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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의 희망탐사 53>

이야기를 듣다보니 참 악바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인적 자원도 없는, 그리고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원주한지문화제라는 축제를 시작했고 그것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관의 지원과 돈을 물리친 채 오직 시민의 힘으로, 시민의 자원봉사로 일궈낸 축제였다.

그렇게 자리 잡은 축제는 지금은 문화관광부가 지정한 40대 축제 안에 포함됐고 한지테마파크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더 놀라운 것은 파리에서 두 차례의 파리 한지문화제를 열어 최고의 찬사를 받게 된 것이다.

앞으로 파리에 원주한지전문 숍을 내고자 하는 계획이 추진 중이다. 이들 두 악바리 여성들의 꿈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김진희 원주한지문화제 집행위원장과 이선경 기획위원장 등 과거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으로 시장과 싸우고 시의원과 따지던 이 사람들이 그 열정과 투쟁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축제를 일궈내고 원주를 한지문화도시로 바꿔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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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전 대통령이 원주의 한지를 되살렸다?

원주의 한지문화제를 탄생시킨 원인은 황당하게도 최규하 전 대통령이 제공했다. 1991년 만들어진 원주민주청년회에서 지자체가 추진하던 최규하 전 대통령의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운동은 전개하면서 원주의 전통인 한지를 발견해냈기 때문이다. 다소 길지만 그 과정을 직접 들어보자.

“아시다시피 최규하 전 대통령의 고향이 원주입니다. 그런데 1994년에 우리 지역의 시의회와 자치단체가 최 전 대통령의 생가를 복원하고 보존하는 시책을 펴는 일?벌어졌습니다. 그때 우리는 3년 동안 백지화투쟁을 했습니다.

반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습니다. 우선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은 분의 생가를 복원하는 것이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다는 점, 시민의 의견을 모으는 토론회나 공청회를 하지 않고 밀실에서 이루어졌다는 점, 80년 광주항쟁 당시 국가수반으로서 계엄을 불러오고 무고한 시민이 살상 당했는데 책임지지 않았고 나중에 광주청문회에 나오지도 않은 분을 기릴 수 없다는 점, 그리고 1943년부터 1945년까지의 행적이 불분명했는데 당시 만주국 관리였다는 점을 들어 반대했습니다.

반대운동을 할 당시 지역에서는 조상도, 지역 명사도 몰라본다고 욕을 들었습니다. 1998년 민선2기 시장선거를 하면서 그 시책을 추진한 시장이 떨어지고 새롭게 시장된 분이 생가 복원 백지화를 선언했습니다. 그 3년간의 투쟁을 거쳐 70세를 넘은 어르신들을 인터뷰하면서 지역명사가 과연 최규하 전 대통령밖에 없는지를 취재했는데 그 과정에서 한지가 원주의 큰 전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이미 최규하 기념관의 터파기를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알고 아예 거기로 이사를 해서 죽을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터를 구입한 예산의결을 한 곳이 바로 시의회였기 때문에 시의회도 감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살펴보니 모든 지역 언론들이 막대한 예산을 시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모든 언론들이 최규하 기념관 지지의 글을 써댄 배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념관 정책이 백지화된 뒤 의회감시운동, 계도지 폐지운동을 벌여 결국 계도지 지원항목을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예산을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 시의 정책을 들여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지역에 오죽 문화가 없었으면 최규하라는 인물을 기리는 정책을 내놓게 됐을까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우리 지역에는 당시 치악제라는 지역 축제 외에는 지역의 전통문화라 불릴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역사회를 조사하면서 전통문화로서의 한지를 발견해 낸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최규하 전 대통령 때문에 한지가 원주에서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좋을호, 닥나무저 – 닥나무가 좋았던 호저면, 원주가 전주보다 좋은 한지를 생산했다?
-손으로 색지를 만드는 원주의 한지 생산

한지하면 사람들은 전주를 떠올린다. 한지가 전주의 특산품이기도 하지만, 전주에서 한지를 특화시켜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지가 원주의 특산품이라고 하면 의아하게 생각할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김진희 집행위원장은 한지가 원주의 특산품이었다고 말한다.

