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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숙의 낮은 목소리

그래도 가을이라고 몇 사람이 모여 앉아 소주잔을 기울입니다. 금융 위기는 너무 깊은 병과 같아 오히려 제쳐놓고, 국정감사 자리에서 성질 자랑을 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얘기를 합니다. “사과한답시고 텔레비전에 나온 거 봤어? 그게 사과하는 거야?” “누가 아니래! 고개도 숙이지 않고 무슨 사과야?” “왜, 숙이긴 숙였지.” “이 사람아, 그게 숙인 거야? 고개를 숙인다고 하려면 지난 주에 일본 사이제리아 사람들 하던 만큼은 해야지!”

사이제리아는 중국 냉동피자를 팔던 일본 패밀리레스토랑 체인입니다. 냉동피자에서 멜라민이 발견되었다는 뉴스화면에서 허리를 반으로 꺾어 사죄하는 사이제리아의 고위직들을 보았습니다. 영수증이 없는 사람도 그 피자를 먹었다고만 하면 보상하겠다고 하는 게, 허리의 각도만큼이나 놀라웠습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인사법이 다르니 단순비교는 무리가 있지만, 유 장관의 태도를 보고 “진솔하게 사과”한다고 느낀 사람은 한나라당의 허태열 최고위원뿐인 듯합니다.

겨우 몇 마디에 잔 비우는 속도가 빨라져 ‘처음처럼’의 바닥이 곧 보일 것 같습니다. ‘처음처럼’은 이름도 좋지만 병에 쓰여 있는 신영복 선생의 글씨가 정겹습니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20년 20일을 복역하다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한 선생은 이제 성공회대 사회학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선생의 서화집 ‘처음처럼’엔 같은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유 장관의 ‘처음’은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1974년 MBC 공채탤런트 6기로 연기생활을 시작, 장수드라마 ‘전원일기’에서 김 회장의 믿음직한 둘째 아들 역을 맡아 20여 년간 인기를 누렸고, 1989년에는 현대그룹을 다룬 KBS 2TV의 드라마 ‘야망의 세월’에서 이명박씨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맺은 인연으로 이씨가 서울시장 시절 서울문화재단의 첫 대표이사로 임명되었고, 작년 대통령 선거 때는 한나라당 후보 문화예술정책위원회 위원장 직무대행으로 일했습니다.

유씨가 장관이 된 후 오래지 않아 광화문 교보빌딩 1층의 식당 겸 카페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잘 생긴 외모에 부자이고 장관까지 되어서 그런지 들어설 때부터 몸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동석했던 친구가 “장관이 근무시간 중에 이런 곳에 와 노닥이다니…” 하고 툴툴대기에, “노닥이는 게 아닐 수도 있지” 하고 도닥여주었습니다. 여러 해 전 미국시민이 된 친구는 “근무시간 중에 이런 곳에 와 있다는 것 자체가 납세자의 돈을 낭비하는 거”라며 열을 냈습니다.



”?”

정의감, 공분(公憤), 애국심에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친구가 모국에서 얼마나 많은 좌절을 겪고 미국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아는지라, 더는 뭐라 못하고 속으로만 안타까웠습니다. 저도 비슷한 이유로 이민 수속을 밟은 적이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분노를 일으키는 일이 너무 많아, 떠나자, 멀리 가서 보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생각했지만 결국은 용기 부족으로 떠나지 못했습니다. 대신, 이곳에 살기 위해 두 가지를 기억하기로 했습니다. “지나친 애국은 몸에 해롭다”와 “모든 이에게서 배우자”입니다.

“지나친 애국”은 나라를 위해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이지만 제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에 마음을 쓰며 속을 끓이는 일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농민에게 가야 할 쌀 직불금을 가로챈 사람들로부터 가로챈 돈의 10배 혹은 100배를 받아내어 그동안 피해본 농부들에게 돌려주고, 직불금을 가로챈 사람들 중 공직자들을 가려내어 더 큰 벌을 내려야 하는데, 하는 따위 생각으로 밤잠을 설치거나 소화불량에 걸리는 것이지요.

“모든 이에게서 배우자”는 세상 모든 사람은 ‘교사’ 아니면 ‘반면교사’라는 걸 인식하자는 겁니다. 교사는 스스로 언행을 통해 가르치고, 반면교사는 하면 안 되는 짓을 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깨닫게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신영복 선생은 ‘교사’이고 유인촌씨는 ‘반면교사’라고 할 수 있겠지요.

평생 ‘교사’로서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교사노릇을 하다 반면교사가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교사를 하다 교사가 되는 사람도 드물지만 있습니다. 교사이던 사람이 반면교사가 되는 첩경은 정치판에 들어가는 겁니다. 세상의 부정을 바로잡겠다는 푸른 꿈으로 길을 바꿨던 학자와 유명인들이 우스운 꼬락서니로 정치무대를 벗어나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교사의 전락은 대개 처음 가졌던 마음을 잃는 데에 기인합니다. 유 장관의 첫 마음은 무엇보다 ‘품격’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운영하지 않겠다며 마지막으로 올린 글에 “품격 있는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쓰고, 문화체육관광부 홈피의 장관 인사말도 “품격 있는 문화국가”를 만드는 데 힘을 기울이겠노라고 끝맺고 있으니까요. ‘품격’을 그렇게 중시하던 사람이 장관직을 맡은 지 8개월 만에 국감장에서 막말을 하는 걸 보니 정치판의 악화 능력이 대단하긴 한가 봅니다.

인터넷에선 유 장관 퇴진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유 장관 자신도 “자리에 연연할 생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10억 원을 벌 수 있다면 감옥에서 10년을 살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청소년이 전체 청소년의 18퍼센트를 차지하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문화장관으로서 유씨가 해야 할 일은 우선 묵묵히 자신의 처음을 돌이켜보며 140억 원을 가진 자신이 이런 문화를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신영복 선생의 ‘처음처럼’을 읽으면 도움이 되겠지요.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유 장관을 비난하는 수많은 사람들도 이참에 한번 돌이켜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누구인지, 교사인지 반면교사인지, 내 처음은 무엇이었는지. 마침내 ‘처음처럼’이 바닥났습니다. 그만 일어서야겠습니다. 제 처음을 찾고 싶습니다.

* 이 칼럼은 자유칼럼에 함께 게재합니다.

코리아타임스와 연합통신 (현재의 YTN) 국제국 기자로 15년,
주한 미국대사관 문화과 전문위원으로 4년여를 보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글을 쓴다.
현재 코리아타임스, 자유칼럼, 한국일보에 칼럼을 연재중이다.
저서로 “그대를 부르고 나면 언제나 목이 마르고”와 “시선”이 있고, 10여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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