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고맙습니다

우리 사회의 희망씨, 희망제작소 후원회원님을 소개합니다.
쌀쌀한 가을 날씨를 뒤로하고 낙엽이 쌓인 길가에서 아옹다옹 부대끼며 우리네 인생.
그 인생에 있어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을까. 그리고 어디쯤 발을 디딛고 있을까.
지난 10월 28일 인사동 한 찻집에서 김형권씨를 만나는 동안 이 시대를 사는 하나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나눔과 봉사의 미학을 통한 파랑새가 되는 것, 바로 그 소박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사용자‘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아름답게 한다’
인생은 언제나 우리에게 청명한 하늘만을 선물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 인터뷰하는 내내 이따금씩 사소한 일들로 인해
희망의 미학을 선사할 수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아름답게 한다’고 말하는
Social designer 겸 택시 드라이버 김형권씨.
그가 꿈꾸는 사회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는 지금 어디까지 왔을까.
그와의 인터뷰 여행을 통해 그의 작은 발걸음이,
그리고 그와 함께 가는 우리들의 작은 발걸음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보았습니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을 보는 당신이 우리의 희망’이라는 기치 아래
시민단체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해내고 있는 희망제작소.
거기에는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의 발랄한 상상으로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 지식창고가 있고,
소박한 아이디어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연대, 평화, 평등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곳은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세상에 변혁적인 전환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희망제작소에 ‘인생은 단막극이 아니다’리고 말하는 파랑새가 있습니다.
희망제작소의 소기업발전소의 집행위원이자 택시드라이버인 그는
오늘도 나눔의 미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희망 바이러스를 우리에게 전파하고 있습니다.
Q1. 왜 다른 시민단체들도 많은데, 굳이 희망제작소의 파랑새가 되려고 하시나요?
 “저는 대학을 졸업한 후 대기업 광고회사를 다니며 32살에부장이 됐어요. 그 당시 얼마나 기고만장했겠어요. 세상을 다 얻은 듯 교만했지요. 하지만 광고업을 천직으로 알고 살던 제게 세상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연이은 사업부도로 인해 방황을 하기도 했고, 세상과 10년 정도 등지고 살다보니까
그때서야 세상의 기준과 눈높이가 같아졌어요. 그러다 2000년 3월 1일, 택시운전을 하게 됐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사람들, 장애우 등을 비롯한 그동안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됐던 사람들을 보면서 ‘이 세상에 참 빚이 많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려운 시기에 대학까지 나와서 궂은 일 안하고 한평생을 살았고 제 인생을 반추해보며 반성도 많이 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박원순 상임이사님을 만나게 됐는데, 직함이 Social designer였어요. 나야말로 평생 Art designer로 살아왔는데, 뭔가 새롭고 시선함으로 다가왔어요. 박원순 상임이사께서 그 취지를 차근차근 설명해주셨는데, 참 공감이 많이 가면서
‘이거야말로 청색의 시민운동이구나’하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참여의사를 밝혔고
여기까지 오게 된 거죠.”
 

”사용자

Q2. 택시가 그냥 택시가 아니라던데요,
특별한 택시를 운영하시는 경험 한번 들려주세요~
‘21세기 실학운동’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표방한지 3년이 지난 희망제작소는 그동안 창의적인 정책을 만들어내는 싱크탱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돌아보면 아쉬움도 많던 지난 3년이지만 실험적인 성격을 넘어 각 사회에 창의적인 콘텐츠의 공급, 지역 활성화를 위한 연구사업, 문화의 공공성을 지향하는 민간연구소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물론, 희망제작소를 구성하고 있는 연구원들의 능력도 한몫했지만, 희망제작소의 주인은 바로 우리네 평범한 우리들이었습니다. 김형권씨 역시 나눔의 택시를 통해 희망제작소를 알리며 오늘도 봉사와 나눔이라는 자신의 과제를 수행함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제 택시에는 수입의 1%와 손님들이 남겨주는 잔돈과 성금을 모으는 모금통이 있고, 그 옆에는 오색의 ‘Be the bridge’이는 나눔 팔찌가 있어요. 이 나눔 팔찌를 통해 무의탁 어르신의 생계비 지원, 소년소녀가장의 학자금, 저소득계층의 미숙아 지원 등을 하고 있습니다. 나눔의 택시를 통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생각하고 나눔에 앞장설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요?
택시를 운전하다보면 ‘희망제작소가 뭐하는 곳이냐’고 묻는 경우가 참 많이 있어요. 그러면 저의 홍보일이 시작됩니다.(웃음) 그건 바로 우리들이 아이디어 제안을 대신 풀어주는 곳, 그리고 그것을 내외부적인 관찰과 객관적 평가에 기초해 정책을 만드는 곳이 바로 희망제작소라고 말합니다”
김형권씨는 시종일관 진지하고 차분한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Q3. 2009년 대한민국, 희망이 없다는 말에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흔히 요즘 사람들은 현재 희망이 없다고들 이야기 합니다.
서점가에는 희망을 가지라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희망을 팔기도 하고,
퇴행적 욕망에 사로잡힌 우리들의 망상이 때로는 희망으로 포장되기도 합니다.
희망이 없는 2009년 대한민국, 그도 동의할까요?
“희망 없는 사회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왜 희망이 없겠어요.
희망은 타인이 아닌 자신이 만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영혼이 죽은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라고 김형권 씨는 반문합니다.

