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준] 촛불 단체 낙인 거두라

박명준의 유럽에서의 사색

정책생산의 다원화와 성숙을 위하여

촛불집회에 대한 현정부의 피해의식은 이대로라면 정권임기가 끝날 때까지 국정의 분위기를 지배할 것처럼 보인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부의 신경질적인 태도의 여과없는 표출은 궁극에 우리 사회의 퇴행을 자초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대표적인 모습이 ‘촛불단체들’에 대하여 일체의 지원금을 끊는 정책이다. 명목은 불법시위를 조장하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 단체에 대한 응징이라지만, 궁극에는 현정권의 비판세력에 대해 물적 기반의 씨를 말리겠다는 옹졸한 견제조치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사회운동을 배경으로 하는 한 연구소를 알고 있다. 정부연구소도, 재벌기업 산하 연구기관도 아니며, 대학에 속해 있지도 않은 곳이지만, 훌륭한 연구역량을 갖추어 국내외에 잘 알려진 곳이다. 최근 그 연구소의 한 연구원으로부터 암울한 소식을 접했다. 정부로부터 일체의 지원금도 끊겼고, 관련 연구부처로부터 연구수주도 얻지 못하게 되어 내핍의 시기에 돌입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득권 언론들도 가세하여 부추기고 있다. 얼마전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촛불집회에 참가하며 불법폭력 시위를 벌여, 나라를 3개월간 마비시킨 단체들이 정부에 지원금을 요청한 일은 “후안무치”라는 식의 주장을 폈다. 아무 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저 ‘촛불집회 참가단체 = 불법폭도’라는 식의 정치적 낙인을 찍고 있다.

☞ 동아일보 사설 바로가기

필자는 현 정부의 태도도, 친정부성향의 기득권 언론들의 태도도 모두 대승적이지 못하고 편협하다고 생각한다. 단기적으로는 정권을 방어하기 위한 방편일지 모르나, 거기에는 다양한 사회적 목소리를 포용하면서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는 가운데, 좋은 정책들을 만들어내는 인프라를 구축해, 정치권과 사회전체를 업그레이드키겠다는 시대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제도권 비판세력을 용납하는 것이 자신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정치적 상상력과 기획력이 부족해서일까?

정부는 선거를 통해 권력행사의 권한을 얻은 정치세력에 의해 운영되지만, 국가는 특정정권의 소유물일 수 없다. 민주사회에서 어떤 권력을 쥔 집단이 자신들의 특정한 정치이념과 이해의 실현을 위해서만 국가의 기능을 배타적으로 이용한다면, 이는 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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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입장과 지향을 지닌 정치세력이 집권할지라도, 자신들의 정권재생산을 위한 정치뿐 아니라, 정치판 자체의 성숙과 정책생산방식의 다원화를 위하여 부단히 경주해야 한다. 그 결과 정치권과 시민사회 전반의 발전,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정책지향이 상이한 집단들 모두 자신들의 지향을 세련된 학문적 수단과 연구에 힘입어 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도록 해야 한다.

공익적 기여를 목표로 한 정책참여의 기회를 누릴 권리는 시민적 기본권이다. 공익의 측면과 스팩트럼이 다양하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다양한 집단들이 자신들의 문제의식에 부합하는 공익지향적 실천을 할 기회를 부여 받았을 때, 사회전체가 고르게 발전할 수 있다.

공익지향적인 정책개발에 종사하는 여러 특정 집단들에게 연구자원은 적절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특정집단의 특수한 지향에 대한 배타적 지원을 넘어, 공익을 위해 경주하는 집단들 일체에 대한 보편적 지원을 추구해야 한다. 특정 정부의 지향에 전면적이든 부분적이든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합리적 지향성과 객관적인 연구역량을 갖췄을 경우에는 공익지향적인 정책을 연구하고 생산토록 하는 기반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독일의 정당과 이익단체들은 공익지향적인 정책을 생산하고 그것을 유통하는 역할을 하는 독자적인 재단이나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들의 역량은 가히 엄청난 수준이다. 일부는 연간 예산의 규모도 수백억 원을 넘어 천억 원을 웃돈다. 수백 명의 직원들을 고용하고 있으며, 전세계 수십 개국에 사무소를 두어 개발협력 외교정책의 일주체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들에 대한 재원의 상당한 규모는 국가로부터 제공되고 있다. 정권의 성격에 따라 지원액의 편차가 다소 발생할지언정, 모두 국가의 재원을 배분받고 그것을 통하여 다양한 정책분석, 개발, 연론화 작업을 전개한다.