“한지와 관련해서는 전주보다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호저면(좋을호, 닥나무저)이라는 지명이 남아있고,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보면 닥나무가 원주의 특산품이라고 나와 있긴 합니다. 그 당시 호저에 닥나무가 집중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지역 노인들의 말에 따르면 중앙선 철로를 통해 원주의 닥나무가 운반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한지는 잿물을 사용해 만들어지고, 그 잿물이 정화되지 않은 채 강으로 그대로 흘러들어간다는 이유로, 즉 공해를 유발하는 면이 있다고 하여 서양 종이가 들어오면서 이것으로 대체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원주에서는 70년대 후반에 한지공장이 거의 없어지고 두 개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 공장에서 한지는 지금도 수공업형태로 만들어지고 있다. 김진희 집행위원장은 원주의 한지가 전주의 한지와 다른 점은 수공업형태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18세기 금오신화가 전주 한지로 인쇄되었다는 것 때문에 전주한지가 유명해졌습니다. 사실 전주한지는 공장이 많고 기계화되어 있습니다. 가격은 낮아졌으나 잘 팔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주 한지 장인들에게 기계화하지 말고 손으로만 만들라고 요청했습니다. 전주는 주로 흰색 한지 이른바 화선지를 기계로 생산하고 원주는 색지를 수공업형태로 생산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지금까지도 원주의 두 군데 한지공장에서는 수록지라고 해서 손으로 한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엉터리 축제를 폐지시키고 시민의 힘으로 축제를 기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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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발견하게 된 지역의 전통문화인 한지를 살리고자 두 여성은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다. 우선 이들은 특색 없이 구색 맞추기식으로 이뤄지던 원주 지역의 축제를 손 봤다.

“한지문화제를 하기 전, 관에서 축제를 잘못하고 있다고 따졌습니다. 1995년 원주의 찰옥수수 축제를 없애라고 요구했습니다. 둔치에 원주시민들을 모아놓고 누가 큰 옥수수를 재배했나, 누가 제일 많이 먹나를 경쟁하는 것이 축제의 주프로그램이었는데, 찰옥수수가 특산물인 홍천에서 시작한 축제를 내용도 없이 따라한 것이었습니다.

또 원주를 상징하는 것이 꿩이었는데 매년 500만 원을 투입하여 꿩을 방사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꿩이 복숭아을 먹게 되면서 과수원에 피해를 입히기도 하고 방사된 꿩이 얼마 못가 죽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알고 보니 방사한 집 꿩은 눈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먹이를 잘 찾아먹지 못해서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여론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박경리 선생님께서 원주에 계시다는 이유만으로 원주시청에서 1995년도에 토지문화제를 했는데, 선생님과 사전논의도 없었고, ‘토지’와는 전혀 거리가 멀고 내용도 없는 프로그램으로 추진해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 토지문화제는 한 번 하고 없어졌습니다.”

타 지역과의 변별성이 떨어지는, 거기에 내용까지도 부실한 축제가 생기게 된 것은 별다른 준비나 기획 없이 관 주도로 축제가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이선경 원주한지문화제 기획위원장(원주시민연대 정책실장)은 한국의 축제가 1980년대 정부에서 시작한 대표적인 관 축제인 ‘국풍’에서 시작됐다고 평가한다.

“우리나라 축제의 대부분이 전두환 정부시절의 국풍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관주도로 하다보니 형식에 그치게 되고, 정부 권고에 따라 축제위원회를 구성합니다. 그런데 그 위원회의 위원들이 주로 관변인사들이고 예산이 지방정부예산이다 보니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원주한지문화제는 그런 관 주도를 탈피하려고 노력해왔다. 한지문화제는 한 해에 3억 원 정도의 예산이 드는데 시에서는 지난해 2천만 원 지원, 올해 5천만 원을 지원받고 나머지는 시민들의 후원금과 각 기업체의 후원금으로, 또 시민들의 자원봉사로 이뤄지고 있다.

처음 한지문화제를 기획했을 당시 이 두 여성은 관과는 전혀 관계없이 시민들이 주축이 되는 축제를 생각했다. 그래서 시민운동단체 내부에서 충분히 토론한 뒤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게 좋다는 판단 하에 힌지문화제위원회를 지역사회에 제안했다. 취지를 설명하고, 시민위원을 모았고, 그렇게 지역의 건강한 지식인층과 한지공장 경영자들, 관련 대학 전공자들을 대상으로 위원들을 꾸리기 시작했다.

지역사회에서 화답해주기 시작했고, 진보적인 사회단체에서도 화답해주었다. 그 결과 당시 운동권의 집합체인 전국연합의 이창복 의장이 위원장을 맡았고, 지역사회에서 한지문화제의 추진계획에 대한 설명회를 가졌다.