그는 이어

“제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인터넷으로 알아보니까 감히 107세까지 사는 것으로 나왔어요.
그러면 한 50년을 더 살 수 있다는 소린데, 그때까지 뭐하고 살겠어요. 계속 희망을 만들어야지.(웃음)
개인적으로는 현재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뒤늦게 그림을 시작했는데, 이건 안하고 가면
후회할거 같아서 하는 거에요. 아직도 제 마음속에는 순수미술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나 봐요.
나중에 유명해지면 원  없이 희망제작소를 후원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며 소탈하게 웃기도 했습니다.
Q4. 파랑새님만의 특별한 삶의 철학이나 꿈꾸는 이상향이 궁금해요~

현재 한국사회는 정치세력의 패권성으로 인해
관용의 결핍, 독선적 신념의 과잉으로 하위정치문화가 만연돼있습니다.
제도권 정치세력은 현실적인 대안마련보다는 상대방을 정서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세결집을 하는 등
대중사회와 소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민주주의라는 사회는 관용과 소통을 통해 시민의 다원화된 담론을 수렴해 실천적 목표를 재구성해야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의 제도권 세력은 불관용이라는 비사회적 행위를 일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형권씨는 인터뷰 내내 나와 다른 생각이라도 포용할 줄 아는 관용의 미학을 선사해주셨습니다.
과연 그의 삶의 철학은 무엇이고 궁극적으로 그가 꿈꾸는 이상향은 무엇일까요.
 
“오해-3=이해, 즉 ‘아무리 오해할 일이 생겨도 세 번 생각하면 이해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해요.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줄까요. 오랜 전, 형님의 세 살짜리 아들과 누님의 네 쌀자리 딸아이 얘기예요. 내가 방에 들어서자 형님의 아들이 “삼촌 왔다, 삼촌”이라고 하니까 누님의 아들이 “아니야, 외삼촌이야”라고 말하며 막 싸우는 거예요. 이번에 형님이 들어오시니까 형님의 아들이 확신이 찬 듯이 “아빠다, 아빠”라고 말하자 누님의 딸이 “아냐, 외삼촌이야”라며 또다시 싸웠어요. 그걸 보면서 ‘이런 게 인생사의 싸움이구나’하고 생각했어요.
제 삶의 철학이라고 하면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 즉 ‘2해+2해=사랑’이 아닐까요”
 
이해인 시인은
“답답하고 목마를 때 깎아먹는 한 조각 무맛 같은 신선함, 당신은 내게 잃었던 꿈을 찾아줬다”며
“다정한 눈길을 주지 못한 나의 일상(日常)에 새 옷을 입혀 줍니다”라며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김형권씨 역시 사랑, 관용, 배려 등 수범(垂範)의 가치를 통해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종이비행기를 선물해줬습니다.
과연 그의 종이비행기는 어디까지 날아갈까요.
우리 모두 그가 날리는 종이비행기의 행보를 기대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Social designer 겸 택시 드라이버 김형권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글?민들레사업단 최신형 기자<shchoi@mjk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