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리포트] 동토의 끝, 페테르부르크에 울려퍼진 아리랑

<한국청소년문화교육센터>

당신은 옆집 아이들도 행복한지 알고 계시나요?
“외할머니가 쌍둥이를 낳으셨을 때, 나라에 큰 기근이 들었다. 할머니는 딸들 중 하나라도 살리기 위해 그 중 하나를 베개로 (얼굴을) 덮기로 결심하셨다. 그 아기가 바로 우리 엄마였다. 하지만 엄마는 극적으로 살아났고 오히려 다른 쌍둥이 자매가 2달이 못 지나서 죽었다. 스탈린의 억압정책은 다른 한인들처럼 엄마네 식구를 극동에서 중앙아시아로 다시 내몰았다. 그들은 동물을 싣는 화물칸에 실려 이송되었다. 사람들은 굶주림과 역병으로 죽어갔다. 외할머니는 이송 중에 굶주림으로 돌아가셨다.”

– 남 엘라 알렉세예브나 (52. 상트페테르부르크)
 (제1회 고려인 가족사 글쓰기 대회 수상작)
 
올해는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지 꼭 70년이 되는 해다. 1937년 스탈린은 일본의 스파이행위 방지를 명목으로 사할린의 한인들을 황무지로 내몰았고, 동포들은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말았다. 많은 이들이 수송열차 안에서, 황무지에서 기아와 추위에 신음하다 죽어갔다. 토굴을 파고, 풀죽을 끓여 먹어가며 질긴 목숨을 이어왔지만, 수난의 역사는 저마다의 삶 속에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나탈리아 교장(55) 역시 그 시절의 아픔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고려인 2세이다. 어린 시절 카자흐스탄에서 자란 그녀는 어머니가 들려준 고향이야기며 아리랑 가락들을 통해 어렴풋이나마 조국의 존재를 그려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사범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장차 교사가 되어 한인의 뿌리를 이어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 달리, 대다수의 고려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조상들의 말과 글, 문화를 버리고 자발적으로 소련사람이 되는 길을 택하기 시작했다.

“고려인들이 러시아로 떠나온 지 10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건 아주 긴 기간입니다. 그 기간 동안 교포들은 4세, 5세에 이르렀습니다. 원래 2세만 되면 모국어, 모국문화를 잊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이미 한국말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게다가 아주 비참한 역사잖아요.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일부러 러시아말을 썼죠. 러시아말을 모국어로 써야만 대학도 나오고 앞으로 삶을 살 수 있잖아요.”
졸업 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와 교사생활을 하던 그녀는 1995년 박효원 목사가 설립한 한글학교를 찾아, ‘가나다라’부터 다시 시작해 한국어능력시험 1급을 통과했다. 2000년 박 목사가 선교를 위해 미국으로 떠난 뒤부터는 줄곧 한글학교장을 맡고 있는데, 박 목사와 마지막으로 약속한 대로, 아직까지 비영리 운영원칙을 고수해 오고 있다. 우리 말과 글을 배우기 위해 시간을 쪼개 열심히 공부하는 고려인 학생들과 한국에서 온 유학생자원봉사자들의 열정이 끊이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01년에는 풍물굿패 ‘살판’과 ‘우리춤 연구회’의 도움을 받아 각각 풍물패 ‘한누리’와 ‘소운무용단’도 창단했다. 말과 글로 전달할 수 없는 우리문화의 깊은 멋을 학생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호응도 대단해서, 매주 갈고 닦은 실력들이 이제는 제법 수준급에 이르렀다. 2004년 세계사물놀이 겨루기대회 은상, 2007년 한국문화대회 1등상 등 수상경력이 화려해 각종 문화행사에 참가요청이 줄을 잇는다. 하지만 이나탈리아 교장은 무엇보다도 매년 개최하고 있는 정기공연 ‘동운명(同運命)’을 통해 고려인의 역사와 아픔을 러시아에 보다 널리 알릴 수 있게 된 것을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공연을 하고 나면, 러시아인들이 와서 ‘정말 잘 했다. 우리가 한국문화라는 것을 처음 봤다. 정말 멋있구나’ 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여기서 스킨헤드들이 동양사람들을 때린다, 죽인다라는 말이 왜 생기겠습니까. 다른 나라의 문화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이 여기 와서 살게 되었냐, 문화가 뭐냐를 하나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연을 하면 한국문화가 소개가 됩니다. 그럴 때가 정말 즐겁습니다.”

