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누군가 내게 이번에 방문했던 일본의 NPO지원센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기관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가나가와현민서포트센터(이하 서포트센터)’를 선택할 것이다. 평소 행정기관, 공무원에 대해 유쾌한 기억보다는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던 나로선 행정이 설립하고 운영까지 한다는 서포트센터는 그리 매력적인 기관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건물 하나 크게 지어놓고 몇 가지 프로그램을 돌리는 정도겠지’ 짐작했다.

하지만 이런 선입견은 2시간 남짓 기관을 둘러보고 나올 때 쯤엔 눈 녹듯 사라졌다. 그 곳은 행정과 시민이 협력하여 만든 다양한 커뮤니티와 생동감 넘치는 삶의 이야기가 가득 찬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시민 참여로 다시 일어선 도시, 요코하마

일본방문 둘째 날.
이른 아침부터 방문단은 2개 조로 나눠, 각각 동경 내각부와 서포트센터로 향했는데, 우리 조는 서포트센터를 둘러보기 위해 요코하마행 기차를 탔다.

이른 아침 요코하마의 바람은 제법 매서웠다. 미로같이 얽혀있는 일본의 지하철은 항상 낯선 이방인을 힘들게 한다. 오늘도 지하철역에서 5분이면 갈 거리를 출구를 잘못 나오는 바람에 5명의 일행이 트렁크를 질질 끌며 20여 분을 빙글빙글 돌아 겨우 기관 앞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대로 건물 규모가 상당했다. 우리는 12층 회의실로 안내됐다. 우리를 맞은 이는 말쑥한 양복을 차려입어 전형적인 공무원 느낌이 물씬 나는 마시코 부장. 전날 만났던 일본NPO센터의 타지리 사무국장의 모습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일본의 시민사회단체를 방문할 때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깃거리가 바로 1995년 한신-아와지대지진(일명 고베 대지진)이다. 우리가 ‘일본 최대 항구도시’, ‘화려한 밤의 도시’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요코하마도 알고 보니 역사적으로 수난을 많이 겪은 도시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시가지와 항만시설 등이 모두 파괴되었고, 2차 세계대전 중인 1945년 5월에는 미국 공군의 폭력으로 시가지의 42%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고베대지진 때도 피해규모가 상당했다고 하니, 정말 한 세기 동안 숱한 고초를 겪은 비운의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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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역사적 아픔이 요코하마 시민들과 행정기관을 강하게 만들어 오늘날 요코하마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시민참여, 볼런티어 문화가 발달해 7,000여 개의 크고 작은 NPO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민관 파트너십의 모범

‘가나가와현민센터(건물 명칭임)’는 15층 규모의 큰 건물인데 오늘 우리가 방문한 서포트센터 외에도 사회복지위원회, 가나가와현 공익위원회 등의 기관이 함께 입주해 있다.

이 중 서포트센터는 건물의 6층에서 11층까지, 총 6개 층을 사용하고 있다. 원래 이 건물은 가나가와현이 행정센터로 사용했는데, 고베대지진 이후 시민참여, 볼런티어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면서 볼런티어 활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활용하자는 의도로 행정센터의 규모를 축소하고 남는 공간을 시민들의 활동과 복지를 위한 장소로 제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동사무소, 구청의 일부 공간을 주민자치센터로 활용한 사례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가나가와현민서포트센터는 1996년 4월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시민들의 자발적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센터의 가장 큰 사업은 3가지 정도로 분류되는데, 첫 번째가 회의실, 미팅룸과 같은 활동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고, 두 번째가 시민활동을 촉진하는 자금을 지원하는 것, 세 번째가 인재 육성사업인 ‘커뮤니티 컬리지’ 코스를 운영하는 것이다.

