 가는 것은 대단히 긴 여정입니다. 예전에 정치권력을 획득하면 단기간에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던 후배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면 모두 실패하지 않았나요.

세계적으로도 가장 강력했던 정치권력이 나치와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는데 모두 사회를 바꾸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단 한 번의 개혁으로는 되돌릴 수 없는 사회변화를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조금씩 조정하면서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신 교수는 조급증을 버릴 것을 주문했다. 그는 긴 여정을 나서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념’이 아니라 ‘양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1960년대 학생 운동을 할 때 친구들과 함께 ‘좋은 실천가’의 덕목을 정해 봤습니다. 진보적 사상을 가질 것, 사명감을 가질 것, 조직력과 설득력이 있을 것 등이 꼽혔는데 이런 능력을 갖춘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이 친구들이 뭘 하고 있을까 많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출소 후 수소문해 봤는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친구들이 없었습니다. 다들 다른 분야에 가서 돈도 벌고 출세를 했더군요. 그 자리에 남아있는 친구들은 예전에는 별 볼일 없어 보였던 친구들, 이념적 결단이 아니라 고생하는 친구들 보기 미안해서, 돕지 않으면 양심에 거슬려서 함께 했던 친구들이었습니다.”

이런 양심을 내면에 품기 위한 방법으로 신 교수가 제시한 것이 바로 ‘성찰’이다. 이를 통해 진보운동의 패러다임을 당장의 성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계속 갈 수 있는 끈기 있는 모습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기나 긴 변혁의 길,이념 아니라 양심 있어야

신 교수는 특히 성찰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만남과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는 감옥에서 보낸 20년의 세월 동안 탈근대의 과정을 다 겪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동료 수감자들을 대상화, 타자화해서 관찰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의 이야기를 좀 듣고 나서는 ‘아, 나도 그런 부모를 만났으면 저렇게 범죄를 저질렀을 수도 있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공존과 이해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목공장에서 나이 많은 목수가 집을 그리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그 목수는 나와는 반대로 주춧돌부터, 그러니까 집을 짓는 순서대로 그리더군요. 집을 책에서만 본 나 같은 사람은 지붕부터 그리는데 직접 노동을 통해 집을 지어본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본 후 나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는 통렬한 자기 반성을 하게 됐습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차이를 경험하고 나를 변화시키는 단계까지 나아간 것이죠.”

신 교수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차이’를 인정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반가운 기회로 맞이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들뢰즈를 인용하고 똘레랑스(관용)의 한계도 명확히 지적했다.

“똘레랑스에는 강자의 자기동일성 논리가 숨어 있습니다. 소수를 존중하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강자의 논리에 흡수될 것이라는 오만이 스며 있는 것입니다. 차이를 만나면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단히 변화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들뢰즈는 ‘소수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자기 것을 영토화하고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과감히 자기 것을 버릴 수 있는 유목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반성과 변화가 없으면 세상을 바꾸어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판을 잘 하지 않는 신영복 교수지만 진보진영에 대한 비판에도 날을 세웠다. “운동단체들도 차이와 다양성을 승인하지 않고 흡수와 지배를 통해 자기 동일성을 관철하려고만 합니다. 촛불 집회 때도 그랬죠. 촛불을 든 많은 사람들은 하나하나가 자신의 다양한 목소리를 발하고 있는데 운동단체들은 촛불의 성과를 단체의 조직을 키우는 데 퍼담을 수 없을까를 고민했습니다. 저는 운동단체들을 만나면 하방연대(下方連帶)하라고 강조합니다. 정규직은 비정규직과, 남성은 여성과, 노동자는 농민과, 즉 자신보다 약한 상대와 연대하는 것이 힘을 키우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강자와는 연대가 아니라 추종이고 복속일 뿐이죠.”

“누구는 이끌고 누구는 따라가는 옛날 방식”

신 교수는 소수의 차이를 변화의 기회로 삼기보다 차이를 흡수하고 지배하려는 세불리기는 낡은 ‘웹1.0 시대’의 방식이라며 새로운 행동론으로 ‘여럿이 함께’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누구는 기획하고 이끌고 누구는 뒤에 따라가는 방식은 옛날 방식입니다. 함께 가면 길은 나중에 뒤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게 웹 2.0시대에 맞는 사고입니다. 누가 지시해서가 아니라 같이 고민하면서 가는 것이죠.

그리고 먼 길 가는 사람은 목표의 정당성이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과정의 아름다움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동력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빛나는 성과를 기대하며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걷는 것 자체에서 기쁨을 느껴야 하는 것이죠. ‘길’은 무작정 속도를 내서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도로’가 아닙니다. 길에서는 사람을 만나고 자기의 흔적도 남겨야 하고 코스모스도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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