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년 세월로 달여낸 종가의 간장

편집자 주/ 7월부터 새롭게 ‘희망소기업 이야기’가 연재를 시작합니다. ‘희망소기업’은 희망제작소 소기업발전소가 지원하는 작은 기업들로, 지역과 함께 고민하고 생활하며, 성장하고 대안적 가치를 생산하는 건강한 기업들입니다. 앞으로 이 연재가 작은 기업들의 풀씨같은 희망을 찾아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단아(端雅)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대문을 열자 눈에 펼쳐지는 장독이 그러하고, 마당을 감싸고 있는 99칸 안채와 사랑채가 그러하다. 하다 못해 마당 구석에서 잠을 청하는 백구의 자태에서도 단아함이 느껴진다. 350년 묵은 덧간장이 익어가는 종갓집의 첫인상이다.

“아무런 비법이 없어요. 남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들 칭찬만 하시니…”

부끄러운 듯 말을 흐리는 김정옥(55)씨. 그녀는 충북 보은 보성 선씨 영흥공파의 21대 종부(宗婦)이다. 국가중요민속자료 제134호로 등록돼 있는 선병국의 가옥을 32년째 지키고 있는, 종가의 살림을 도맡고 있는 가문의 맏며느리다.

곱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온 강인함은 간데 없고, 갓 시집 온 새색시마냥 낯선 이의 방문이 어색한 듯 하다.
[##_1C|1334335895.jpg|width=”560″ height=”373″ alt=”?”|보성 선씨 영흥공파의 21대 종부 김정옥씨. 한복의 빛깔과 장독의 조화가 어색함이 없다._##]덧간장 1리터에 5백만원

그녀는 스물다섯에 시집와, 32년 동안 안채 부엌을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다.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고, 1년에 10번 넘게 제사를 치러야 했다. 32년 동안 쉴 틈이 있었을까 싶지만 그녀의 손에서 세월이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을 건너 뛴 것일까?

그녀가 말하는 지난 세월은 그리 만만한 삶은 아니었다. 32년 전 시집 온 종갓집은 그녀가 꿈꿨던 신혼의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골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아버지가 외아들이어서 가족 많은 것이 부러웠고, 일종의 낭만이라는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막상 결혼해서 보니,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격차가 좁혀졌지만, 이전 생활과도 문화 차이가 심했죠. 하늘과 땅 사이었습니다.”

그녀 말처럼 종부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매끼니 집안 어르신들과 손님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빨래와 청소, 집안일 등을 정리하고 나서도 장 담그기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종갓집은 ‘왜’라는 것이 없다.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종부 역할을 하기 힘들었다. 다른 사람은 아무렇게 하고 살아도 큰 흠이 되지 않지만, 종부는 작은 실수도 큰 흠이 될 수 있다. 작은 실수도 체에 걸러야 하는 종부의 시간이 느껴진다.

그녀가 담근 장이 몇해 전 5백만 원에 팔려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2006년 ‘대한민국 명품 로하스 식품전’에서 김씨의 덧간장 1L가 5백만원에 팔린 것. 조선 간장이 거액에 팔린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지만, 가장 놀란 사람은 김씨였다.

“처음에 우리집 간장에 5백만 원이라는 가격이 붙었다는 소리를 듣고 믿지 못했어요. 그때까지 조선 간장을 판다는 개념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며칠 후 어떤 기업에서 1리터를 사가고, 전시회 마지막 날 또 한 분이 사가셨어요. 이럴 수도 있나 싶어서 웃음이 나왔죠.”

겸손한 그녀의 말과는 달리 보성 선씨 종가의 간장은 이미 명품 대열에 들어섰다. 같은 해 10월에 열린 ‘한국 골동식품 예술전’에 초청돼, 국내는 물론 해외 식품 전문가들에게서 찬사를 받았다. 350년 종가의 비법이 그대로 묻어났기에 그 가치를 높게 평가 받은 것이다.

[##_1C|1266057322.jpg|width=”560″ height=”373″ alt=”?”|선병국 가옥은 1919년~1921년 사이에 지어졌다. 안채와 사랑채를 포함해 99칸 규모로 지은 전통 가옥이며, 1984년 중요 민속자료 134호로 지정됐다._##]‘정성’이 비결 아닌 비결

김씨의 장 만들기는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시할머니, 시어머니에게 가문의 전통을 그대로 전수받았고, 그 방식을 지금까지 고수하기 때문이다. 콩도 직접 고른다. 수입 콩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국산 콩이 수입산에 비해 몇 배 더 비싸긴 하지만, 장 담그기의 기본은 국산 콩이다.

좋은 콩을 골랐으면, 그 다음은 메주를 잘 쒀야 한다. 깊은 장맛을 내기 위해, 메주 쓰는 데 큰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다.

콩은 장작불로 삶아내고, 콩을 빻아 만든 메주는 짚을 바닥에 깔아 20~30일, 무명 보자기에 싼 후 아랫목에서 1주일, 마지막으로 햇볕에 1주일 자연 건조시킨다.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묵묵한 기다림의 시간이 메주에 어려있다. 말 그대로 350년의 세월이 묻어있는 것이다.

장 담그는 법도 별 다를 게 없다. 그저 평생 그 자리가 자신의 터인 냥 마당 한 곳을 차지하고 있는 옹기에 집 우물물을 붓고, 2~3년 묵혀 간수를 뺀 천일염을 넣어 염도를 맞춘 후 메주를 넣는다. 나머지 재료들은 대추와 숯, 고추, 옻나무가 전부다.

간장 맛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짜지 않다. 담근 지 5년이 지나면 오히려 약간 단 맛이 난다. 달이지 않아도 단 맛이 난다. 보통 간장이 오래되면 냄새가 나기 때문에 대부분 간장을 달인다. 이 집 간장은 말 그대로 생간장을 묵히고 묵혀서 식탁에 올린다.

