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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② 영국의 전설, 페이비언 소사이어티  
 

이  연재를 준비하면서 아직도 주변에 페이비언 얘기를 꺼내면 “아직도 그게 있어?” 라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다. 그만큼 사회복지나 사회정책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페이비언 소사이어티(Fabian Society)는 전설에 가깝다.

19세기 말에 설립되어 20세기 초 노동당(Labour Party) 설립에 관여하고, 2차 세계대전 후 노동당 집권이 실현되면서 동시에 현실화된 복지국가 건설에 사상적,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지식인 집단. 그 120여년의 역사와 진보 정치와 정책 발전에 있어서의 중심적인 역할은 그만한 이유를 제공하고 있다.

단지 전설만이 아니다. 노동당이 12년 만에 패한 2010년 총선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노동당의 페이비언 소속 의원이 야당인 보수당과 자유민주당(Liberal Democrat) 의원을 합한 것 보다 많았다.

이런 페이비언 소사이어티를 방문해 사무관리자(Office Manager) 칼릭스 이든(Calix Eden)을 만나 인터뷰한 것은 2009년 7월 9일 이었다.

소수 보고서의 탄생

“대부분 부유한 계층이었지만 (사회를 재조직하고자 하는) 일군의 지식인들이 개인 저택에서 모임을 가지면서 (페이비언 소사이어티는) 시작되었습니다. … 독일이나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처럼 혁명적일 것인가를 두고도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점진주의적 모델을 채택하게 되었죠. 그래서 한니발에 대적해서 싸웠던 로마의 장군의 이름을 따서 페이비언이라고 스스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

초기의 페이비언들의 생각은 매우 모호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했던 일들은 방에 모여 앉아서 한 사람이 맑스나 다른 사상가의 저술을 크게 읽고 나서 그 속의 문장과 문단들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생각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베아트리스 웹(Beatrice Webb)과 같은 사람을 사회조사를 위해 파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직접 공장이나 노동자 거주 지역에 들어갔습니다.”

베아트리스 웹은 그의 남편 시드니 웹(Sidney Webb)과 함께 흔히 웹 부부(The Webbs)라고 지칭되며, 페이비언의 역사 뿐 아니라 – 페이비언의 역할이 그랬듯이 – 노동당의 역사와 영국 복지국가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초기 활동들에 의해 엄밀한 근거와 이를 위한 조사연구를 강조하는 페이비언의 전통이 수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 복지국가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헌을 만드는 기초가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소수 보고서(Minority Report)’ 였다.
                                                                                                                                                                                                                                                                    ”사용자페이비언의 주요 사상가들을 소개한 책 표지. 설립 초기부터 사용하고 있는 사무실 건물 1층은 서점으로 페이비언 출판물들을 판매했다. 많은 출판물들이 당시 큰 주목을 받아 3만부 이상 팔리는 책들도 많았다. 표지 사진 속 사람들이 페이비언의 출판물을 관심있게 보고 있다.

19세기 말 페이비언 결성 이후 맞이한 20세기는 영국 역사상 가장 불평등했던 시기로 꼽힌다. 이러한 상황 아래 런던 지역에서 높은 실업율이 계속되면서 사회불안이 높아지자 당시 보수당 정부는 1905년, 빈곤법과 빈곤구제를 다루는 왕립위원회(Royal Commission on the Poor Laws and the Relief of Distress)를 설립하였다.

당시 빈곤구제 제도의 핵심이었던 ‘빈곤법’을 포함한 국가의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 1909년까지 운영되었던 이 독립적인 위원회는 20명의 위원들로 구성되었는데 시작하자마자 다수파와 소수파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1909년 다수 보고서와 별도로 발간된 소수 보고서는 무엇보다도 빈곤의 원인은 많은 경우 노동 수요의 변화, 노령, 질병, 교육 문제 등 개인의 범위를 넘어선 구조적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빈곤 해결을 위해서는 단순 구제보다는 체계적 예방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우선 소수 보고서는 국가가 그 어떠한 국민도 그 이하로 떨어져서는 안 되는 특정한 삶의 수준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가의 서비스가 가난한 자를 따로 구분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하고, 지위와 낙인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제공되는 보편적 서비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기실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제시한 베버리지 보고서 역시 상당 부분 소수 보고서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베버리지 그 자신이 소수 보고서 작성 당시 베아트리스 웹의 연구원으로 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문헌은 수십 년 후 건설된 복지국가의 주춧돌이었던 것이다.