‘시민활동 지원’이라는 설립목적은 세부적인 프로그램 운영방식에도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대개 행정이 직접 설립하고 운영하는 기관의 경우 양적인 성과에만 치중해 본연의 목적을 소홀히하게 될 위험이 높다. 하지만 센터는 행정중심조직이 갖고 있는 강점과 약점을 잘 분석해 행정이 잘 할 수 있는 위의 3가지 사업에 집중하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들은 인근의 민간NPO인 ‘알리스 센터’와 협력하여 진행하고 있었다.

주로 장소제공 등 하드웨어적인 부분은 센터가 맡고 세부 프로그램이나 컨텐츠를 개발하는 일은 알리스센터가 담당하는 식으로 서로 윈-윈할 수 있도록 역할을 적절하게 구분해 놓았다. 심지어 센터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모두 공무원 신분이기 때문에 자칫 관료주의, 행정주의에 치우칠 것을 경계하여 직원 연수를 알리스 센터와 공동으로 진행한다고 하니 과연 민관파트너쉽의모범이라 칭할 만했다.

마시코 부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몇 가지 사업에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개별 NPO기관에 자금을 지원하는 사업이었다. 자금 지원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공모형방식으로 NPO들간 네트워킹 사업을 모범적으로 잘 하고 있는 곳에 2년간 25만엔을 지원하고 있는데, 올해도 4개 단체가 응모해서 2개 단체가 선정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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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된 단체들의 사업내용이 특히 흥미로웠다. 한 가지는 8개의 단체가 연합하여 어떻게 하면 단체의 사업수익을 높일 수 있을까를 함께 연구하는 공동 네트워크 구성에 관한 내용이었고, 나머지 한개는 협동오피스의 확보 및 연계에 관한 내용이었다.

행정에서 먼저 추진하는 공모형 방식과는 별도로 개별 NPO에서 ‘이러 이러한 사업을 하고 싶은데 기금이 필요하다’ 할 때 직접 신청하고 제안하는 방식으로 ‘가나가와볼런티어 활동추진21기금’이 있다. 이 기금은 ‘미래를 위한 기금’이라는 취지로 추진된 것인데, 기금 규모가 자그마치 104억 엔(약 1000억원)에 이른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시민참여와 NPO활동 지원을 위해 이런 규모의 기금을 조성했다는 것 자체가 그저 놀랍고 부러웠다.

이외에도 가나가와 현이 중심이 돼서 ‘현회의’ 라는 협동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는 현과 NPO, 기업과 NPO의 협동을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런 모임을 통해 공공과 민간, 기업 간에 서로를 이해하고 공동으로 추진할 수 있는 사업에 대해 실질적 논의가 가능해졌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일전에 ‘현회의’에서 기업의 사회공헌 자금에 관한 논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굉장히 다양한 의견들이 오갔다고 한다. 그 동안 기업쪽에서는 사회공헌사업 하면 기금제공 외에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었는데, 이 회의를 통해서 기금제공 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남는 비품을 제공하는 것 등도 민간에는 매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영역의 주체들이 모여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작은 것 하나하나까지 서로를 이해하고 실현가능한 공동사업을 논의하는 모습 또한 신선한 충격이었다.

삶의 향기 가득한 주민사랑방

마시코 부장의 안내로 센터시설들을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센터 곳곳에 배치된 소규모 NPO지원시설들이었다. 일본시민사회에서 ‘공간’이 갖는 의미는 우리네와 많이 달라 보였다. 일본에는 1인 NPO도 많고, 자기 집을 사무실로 이용하는 단체도 많기 때문에 공용 사무공간이 꼭 필요하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교통이 편리한데다가 무료로 운영되는 서포트센터는 소규모 NPO들에게 안식처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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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트센터 중앙에는 자료센터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크게 2개의 코너로 구분된다. 한쪽에는 개별 NPO들의 현황과 자료들을 정리해 놓은 클리어 파일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국내외 다양한 NPO관련 책들이 정리되어 있어 관심 있는 시민 누구나 쉽게 꺼내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현재 해피시니어팀도 NPO센터(행복발전소)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는 터라 이 모든 것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사진을 찍고 메모했다.

