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희망탐사대 / 후기] 정조는 왜 수원에 혁신도시를 만들었을까?

희망탐사대의 성공적인 출발

전날까지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무척이나 마음에 걸렸습니다. 누군가는 ‘고궁은 비올 때 가야 제 맛’이라고 했지만 참가자들이 행사 당일 오지 않을까 걱정이었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풍경이어도 일단 와야하는 것이 첫째이지요. 마음을 졸이며 잠을 청했던 전날 밤의 걱정은 다행스럽게도 기우였습니다. 비내린 다음 날의 청량한 공기와 햇살이 아침을 상쾌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날 참가하신 사람들이 100명에서 딱 3명 모자란 97명이었습니다. 아빠가 자녀의 손을 잡고 걸어왔습니다. 이모가 조카들을 이끌고 나타났습니다. 노부부가 환하게 웃으며 도착했습니다. 오랜 친구가 멋진 휴일을 보내자고 의기투합해서 희망탐사대에 왔습니다.

행사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참석자들 스스로가 서로를 쳐다보며 신기해 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많네?!”

깜짝 손님과 대한민국 3대 재담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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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수원 화성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참가자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바로 염태영 수원시장입니다. 사람들이 큰 박수와 웃음소리로 반겨줍니다. 바쁜 와중에도 희망탐사대의 수원 화성 탐사를 축하하기 위해 왔습니다. 염태영 시장이은 이날의 강연자이자 해설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김준혁 교수를 대한민국 ‘3대 재담꾼’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사람들의 기대가 한껏 높아졌습니다. (염시장님은 좀 더 격한 표현을 쓰셨지만 ‘재담꾼’정도로 해둡니다. -필자)

수원 화성에서 정조를 만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가 건립한 것으로 총 길이 5.7킬로미터, 면적 1.2제곱킬로미터에 달합니다.정조는 당쟁의 여파로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 전농동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에서 수원 화산(花山)의 현륭원(顯隆院)으로 옮기고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 넓은 기슭으로 이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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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희망탐사대가 수원 화성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갑니다. 희망탐사대의 발걸음이 한 발자국씩 궁으로 더해질 때마다 수 십년의 시간이 뒤로 밀려나갑니다. 200여년이라는 시간의 이동 끝에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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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조선 후기 다양한 개혁과 탕평 정책을 통해 대통합을 추진했던 ‘개혁군주’였습니다. 어린 시절 어버지인 사도세자(후일의 장헌세자, 고종 때 장조로 추존됨)가 비극적으로 죽게 되는 것을 직접 목격해야만 했던 정조. 그는 그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갖가지 방해공작과 위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그의 꿈과 뜻을 하나, 둘 씩 펴나갔습니다.

조선 후기 지독한 당파 싸움을 타개하게 위한 탕평 정책, 능력위주의 인재등용, 그리고 통공정책, 즉 금난전권의 혁파와 자유상인이라 할 수 있는 난전 상인의 안정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단행된 상업정책을 실행하였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특권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도성 중심의 경제권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시장공간의 확대 등을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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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은 정조가 꿈꾼 개혁의 총아였습니다. 화성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 이장을 계기로 조성된 성곽이었지만 정조는 화성을 단순한 군사적 기능을 수행한 성곽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곳을 무대로 자신이 개혁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를 시험하는 무대로 삼고자 했습니다.

축성 과정에 당시로써는 가장 선진적인 축성 기술을 도입하였고, 그가 즉위 이후 육성했던 정약용 등 측근세력을 대거 투입하여 주도하게 하였으며 화성을 포함한 수원 일대를 자급자족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습니다. 국영 농장인 둔전을 설치하고, 경작을 위한 물의 확보를 위해 몇 개의 저수지를 축조하였으며 이곳에 선진적인 농법 및 농업 경영 방식을 시험적으로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통공정책으로 수원 일대 상인들이 자유로운 상행위가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정책들은 얼마 후 역사 속으로 퇴장했습니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사후 정조가 육성했던 세력들이 대거 축출되었고 서울 중심의 세력에 의한 정치, 사회, 경제적 독점은 다시 심화되었습니다.

김준혁 교수의 정조 이야기에 푹 빠진 참가자들이 고개를 들어 탄성을 지른 곳은 수원 화령전이었습니다. 이곳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지내던 건물입니다. 김준혁 교수와 참가자들이 화령전 앞에서 묵념을 했습니다. 개혁군주 정조에 대한 후손들의 예를 갖춘 것입니다.

수원화성 천천히 걷기

화성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화서문을 지나 서북공심돈, 장안문, 화홍문, 방화수류정, 연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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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미려함은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

정조대왕이 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그의 철학이 담긴 수원 화성은 아름다웠습니다. 자연지형물을 최대한 이용한 정조는 팔달산 정상에 군사지휘소인 ‘서장대’를 두었으며 맞은편 높은 곳에 외부와의 통신시설인 ‘봉수대’를 벽돌로 만들어 세우기도 했습니다. 화성 남북 단에는 ‘장안문’과 ‘팔달문’, 동서 단에는 ‘창룡문’과 ‘화서문’을 세우고 남서와 동북 방향 높은 지대에 각기 ‘화양루’와 동북각루를 세워 비상시 군사 요충이 되도록 했습니다.

화성의 또 다른 특징은 도시 기반 시설입니다. 화성에는 팔달산 기슭의 행궁과 화성 유수부 앞에서 정면으로 용인 방면으로 이어지는 십자로 등 인근 지역과 연결되는 새로운 개념의 신작로가 만들어졌으며 이 십자로 주변에 상가와 시장을 배치하여 상업도시로서 화성의 성격을 명확히 했습니다. 정조는 화성을 물류경제와 국제무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시키는 데 모든 힘을 쏟았던 것입니다.

수원평생학습관 탐방

화성에서 약 10분 가량 걸으면 수원평생학습관이 나옵니다. 희망제작소의 연구사업이 수원시에 의해 계승, 발전되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도착한 참가자들은 점심 도시락을 꺼내어 모처럼 가족들과 평화로운 도시락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시작된 수원평생학습관 탐방과 김준혁 교수의 강연은 이날 행사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장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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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개혁군주인 정조, 그가 만든 개혁의 총아인 ‘수원 화성’, 그리고 그의 곁에서 개혁을 추진한 조선최고의 실학자 정약용.

이날 참가자들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때로는 아파하고 때로는 통쾌해하고 때로는 안타까워했습니다. 누구나 한번 즈음 그런 상상을 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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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그가 200여년 전 꿈꾼 희망.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 우리가 꿈꾸는 희망과 비슷해 보입니다. 정조대왕이 꿈꾼 희망을 닮은 사람들.

참가자들은 이날 각자의 마음 속에 자신만의 화성을 가졌습니다. 어느 누구는 제법 형태가 잡힌 화성을 가졌고 어느 누군가는 이제 돌 하나 내려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수많은 화성들이 점점 견고해지겠지요. 우리의 희망이 또렷해지고 구체화되어 현실이 되는 것처럼..

함께 해서 행복했습니다.

글 : 회원재정센터 정승철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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