대체로 국가가 정당과 시민단체를 개별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설립한 공익지향적인 재단에 대해서 지원을 하는 것이다. 국가가 주요 거점 정치사회재단들을 지원하면서, 그러한 재원이 여타 소규모 단체들에게 프로젝트 지원 형식으로 배분되는 메카니즘도 발전해 있다. 정부에서 연구수주를 주는 경우에도, 애초에 이데올로기적 스크리닝을 행하지 않는다.

촛불집회는 다양한 집단들이 특정사안에 대해 직접적으로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는 의회 외부의 장이 일시적이고 자발적으로 형성된 것을 의미했다. 거기에는 정권타도를 외쳤던 집단도 있었지만, 순수히 미국산 소고기 수입 결정과정의 정당성 결여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다수였다. 대부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라고 하는 사안에 대해 정부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비판의 수위와 촛점은 다양했다.

촛불집회 참가자들과 참가단체들을 국민과 나라를 사랑하는 진정성이 결여된, 공익적 가치의 실현을 수호하려는 충정은 조금도 지니지 못한, 음험한 폭도로 매도하는 것은 오도된 낙인이다. 불법폭도라면, 아마도 극우나 극좌 이념에 경도된 테러리스트 집단이라는 말인데, 그러한 징후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촛불집회의 주류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견을 자발적으로 표출하려는 일반시민들이었다. 일부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과 마찰은 우리 사회 전반이 지니고 있는 공론표출 방식의 제도와 문화의 미성숙의 산물이었을 뿐이다.

촛불집회에 호응했던 시민단체들과 이익집단들은 한국사회의 공론장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도화된 행위자들이다. 그들이 지닌 정책개발과 연구역량은 일부 국제적인 공론장과도 교감할 수 있는 수준을 지니고 있다. 그들을 도매금으로 불법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좋은 정책’이 만들어지고 논의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더욱이 정책개발역량이나 운영상의 치명적 결함때문이 아니라, 특정집회에 주도적으로 참가하고 특정 사안에 대해 정치적인 의사를 표출한 행위 하나만으로, 정부로부터의 지원을 차단당한다면, 이는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 침해에 해당하며, 정부가 신념에 따라 사회적 차별을 조장하는 반사회적 행태이다.
요는, 특정시기에 형성된 정치적 공간에서 취한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에 대해 불법성을 따지기 이전에, 그들의 진정성과 객관적 역량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 비판세력을 대승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포용해야 하고, 최소한 자원배분의 과정에서 공정한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제도상의 합리적 정비를 통해, 국민이 낸 세금의 혜택이 정부에 대해 이견을 갖는 지식집단들의 세련화와 성장을 위해서도 투입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그들도 보다 날카롭게 현실을 분석하고 보다 타당한 정책적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권리가 있고, 그것은 우리 사회를 이끄는 정책의 질과 공론장의 질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쪽으로 이어질 것이다.

비판적 시민사회가 공익적 정책생산의 기회를 차단당하는 것은, 풍부한 제도적, 물적 자원을 누리는 국책연구소나 재벌기업산하의 연구소에게 자연스레 기회를 편중시킴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발전시키려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정갈한 분석의 언어로 표출될 기회의 거세를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구성원들 다같이 고르게 정치경제적 기회를 누리며, 더불어 잘 살자는 이념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민주주의는 그 어느 나라에서도 완성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해당 사회 구성원들과 국가가 끊임없이 보완하고 가꾸는 노력을 하면서 완성태를 향해 발전해가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현 정부는 선거를 통하여 집권한 민주정부라는 점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자신의 권력획득의 수단이 민주주의였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획득 이후 그것의 사용도 민주주의를 진작시키는 방향으로 써야 할 의무를 지님을 의미한다.

특정 방향으로만 편향된 발전을 유도하고 정당화하는 정책의 생산과 유통만이 장려되는 사회는 질이 좋은 민주사회로 볼 수 없으며, 그러한 정책을 펴는 정부도 수준이 높다고 볼 수 없다.

글_ 박명준 (희망제작소 객원연구위원)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함께 게재했습니다.  ☞ 원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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