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숙] 한 사람의 노래는

김흥숙의 낮은 목소리

오늘 새벽 운구차와 장의 행렬이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회관을 출발해 서울로 옵니다. 경복궁 흥례문 앞뜰 영결식장, 흰옷 입은 계단을 덮은 수천 송이 국화꽃 향내가 뜰 안을 채울 때쯤 운구차가 들어옵니다. 오전 11시에 시작하는 영결식은 1시간 후 육·해·공 3군이 쏘는 21발의 조총 소리로 끝이 납니다.

경복궁을 벗어난 운구 행렬은 세종로를 지나 서울광장에서 노제를 지낸 후 경기 수원시 영통구의 시립장례식장 연화장으로 향합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된다면 오후 3시, 아들이었고 남편이었고 아버지였으며 전직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씨는 한 줌 재로 몸을 바꿉니다. 가벼워진 몸은 다시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노 씨의 마지막 여행길은 우리 모두의 행로를 은유합니다.


[##_1C|1227602326.jpg|width=”500″ height=”320″ alt=”?”|오늘 , 당신은 온 누리의 꽃이고, 만인을 울리는 노래입니다._##]

죽음은 침묵. 그 침묵이 제게도 깃들었는지 아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입은 녹슨 지퍼처럼 단단히 닫혀 열리지 않습니다. 책을 읽을 수도 없고 글을 쓸 수도 없고 요 며칠 매스컴 덕에 반복해 들은 ‘상록수,’ 그 푸른 노랫말만 머릿속을 맴돕니다.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



결의로 가득한 김민기의 ‘상록수’는 힘든 시절을 견디게 해준 양성우 시인의 시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장준하선생님 영전에’라는 부제를 달고 발표되었던 ‘한 사람의 노래는’이 생각납니다.


“한 사람의 노래는 만 사람을 울리나니,
당신이 부르시던 그 노래를 임이시여
입을 모아 부릅니다 (중략)
오히려 담대하게
당신의 큰 이름을 뼛속에 새기며,
임이시여
당신이 부르시던 그 목소리로
억울한 노래를 소리죽여 부릅니다.
천만 번 돌에 맞고 감옥에 갇히고,
증오를 증오로 확인하기 위하여
죽은 몸 또 다시 발길에 채여도
한 사람의 노래는 만 사람을 울리나니,
이 푸른 남의 하늘 아래 우리들,
피눈물로 못다 부른 당신의 그 노래를
입을 모아 부릅니다.
임이시여.”



양 시인의 ‘靑山이 소리쳐 부르거든’은 ‘상록수’와 함께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기에 가장 알맞은 노래로 꼽혀 회자되고 있습니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기나긴 죽음의 시절,/꿈도 없이 누웠다가/이 새벽 안개 속에/떠났다고 대답하라./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흙먼지 재를 쓰고/머리 풀고 땅을 치며/나 이미 큰 강 건너/떠났다고 대답하라.”

[##_1C|1127586869.jpg|width=”500″ height=”280″ alt=”?”|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_##]

1970년대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를 비판하는 시 ‘겨울공화국’을 낭독했다는 이유로 해직된 시인은, 1980년대 김대중 씨가 이끌던 평화민주당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고 2002년엔 한나라당 국책자문위원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어느 당의 당원인지, 아니면 한때 몸담았던 정치판을 떠올리기조차 꺼려하는 시민인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제가 아는 건 다만 그의 시 몇 편은 그의 생애보다 오래 지속될 거라는 겁니다.

순간인 죽음이 긴 삶과 같은 가치를 갖는 건 정말 중요한 게 무언지 알게 해주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애를 이루는 무수한 시도들을 노래라고 하면, 죽음은 한 사람이 평생 부른 노래들 중 가장 의미 있는 걸 골라냅니다. 그것이 타인을 비루하게 하고 고통을 안긴 것일 때 망자는 죽음과 함께 참시되거나 백안시되지만, 그것이 타인을 존귀하게 하고 위로를 준 것일 때 그의 죽음은 만인의 슬픔이 되고 그의 노래는 “만 사람”의 노래가 되어 기억됩니다. 내년, 내내년 영원히 잊히지 않을 이 5월처럼.


* 이 칼럼은 자유칼럼에 함께 게재합니다.


코리아타임스와 연합통신 (현재의 YTN) 국제국 기자로 15년,
주한 미국대사관 문화과 전문위원으로 4년여를 보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글을 쓴다.
현재 코리아타임스, 자유칼럼, 한국일보에 칼럼을 연재중이다.
저서로 “그대를 부르고 나면 언제나 목이 마르고”와 “시선”이 있고, 10여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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