결국 소수 보고서도, 다수 보고서도 당시 자유당 정부에 의해서 채택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실패는 페이비언 운동에 중대한 전환점을 만들어주었다. 이로서 페이비언과 진보 지식인들은 자유당을 바꾸려는 노력보다는 노동당을 성장시키는 데 더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수정주의자의 수정

“언론 등에서 자주 나에게 전화를 걸어 어떤 사안에 대해 페이비언 소사이어티의 입장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합니다. 하지만 페이비언 소사이어티에서 가장 핵심적인 특징 중에 하나는 토론을 위한 열린 공간이란 것입니다.”

페이비언의 사무총장인 선더 카트왈라(Sunder Katwala)는 이러한 전략을 ‘수정주의자의 수정(revisionists revise)이라고 지칭한다.  페이비언은 매 정치세대마다 진보와 좌파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재사고해 왔으며, 이러한 사고의 다원성과 다양성을 통해서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영향력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페이비언의 토론은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와 같은 단기적 질문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어떻게 사회를 재조직화 할 것인가에 대한 장기적인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

초기의 페이비언 소사이어티 회원은 40명이 채 안되었다. 하지만 결성 그 다음해부터 지역 분회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현재 60 여개의 지역 소사이어티가 있다. 페이비언의 정회원은 페이비언의 취지에 동의하면 누구나 될 수 있다. 현단 노동당 가입조직으로 꼭 노동당원일 필요는 없지만, 노동당에 반대하거나 반대하고자 하는 정당의 당원은 정회원이 될 수는 없다.

페이비언의 운영은 집행위원회(Executive Committee)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매년 총회를 통해 1년 임기로 선출된 위원들과 지역대표들, 그리고 상근자 대표 1인 등 총 29명 이내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전국적이고 민주적인 조직 기반을 가진 페이비언은 전통적으로 출판, 토론, 강연 등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사용자                               페이비언 사무실 건물의 현재 모습. 과거에 서점으로 쓰였던 1층은 지금 카페에 임대해주고 있다.

1884년 페이비언 소사이어티 결성, 1900년 노동당 결성, 1909년 소수 보고서 발간,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 발간, 1945년 노동당 집권 및 이후 복지국가 건설 등 120여년의 역사 속에서 페이비언이 연관된 이러한 주요한 사건들은 그 자체가 영국의 역사였고, 영국 진보정치의 역사였다.

페이비언이라는 그 이름처럼 40명도 안 되는 이상주의자의 모임은 꾸준한 조사와 연구, 토론, 강연, 출판 등을 통해 그렇게 점진적이지만 매우 굵직한 변화를 만들어왔던 것이다.

이제 역사가 반세기를 넘고 민주주의 역사는 고작 몇 십 년 안 되는 우리나라에서 페이비언의 족적을 보면 까마득하다. 하지만 이들이 백 여년 동안 만들어온 역사를 볼 때 오히려 우리가 성급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반성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가장 시급하다고 하는 때에 정작 필요한 것은 페이비언이 처음 그랬던 것처럼 꾸준하고 점진적인 변화를 위한 준비가 아닐까. 알고 있는 것에 부족함을 깨닫고 현장에 나가 연구를 벌이고 광범위하게 토론을 조직하였던 100여 년 전 페이비언의 선택이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음을 그 때 알았을까.

”사용자







● 연재순서

1. 시대를 건져올린 영국의 낚시법
2.  영국의 전설, 페이비언 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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