이어서 ‘볼런티어 살롱’에 들어섰다. 이 곳에서는 정말로 많은 시민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여성들과 시니어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다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노트북을 보며 이야기 하는 사람들, 설계도면, 연필, 자, 칼 같은 것들을 잔뜩 늘어놓고 뭔가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 도시락을 먹고 있는 사람들, 동화책을 전시해 놓고 토론하고 있는 사람들….

우리 일행은 그 중 몇 그룹에 다가가 직접 인사를 하고, 인터뷰를 시도했다. ‘니트를 만드는 할머니 모임’이라고 소개한 한 그룹에는 예닐곱의 할머니들이 있었는데 전부 자신들이 직접 손으로 짜서 만든 니트를 입고 있었다. 자신들이 하는 활동은 수익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니트 옷을 알리고 보급하기 위해서라며, 오늘은 며칠 있다가 개최될 총회모임을 준비하기 위해 회의 중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또 다른 한쪽에는 BUNKO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책상 두세 개 위에 세계 각국의 동화책을 전시해 놓고 안내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자 한국의 동화책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강렬한 색채, 살아있는 듯 꿈틀대는 그림이 인상적이라며 우리에게 직접 책 한권을 보여주었다. 바로 <팥죽할머니와 호랑이>였다. 낯선 곳에 와서 우리나라 동화책을 보니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에 우리 일행이 한 술 더 떠 전시되어 있던 책 중에 <강아지똥>을 집어 들고 한국에서는 어른들도 매우 좋아하는 책이며, 최근에는 뮤지컬로도 상영이 되었다고 알려드렸더니 매우 신기해 했다. 동화책 한권을 놓고 국적을 초월해 몸짓, 표정만으로도 교감을 이어갈 수 있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한동안 웃음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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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장으로 내려가 보니 조금 전에 설명 들었던 NPO인재육성사업, ‘커뮤니티컬리지코스’ 수업이 한창이었다. 오늘 진행된 프로그램은 고령자 개호보호사 양성 강좌였다. 일본은 이미 우리보다 앞서 개호보험이 실시되어서 관련NPO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고 이들에 대한 전문교육도 자주 실시되고 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서포트센터에서는 NPO창업이나 운영과 관련해 전문가 상담을 온라인, 오프라인 상에서 다양하게 실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금21에 선정된 단체들의 활동을 소개하는 공간을 마련하고, 외국인들을 위한 진료서비스와 통역서비스까지 실시하고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로 많은 시민들이 서포트 센터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그 숫자가 일일 평균 1,128명, 연간 40만명 이상이 된다고 한다. 그야말로 지역사랑방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 서포트센터를 나와 다음 목적지인 오사카로 향하는 신칸센에 올랐다. 몸은 무척 고단했지만 이런저런 생각들로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예전에 지역NPO에서 일할 때부터 행정이 고정된 관행을 벗어나지 못해 한계에 부딪치는 것을 많이 봐 왔기 때문에, 나로선 행정이 주체가 되어 시민센터를 운영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방문한 가나가와현민서포트센터는 내게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사실 외관만 봤을 때는 다소 딱딱하게 느껴졌는데, 그 속엔 시민들의 역동적인 커뮤니티와 다양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민사회, 시민단체란 것이 결코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는 것, 거대 담론만을 논하는 장이 아님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느끼는 문제의식, 주제들을 가지고 작은 실천을 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시민사회를 만들어가는 초석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 가슴 뿌듯한 시간이었다.

”?” <편집자 주> 해피시니어팀은 지난 2월 26일부터 5일간의 일정으로 일본 NPO지원센터 현황을 방문조사하고 돌아왔습니다. 현재 구상중인 NPO센터, ‘행복발전소’의 밑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전국의 모든 NPO들이 자유로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 행복발전소가 힘차게 가동될 그 날을 위해, 앞으로도 ‘꿈’을 잃지 않고 열심히 달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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