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세대의 ‘병맛'(투병)을 수집합니다

전국 지역에서는 청년들이 일군 임팩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희망제작소가 이들을 ‘소셜디자이너’라고 호명하는 이유입니다. 나의 성장이 로컬의 변화로 이어지는 소셜디자이너들의 다채로운 활동과 이야기를 특집으로 전합니다. 오는 11월 14일 개최되는 청년 소셜디자이너를 위한 무대 ‘2024 사회적가치 투자(Social Investor Relations, SIR) 대회’에서도 생생한 임팩트 경험담이 펼쳐집니다.

김가현 스튜디오어중간 대표 | 강원 영월군

고통과 외로움은 슬픈 짝꿍입니다. 나만의 고통을 누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젊은 투병인들은 더 외롭습니다. 젊음과 건강은 동의어나 마찬가지라, 아픈 청년은 ‘비정상’으로 비치기 십상입니다. 중장년부터는 동창회에만 가도 질병‧질환별 동지들을 만날 수 있는데 말이에요. 또래들이 진학, 취업, 병역, 연애를 경험하며 생의 가장 역동적인 시간을 보낼 때, 홀로 멈춰있는 듯한 느낌도 젊은 투병인들을 외롭게 합니다.

김가현 스튜디오어중간 대표는 2020년 미술가인 동료 장지수 씨와 함께 2030 투병문화 매거진 <병:맛>을 창간했습니다. “캄캄한 밤 홀로 고통 한가운데 있는 사람을 붙잡아줄 단 하나의 문장을 담을 수 있으면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만든 창간호는 젊은 투병인과 그들 곁의 사람들, 그리고 의료인들에게도 큰 공명을 불러일으켰어요. 북토크에 온 독자들은 “중장년과 노년을 위한 <병:맛>도 만들어달라”고 앞다퉈 말했습니다.

두 번째 <병:맛>을 펴내기 전, 김가현 대표는 서울 직장생활을 접고 연고 없는 영월로 이사해 스튜디오어중간을 열었어요. 스튜디오어중간은 책과 쉼이 있는 회복의 공간이고, <병:맛> 편집실이자 국내 유일의 2030 투병문화 연구실입니다. 그간 두 차례 열린 오픈스튜디오에는 전국의 창작자, 문화기획자, 의료인, 의료인류학 전공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세 번째 <병:맛> 출간을 앞둔 김가현 대표를 만났습니다.

▲ 김가현 스튜디오 어중간 대표

-<병:맛>은 왜, 어떻게 창간하게 됐나요.

=창간호를 기획할 때 저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동료인 장지수 씨는 중증질병 투병 투병 경험이 있고, 저는 곁에서 내내 지켜보며 2030 투병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죠. 그리고 젊은 투병인들이 취약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느꼈어요.

20~30대와 ‘아프다’는 개념은 맞붙어 생각하기 어렵잖아요. 또 학업, 연애, 결혼, 출산 등 할 일이 정말 많은 나이인데 질병이 큰 결함으로 작용하죠. 힘든 투병생활을 이겨내도 아팠다는 걸 숨겨야 취업이든 직장생활이든 할 수 있어요.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으니 고립되고 외로운 섬 같은데, 이걸 응집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2030 투병인들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투병 콘텐츠’를 생산한다는 건데요, 자신의 병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투병생활을 기록해서 에세이와 사진, 동영상으로 공유해요. 하지만 모두가 그런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에 비해 아프거나, 아팠던 경험이 있는 청년들은 너무 많아요. 한 개인의 경험을 넘어 우리사회 젊은 투병인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나아가 ‘아픈 청년’을 둘러싼 문화와 담론을 담아낼 수 있는 매거진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창간호는 직장생활 틈틈이 작업했기 때문에, 제가 에디터를 맡고 장지수 씨가 편집장 겸 사진촬영, 출판디자인을 도맡아 갖은 고생 끝에(웃음) 세상에 나왔어요.

▲<병:맛> 창간호 ‘빨강, 뜨겁고 매움’

빨갛고 뜨겁고 매운 <:>의 탄생

-창간호의 부제가 ‘빨강, 뜨겁고 매움’인데, 무슨 뜻인가요. 어떤 콘텐츠를 담았는지도 궁금해요.

=투병한다는 것, 병을 겪는다는 것은, 병이 시각적 후각적 미각적 촉각적으로 내 온몸을 침범하는 이벤트예요. 투병의 시간을 그런 감각으로 표현하고 싶었고, 빨갛고 뜨겁고 매운 통각이 첫 번째 <병:맛>이 되었죠.

1권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고 또 감사한 글이 ‘젊은 투병인에게 전하는 책과 문장들’이에요. 글을 기고하신 메이 작가님은 투병과 관련된 책을 번역하고 에세이도 쓰시는 전문작가인데, 이런 문장을 써주셨어요. “힘든 시기에 우리를 붙잡아서 계속 살게 하는 말이 있다. 나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 말…. 모든 말도 아무 말도 다 소용없다고 느낄 때, 그럼에도 끝까지 남아있는 말.” 우리가 만든 매거진이 고통의 한가운데에 있는, 절망 앞에 선 사람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마음을 너무나 좋은 문장으로 표현해주셨어요.

창간호 첫 인터뷰이인 희우 님은 고등학교 때 루프스(자가면역질환)가 발병했는데, 입시공부에 전념하다 건강관리 시점을 놓쳐 신장투석까지 받게 됐어요. ‘서울대와 신장을 맞바꿨다’고 하시더라고요. 희우 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의 의욕이 넘치는 젊은 투병인들이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어려울지 절감했어요. ‘죽도록 공부해도 죽지 않는다’던 급훈도 생각났죠. 희우 님은 죽도록 공부하면 정말 죽는 사람이었는데, 경쟁에서 누구도 이탈할 수 없는 우리사회 분위기 때문에 지독한 입시경쟁으로 스스로를 내몰았어요.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고혈압과 당뇨 같은 노인성질환 발병률이 높기로 유명한데, 운동 안 하고 장시간 앉아서 스트레스를 받으니 몸과 마음이 질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죠.