“10명이 한 가지 재료로 음식을 만들면 모두 맛이 달라요. 10가지 맛이 납니다. 우리는 그것을 손맛이라 부르지요. 우리는 그저 전통의 방식으로 담글 뿐이에요. 그럼에도 간장이 깊은 맛이 나는 이유가 자연의 축복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녀의 장맛은 분명 다르다. 간장을 달여서 맛을 내지도, 특별한 첨가물을 넣지도 않는다. 그저 세월에 그 맛을 맡길 뿐이다. 그녀 표현대로 ‘간장을 달이진 않을 뿐, 세월이 간장을 달이고’ 있다.

[##_1C|1322694915.jpg|width=”560″ height=”373″ alt=”?”|장독대 위의 청개구리. 초록빛 한 점이 정갈함을 더한다. _##]조선 간장의 참맛을 살리다

“사실 이런 방식의 조선 간장이 현대인의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담근 장은 쉽게 질리지 않아요. 우리집 학생들은 우리 된장과 장작불로 끓여 낸 된장찌개를 아주 잘 먹어요.”

이 집에는 가족들 외에도 많은 식구들이 있다. 김씨는 고시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시험준비를 하는 학생들이 20명 가까이 된다. 이들의 식사 준비도 김씨의 몫이다. 끼니마다 평균 25인분을 준비하는 그녀에게 식사 준비는 장 만들기와는 또 다른 삶의 공간이다.

식사 준비를 해야 하는 듯 그녀의 표정에서 인터뷰를 빨리 끝냈으면 하는 표정이 엿보인다. 사람들의 입을 즐겁게 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녀에게 요리를 잘 하는 지 물어봤다.

“종부는 요리를 못하면 자격이 없습니다. 그 많은 손님을 어떻게 대접을 하겠어요?”

단호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다. 괜한 질문을 한 것은 아닌지 머쓱해지려다가, 문득 그녀의 자신감 어린 목소리에서 불안감이 떠오른다. 지금까지 무수히 스러져갔던 우리네 전통이 그러하듯, 보성 선씨 간장 맛도 언젠가 사라지지 않을까?

“다행히 제 아들이 이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강합니다. 지금 문화유적 보존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아들의 뜻을 지키고자 하는 며느리가 곧 오겠죠. 요새는 종갓집을 좋아하는 아가씨도 많다고 하네요.”

그녀의 엷은 미소 뒤로 간장 내음이 밀려오는 듯 하다. 양조 간장 맛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이 모두들 한번쯤은 조선 간장의 참 맛을 느껴볼 날을 생각하면서, 방을 나섰다. 장독으로 향하는 마당 한 구석에서 된장과 간장이 세월을 머금고 익어가고 있었다.



노준형/객원연구원


보성선씨종가 장맛 즐기기

지금까지 보성선씨종가의 장 맛 보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판매용으로 대량 생산을 하지 않아서 아름아름 소문을 듣고 오는 이들이나 동네 주민들만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가정에서도 쉽게 이 집 장 맛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만간 인터파크와 희망제작소가 진행하는 희망소기업 캠페인을 통해 보성선씨종가의 각종 장류를 구입할 수 있게 됐다. 김씨는 이를 위해 된장과 고추장에 대한 식품 허가를 신청했고, 허가가 완료되면 시판에 나선다. 아름다운 가게에서도 판매가 예정돼 있다.

간장 판매는 당분간 힘들 것으로 보인다. 식품 허가를 내기 위해서는 유통기한을 정해야 하는데, 김씨의 간장은 사실 유통기한이 없다. 오래 묵혀도 상하기는커녕 깊은 맛이 우러나기 때문이다. 그래도 실망하기는 아직 이르다. 장 담그기 체험이나 직접 방문을 통해 맛 볼 기회는 있다.

김씨는 점점 멀어져 가는 전통 문화를 알리기 위해 ‘장 담그기’ 체험행사를 매년 진행하고 있다. 김씨와 함께 장을 담그고 장독에 자기 이름을 붙여 놓은 뒤 보관한다. 장맛 보는 것을 넘어 우리 전통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최근에는 충북 농업기술원과 함께 도시지역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그린투어’를 진행했다.

별도의 전통 펜션을 운영하고 있어 숙박도 가능하다. 인근에 구병산, 만수계곡, 서원계곡 등이 있어 여름 휴가를 즐기기에도 제격이다. 문의: 043-543-7177
[##_1L|1107020796.jpg|width=”85″ height=”85″ alt=”?”|_##]노준형은 전공이 뭐냐고 물어볼 때가 제일 난감하다. 전자공학과 글쓰기의 상관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회로설계(Circuit Design)와 글쓰기의 원리는 동일하다고 종종 주장한다. 몇 차례 취재기자를 꿈꾸며 <코리아포커스>, <아시아경제 브이에스뉴스> 등에서 짧게나마 기자생활도 했으나 불가항력적 상황에 밀려 지금은 언론홍보대행사 커런트코리아에서 홍보AE로 일하고 있다. ‘노대리의 직딩일기’와 같은 자전적 에세이를 쓰고 싶지만, 잦은 야근에 치여 하루하루 꿈을 내일로 미루고 있다. 희망제작소의 소중한 부름을 받게 된 것에 감사하며 사는 소박한 직장인이다.

Comments

“350년 세월로 달여낸 종가의 간장” 에 하나의 답글

  1. 문승희 아바타
    문승희

    저는 메주라고 놀림 받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메주’가 저렇게 정성으로 만들어지는데 말이죠. 이제 ‘메주’의 겉이 아닌 속을 봐야합니다! 으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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