벽에 부딪힌다는 느낌을 여러 번 가졌지만 이런 공론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여론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원주의 특산품이 한지라는 것도 공유할 수 있었다. 이창복 위원장이 문화관광부를 무작정 찾아가 지원결정을 받아냈고, 원주 출신인 김영진 국회의원도 찾아가 후원회장을 맡겼다.

김영진 의원과는 최규하 전 대통령의 생가 복원을 둘러싸고 싸움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한지문화제 후원을 부탁하자 시에도 요청하고 기업에도 이야기해서 예산을 따내는 데 공을 들였다고 한다. 시민위원들은 첫해부터 50만 원씩 후원금을 냈고, 지역 대학에서도 사업비를 따내 한지문화제를 열 수 있었다.

세 가지 이벤트로 첫 한지문화제를 성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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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여는 한지문화제. 홍보도 잘 안되고 원주와 한지와의 관련성을 잘 모르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축제인 만큼 여러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안감이 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즉 축제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3가지 이벤트를 기획했다.

“첫 해이다보니 이벤트를 할 필요가 있겠다고 해서 한지로 패션쇼를 하기로 했습니다. 연출과 모델이 필요하다고 해서 무조건 당시 원주사람이 운영하는 패션모델회사 모델라인으로 찾아갔습니다. 이재연 대표님 입장에서는 황당하지만 원주사람이니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두 대학의 의상과 학생들도 참여하도록 요청했습니다.

당시로서는 한지로 패션쇼로 한다는 것이 상상이 안 되었기 때문에 주목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한지패션쇼를 아리랑TV에 중계되었는데 우리가 협찬을 붙였습니다. 48개국 이상에 방영되는 것이어서 현대증권으로부터 5천만 원의 협찬금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생각이 나면 무조건 실행하고 도전하는 스타일입니다. 또 하나 시민들이 참여하는 축제가 중요하다고 보아 한지공예품도 만들고 한지를 뜨기도 하면서 한지를 경험하고 느끼게 했습니다.

세 번째는 이것을 어떻게 홍보할까 하다가 이창복 위원장님이 스크린쿼터 공동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 알게 된 영화인 안성기, 명계남, 강수연, 김윤진씨 등을 불러 시민들과 함께 다양한 한지문화를 체험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조직된 축제는 지역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생각보다 관람객이 많았습니다. 첫해를 성공적으로 치렀던 것이죠.”

체험객, 부스 업체로부터 돈 받는 축제

세 가지 이벤트도 이벤트였지만, 첫 해의 원주한지문화제를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시민들의 자원봉사와 자발적인 참여로 가능한 축제를 기획했다는 데 있다.

시에서 모든 예산을 지원해주는 축제는 아무래도 전시행정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원주한지문화제는 이런 부분을 배제하고, 참여하는 시민들과 부스에 들어온 한지업체들로부터 참가비용을 받는 방식으로 축제를 기획했다. 또 어느 지역 축제장에서나 빠지지 않는 포장마차를 완전히 배제했다.

“처음에는 원주시와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지 고민이었습니다. 행정적인 편의는 받지만 직접 예산은 받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다른 축제는 모두 시로부터 돈을 받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시공무원들도 위원으로 참여시켜 돈을 받았습니다.

체험프로그램도 공짜로 하지 않고 돈을 받았는데 체험객으로부터 받은 것만 6000만 원에 이릅니다. 1000원씩만 해도 6만 명이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우리 축제에는 한지 관련업체들만 받고 그 부스 시설비를 받습니다. 다른 축제에서는 오히려 부스마다 돈을 주는데 우리는 반대로 했던 것입니다. 또 우리는 먹거리를 완전히 배제했습니다.

포장마차 없이도 이제는 30만 명을 모아낸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공연도 지역사회에서 보지 못했던 신진세력들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그야말로 한지라는 테마에 충실하자는 식으로 문화제를 기획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세운 원칙과 그에 따른 축제 기획은 적중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산은 부족했다. 부족한 예산을 아끼기 위해 시민들의 자원봉사를 독려해 대학생, 주부, 한지공예하는 사람들, 중고생까지 1500명 정도의 자원봉사자들이 한지문화제에서 함께 일을 했다.