창간호에는 또 투병하는 아내와 간병하는 남편, 30대 부부의 인터뷰도 있는데요, 아내의 병에 대해 해외논문까지 찾아보며 공부하는 열정적인 남편과 발병-치료-재발-완치에 이르는 긴 시간 병마와 싸운 아내가 한마음 한뜻일 것 같지만 같은 질문에 서로 다른 대답을 해서 너무 재밌었어요. 이밖에 투병의 시간을 표현한 퍼포먼스 사진도 담았고요, 젊은 투병인의 연애를 담은 단편소설 ‘매미가 운다’(유수훈 작가), 도움되는 호흡법이나 가벼운 체조를 소개한 지면도 있어요.

-두 번째 <병:맛> 발간 전에 영월로 이사했어요. 연고 없는 영월에 정착한 이유는 뭔가요.

=투병에 관한 책을 만들다 보면, 삶이 유한하다는 감각을 계속 되뇌게 돼요. 저는 이전부터 서울 밖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미루지 않고 실행하기로 결심했어요. 장지수 씨는 매거진을 만들면서 그림 작업도 계속하니 작품을 생산하고 보관할 장소가 필요했고요. 둘이 뜻이 맞아 1년쯤 강원도 곳곳을 다녔어요. 고성에도 가고, 속초와 동해, 태백에서 한달살이 비슷한 것도 해보고요. 그러다 영월에서 저희가 가진 예산에 알맞은 공간을 찾았어요.

지역살이나 로컬 창업에 대한 낭만 같은 건 없었어요. 이전에 근무하던 회사가 ‘로컬 크리에이터’라고 하는, 지역 창업자들에게 자금을 조달해주는 소셜임팩트투자사였거든요. 지역에서 창업한 사람들의 사례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게 제 업무이기도 했지만, 언젠가 저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현장을 다니며 생생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지역살이와 로컬 창업이 녹록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죠. 물론 잘 안다고 해서, 모든 어려움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요.(웃음)

영월로 이주한 후 짙푸르게 얼얼해진 <:>

-영월에서 펴낸 두 번째 <병:맛>이 서울에서 만든 창간호와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두 번째 <병:맛>의 부제가 ‘청록, 얼얼하고 질긴’이잖아요. 청록은 영월의 숲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청록색은 스펙트럼이 넓은데, 저희는 영월의 깊은 숲속 그림자 드리워진 청록색에 주목했어요. 숲은 전체로 바라보면 아름답고 생명력 있지만, 숲속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비정하고 치열한 터전이잖아요. 또 병은 한번 발병하면 평생 안고 가야 할 수도 있는데, 그런 끝나지 않는 투병의 시간이 얼얼하고 질긴, 숲의 나무뿌리처럼 얽힌 것일 수 있겠다 싶었죠. 그래서 2권에는 영월의 숲 사진이 여러 컷 담겨있어요.

호흡이 긴 인터뷰를 하게 된 것도 영월로 이주하며 생긴 변화예요. 남편을 간병하다 얼마 전 떠나보낸 젊은 사별자 한 분을 인터뷰했는데, 이런 인터뷰를 도시의 카페에서 만나 진행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잖아요. 그분이 영월에 오셔서 며칠 함께 지내면서 천천히 말씀을 들려주셨고 그 이야기를 담았어요. 투병 경험을 가진 네 분과 ‘2030 투병인의 먹고사는 일’을 주제로 그룹인터뷰를 한 것도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 그룹인터뷰를 하면서, 투병 경험이란 친숙한 관계에서 소외되고 고립되는 경험이고, 저의 지역 이주나 퇴사 경험과 닮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동안 저 자신이 투병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3권은 ‘나의 이야기’라는 생각으로, 편집장을 맡아 진행하고 있어요.

▲ 오픈 스튜디오 ‘타인의 고통, 그 곁에 산다는 것’

-‘오픈스튜디오’라는 이름으로 포럼과 워크숍을 진행했어요.

=<병:맛>을 매개로 생각지 못했던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타인의 고통에 공명해서 작품활동을 하는 예술가들, 몸과 관련된 문화기획자들, 의료인류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환자들을 대하고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지 연구하는 분들도 만났죠. 2023년 12월에 ‘타인의 고통, 그 곁에 산다는 것’을 주제로 북토크와 포럼을 했고, 올해 7월에는 ‘당신의 회복을 위한 집’을 주제로 포럼과 워크숍을 열었어요. 이 두 번의 ‘오픈스튜디오’를 통해 영월의 어중간스튜디오라는 공간이 젊은 투병인과 그 곁의 사람들에 대한 연구와 네트워킹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걸 확인한 셈이에요.

스튜디오를 열고, ‘회복을 위한 집을 꿈꾸다

-앞으로의 계획은요.

=영케어러(돌봄청년)를 주제로 <병;맛> 3권을 준비하고 있어요. 영케어러네트워크 운영진 분들을 영월에 초대해서 천천히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해요. 앞으로 1년에 한 권씩, 7권으로 구성된 <병:맛> 시리즈를 완성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스튜디오어중간이 우리시대 아픈 젊은이들의 회복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으면 해요.

-인터뷰·글: 이미경 희망제작소 연구위원ㅣ사진: 스튜디오어중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