[##_1C|1018306924.jpg|width=”367″ height=”241″ alt=”?”|한글학교 초창기에는 루빈스타인거리의 한 아파트를 빌려 수업을 했다._##]졸업 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와 교사생활을 하던 그녀는 1995년 박효원 목사가 설립한 한글학교를 찾아, ‘가나다라’부터 다시 시작해 한국어능력시험 1급을 통과했다. 2000년 박 목사가 선교를 위해 미국으로 떠난 뒤부터는 줄곧 한글학교장을 맡고 있는데, 박 목사와 마지막으로 약속한 대로, 아직까지 비영리 운영원칙을 고수해 오고 있다. 우리 말과 글을 배우기 위해 시간을 쪼개 열심히 공부하는 고려인 학생들과 한국에서 온 유학생자원봉사자들의 열정이 끊이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01년에는 풍물굿패 ‘살판’과 ‘우리춤 연구회’의 도움을 받아 각각 풍물패 ‘한누리’와 ‘소운무용단’도 창단했다. 말과 글로 전달할 수 없는 우리문화의 깊은 멋을 학생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호응도 대단해서, 매주 갈고 닦은 실력들이 이제는 제법 수준급에 이르렀다. 2004년 세계사물놀이 겨루기대회 은상, 2007년 한국문화대회 1등상 등 수상경력이 화려해 각종 문화행사에 참가요청이 줄을 잇는다. 하지만 이나탈리아 교장은 무엇보다도 매년 개최하고 있는 정기공연 ‘동운명(同運命)’을 통해 고려인의 역사와 아픔을 러시아에 보다 널리 알릴 수 있게 된 것을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공연을 하고 나면, 러시아인들이 와서 ‘정말 잘 했다. 우리가 한국문화라는 것을 처음 봤다. 정말 멋있구나’ 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여기서 스킨헤드들이 동양사람들을 때린다, 죽인다라는 말이 왜 생기겠습니까. 다른 나라의 문화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이 여기 와서 살게 되었냐, 문화가 뭐냐를 하나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연을 하면 한국문화가 소개가 됩니다. 그럴 때가 정말 즐겁습니다.”
한글학교를 넘어, 청소년문화교육센터를 꿈꾸다
아파트 한 칸을 빌려 시작했던 한글학교는 어느새 소운무용단, 한누리풍물패까지 거느린 한국문화교육센터로 자라났지만, 아직도 공연날이 다가오면 이나탈리아 교장은 공연복을 만들기 위해 밤새 재봉틀을 돌린다. 올해도 한복을 지을 옷감이 없어 커튼을 잘라 손수 삼베옷을 지어야 했다. 재외동포재단 등의 지원을 받기는 하지만, 건물임대료를 제하고 나면 교재구입비도 턱없이 모자라 몇몇 교사들이 사비를 털어 겨우 운영비를 충당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이나탈리아 교장이, 센터가 세들어 있는 151번 초등학교의 교감직에서 내년이면 정년퇴임을 하게 될 예정이어서, 당장 임시거처를 마련하지 못 하면 1월부터는 거리에 나앉을 형편이 됐다. 그 동안 그녀가 초등학교의 굳은 일을 도맡아해 온 덕에 싼값에 교실을 임대하고 강당을 연습공간으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그녀는 센터의 어려운 상황을 한국의 지인들에게 알리기로 결정했다. 마침 한국에서 유학중인 딸 카제노바 아셀(26)이 센터를 거쳐간 자원봉사 유학생들, 목사님, 교수님들과 교분을 유지하고 있던 터여서 자연스레 후원회가 결성됐다. 세 차례 준비모임을 가진 뒤 4월 정식출범한 ‘한국청소년 문화교육센터 후원회’는 센터가 처한 상황을 알리고 빠른 시일 내에 임시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후원공연을 첫 사업으로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_1C|1023668409.jpg|width=”392″ height=”294″ alt=”?”|7월 후원회 모임에 참석한 이나탈리아 교장이 ‘풍물패의 아버지’ 전동일 선생을 소개하고 있다._##]한글날을 맞아 이나탈리아 교장이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기 위해 정부초청을 받게 됐다는 사실을 알려옴에 따라, 공연일정은 10월 20일로 최종 확정되었다. 공연소식이 알려지자, 한누리와 소운의 산파역할을 했던 ‘살판’ 과 ‘우리춤 연구회’를 비롯, 연세콘서트콰이어 합창단, 이희완 명창 등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출연을 약속했다. 연세대학교는 백주년기념관을 공연장으로 대관해 주었고, 서울 시내의 많은 학교들이 홍보를 도왔으며 언론사들의 인터뷰도 줄을 이었다. 덕분에 3천 장의 초대권은 금세 동이 났고, 천 여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과 함께 공연은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많은 분들이 이번 일로 고생이 많았어요. 정말 고마워요. 난 사실 걱정도 되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큰 마음을 담아 도움을 주는데 우리가 하는 일들이 더욱 더 보람 있고 더욱 더 의미가 있어야 하고 정성을 다해 더욱 더 잘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 할까봐 고민이 된답니다. 상까지 받고 언론자료도 실렸고 공연을 통해 이제 센터 일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는데, 갑자기 우리가 하는 일들이 너무나 작고 아무 것도 아니고 보잘 것 없는 것이어서 마음이 편하지 못해요. 괜히 큰 소리만 친 거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어서요.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하는데. 아주 열심히.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이나탈리아 교장은 연신 눈물을 훔치면서도, 후원회와 한국동포들이 보내준 성원과 애정에 감사한다며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옆에 선 양주동 후원회장이 “이제 시작이에요. 일단 임시거처문제는 한시름 놓았지만, 센터설립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는걸요.” 하며 말을 거든다.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포부를 밝힌 그는 올 11월 아셀과 결혼한 이나탈리아 교장의 사위이기도 하다.
[##_1C|1163111763.jpg|width=”340″ height=”507″ alt=”?”|2007년 10월 열린 후원공연장에서 손님을 맞고 있는 이나탈리아 교장._##]후원회는 내년의 주요사업으로 ‘고려인 가족사 글쓰기 대회’ 수상작의 한?러 양국 동시출판을 계획하고 있다. 고려인들의 아픈 역사와 힘든 처지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더 늦기 전에 고려인 1세대, 2세대의 생생한 목소리와 체험을 기록해 놓아야 한다는 염려가 컸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 4월,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전역의 고려인들에게 작품을 공모해, 현재 수상작을 번역, 편집 중이다. 매년 진행하고 있는 ‘국제대학생봉사 프로그램’과 봄가을학기 유학생 자원봉사, 정기후원회원 모집도 계속된다. 문의 및 접수는 누리집(http://www.hanycec.org/) 과 후원회 (회장 양주동 creater-y@daum.net 019-479-0061 ) 모두 가능하다.

[글/ 이윤재 _ 해피리포터, 사진제공/ 한국청소년문화교육센터]

러시아 한국청소년문화교육센터

전화 : 7(812)520-4517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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