한 시민단체 악바리 여성들이 일궈낸 국내외적 성과

원주한지 ISO 9001, 프랑스국립도서관 영인본 한지 납품, 한국공업진흥청 원주한지 품질인증, 파리한지문화제 개최, 원주 한지 문화제 개최, 청와대 대통령 장관 임명장 납품, 원주한지공예관 운영, 한지테마파크 건립, 대한민국 한지대전 개최, 2010년 IAPMA(국제종이조형작가협회) 원주총회 개최.

이들은 지금까지 이런 성과를 이루어냈다. 한지라는 특성화된 지역문화로 일궈낸 성과치고는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성과를 기반으로 한지문화제위원회는 한지대학을 설립해 한지 디자인, 상품개발, 전통공예의 계승, 국제문화경쟁력 강화 등을 목표로 학생들을 육성시키려 하고 있다.

또 하나 이들에게는 한지문화를 국제사회에 알려야겠다는 목표가 있다. 한지를 국제사회에 알려서 한지를 팔자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기획된 것이 파리한지문화제이다.

“우리 축제에 관심을 가졌던 주철기 대사가 프랑스 대사로 나갔습니다. 파리에서도 한번 해보자고 그 분이 제안하여 와보라고 초청하더군요. 우리도 겁 없이 검토해보자고 했습니다. 결국 백방으로 노력해서 4억5000만 원의 돈을 들여 아끌리마따시옹 공원에서 한 달 동안 한지패션쇼 등 원주의 한지문화제를 그대로 재현했습니다.

그 당시 퐁피두센터, 오르세 미술관에 우리 팸플릿이 떨어졌는지를 수시로 가보기도 했습니다. 이런 열정이 한불수교 120주년 행사로서 최고의 평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꿈은 파리에 원주한지숍을 하나 내는 것입니다.

한지문화제는 프랑스 국영TV등에서 헤드라인으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이를 기화로 한지가 외국에 많이 알려지고 여러 국제교류의 기회가 생겼습니다. 2006년에는 문광부에서 1억 원을 지원받고 우리가 1억 원을 마련해서 한지문화제를 다시 열었고, 그 후 스트라스부르크의 한인회가 초청해서 또 한 번 다녀왔고 그 여력으로 국제종이조각협회 2010년 원주총회를 유치하기도 했습니다.”

한지테마파크와 한지특구산업을 유치해내다

원주한지문화제는 이제 정착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지문화제로 인해 원주시는 2006년 전통 옷과 한지로 산자부로부터 한지산업특구로 지정됐다. 한지가 문화를 넘어서 산업적인 측면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두 여성은 한지문화제를 넘어서 또 다른 사업을 구상 중이다.

“축제는 어찌 보면 소모성 행사입니다. 한지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하드웨어도 필요합니다. 한지축제라는 소프트웨어에서 시작해서 1999년부터 한지테마파크를 구상했습니다.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한지산업의 진흥이 이뤄져야겠고 그 디딤돌로 테마파크를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강원도와 문광부에 요청해서 2002년에 185억 원이 들어가는 한지테마파크 건설 사업을 얻어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발품 팔아 얻어온 것인데 시장이 한지테마파크가아니라 전통테마파크로 바꾸겠다고 해서 착공이 연기되고 있습니다. 원주와 관계없는 술, 유리 등을 포함시킨다면 엉터리가 됩니다. 금년에 사업 착공하지 않으면 그 예산을 반납해야 하는데 결국 술은 절대 안 되고 유리는 포함하되 먼저 한지테마파크를 짓고 유리는 다른 공간에 짓기로 합의를 봤습니다.”

시민의 힘으로 만드는 축제. 그것은 많은 이들이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만드는 축제를 찾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축제는 여전히 관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그 현실에서 시민의 힘으로, 또 시민운동가들의 힘으로 축제가 성공적으로 벌어지고 있고, 그 축제의 성공으로 지역경제에 보탬이 되고 있다는 것은 그 희귀성만큼이나 환영할 만한 일이다.

지역사회의 축제는 당연히 지역시민들의 힘이 바탕이 될 때 그 자리를 잡을 수 있을 터. 원주한지문화제가 지역사회의 힘으로 이뤄지는 축제의 전통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을 기꺼운 마음으로 보고 싶다.

면담일시 – 2007년 8월 17일

면담인사 – 김진희(원주시민연대 대표.원주한지문화제 집행위원장)

이선경(원주시민연대 정책실장.원주한지문화제 기획위원장)

면담장소 – 강원도 원주시 원동 180-2 2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