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회원 프로그램

한동안 계속 되었던 봄의 따스한 햇살을 시기라도 했던 것일까요? 4월 희망탐사대 행사가 있었던 21일의 하늘은 폭풍우 그것이었습니다. 50~80mm정도로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도 있었지만,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에 회원 분들이 얼마나 오실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우였습니다. 120여명의 신청자 중 65명이 비옷을 입고 우산을 쓰고 나타났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발길을 컴퓨터 게임이나 TV 보기에서 끌어나 이곳으로 모이게 했을까요?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고, 빗속에서도 희망을 만들어 가는 선구자 같았습니다.

”사용자

남한산성 행궁을 적시는 빗소리에도 불구하고 지난 3월 수원화성을 소개해 준 경희대 김준혁 교수님의 설명은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조선시대 행궁이라고 하면 임금이 행차했을 때 머무는 궁궐로, 우리나라 전역에 21개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한산성은 그 위계 면에서 첫 번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 행궁 뿐만 아니라 종묘와 사직을 모실 수 있는 시설이 함께 축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 보장지처(保障之處)로서 전란시 부수도(副首都)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사용자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김교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는 회원 분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비가 와 더욱 운치 있었던 남한산성의 경치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는 분들, 김교수님의 설명을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 메모하는 분, 우산를 쓰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한껏 들떠있던 어린이들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듣다 바람이 불면 회원 분들은 일제히 처마 밑으로 몸을 숨기기도 했습니다.

”사용자

“남한산성 행궁은 인접한 북한산성과 수원화성과도 비교가 됩니다. 남한산성은 높은 산 정상에 축성된 성곽구조와 그 내부에 17세기 계획된 도시체계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그 내부에 각종 종교의례와 세시풍속이 살아 숨쉬고 있는데, 바로 이 점이 다른 국가의 어느 문화유산에 못지 않은 차별성입니다. 남한산성의 가치는 우리 역사 속에 소중한 가치 뿐만 아니라, 세계사 속에서 다시 인정받는 세계유산으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회원들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서울 근교에, 언제라도 발길 닿으면 찾을 수 있는 곳에 이와 같이 우리의 자존심을 드높이는 역사적 유물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 빗속을 헤쳐가면서기온이 떨어져 몸은 추위에 떨고 있었지만, 마음 속에는 무언가 뜨거움이 용솟았습니다.

”사용자

이어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조두원 박사는 “인근의 수원화성은 형태상으로 평지형 읍성으로, 18세기 조선시대 마지막 건축적 양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구요, 하지만 남한산성과 비교해 보면 수원화성은 한 번도 실전을 치르지 않은 상징적 경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남한산성은 전쟁이 나면 도시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방어태세를 갖추는 동아시아 산성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실전을 통해 증강된 옹성과 같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을 만큼 탁월한 가치를 가진 곳입니다.”라면서 국내 최고의 성곽전문가로서 남한산성을 소개했습니다.

현재 조박사님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한국위원회(ICOMOS KOREA) 정회원으로, 국제성곽군사유산협의회 한국 대표위원입니다. 최근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에서 주관하는 세계유산 등재 실사로 인도를 방문한 것을 볼 때, 오늘 이곳을 찾은 회원 분들은 뜻깊은 경험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욱이 조박사님은 남한산성의 세계문화유산 등록 결정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분입니다. 오는 6월7일부터 8일 이틀동안 남한산성 행궁 외행전에서 국제성곽군사유산학술위원회(ICOFORT) 위원장, 부위원장, 학술위원들이 참여해 남한산성에 대한 국제 심포지움을 갖게 됩니다. 국내 성곽도시를 둘러보면서 남한산성에 대한 가치를 입증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는 길이 휠씬 밝아 보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우리 희망탐사대 가족 분들 모두 남한산성으로 모여서 좋은 기운을 불어 넣어 주면 어떨까요?

”사용자

점점 더 굵어지는 빗방울 속에서도 희망탐사대는 성큼성큼 수어장대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수어장대의 원래 이름은 서장대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장대란 장수가 병사를 지휘하는 곳을 말한답니다. 수어장대에는 ‘매바위’로 불리는 커다란 바위하나가 있었습니다. 이 매바위에 얽힌 일화가 있습니다. 이회장군은 남한산성 축성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회장군은 자기가 죽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와서 슬피 울 것이라고 했는데, 이후 정말 매 한마리가 날아와 앉은 바위가 바로 이 매바위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전설에 희망탐사대 가족분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역사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사용자

수어장대에 도착했을 때, 비바람이 더욱 거세졌습니다. 옛날에는 이러한 기후조건 속에서 어떤 전략을 세웠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예전엔 지금보다 훨씬 춥고, 식량과 옷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적들과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정신력? 애국심? 그것은 바로 나와 내 가족들, 이웃들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아닐까라고 김준혁교수님이 답변해 주셨습니다. 정조가 이야기합니다. ‘개인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개인적인 것은 공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개인이 춥고 힘든 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피곤한 걸 보여주지 않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공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춥고 힘들수록 옆 사람을 생각하고, 내가 더 힘내자고 마음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김준혁 교수님의 답변이셨습니다. 짓궂게 몰아치는 비바람을 뚫고 수어장대까지 올라온 희망탐사대에게 꼭 와 닿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희망탐사대는 다 함께 파이팅을 외치면서 서로 위로와 격려를 대신했습니다.

점심식사는 말 그대로 꿀맛이었습니다. 희망탐사대 가족 분들은 집에서 정성스럽게 준비해 온 도시락을 자랑하면서 즐거운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후에는 김준혁 교수님, 조두원 박사님의 남한산성에 대해 못 다한 삼전도의 굴욕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청나라 홍타이지가 조선에 제2차로 침입함으로써 발발하였습니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큰 패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몽골에 대한 항쟁이 40여 년간 지속되었고, 임진왜란에서는 7년간의 싸움 끝에 왜군을 격퇴한 데 반하여, 병자호란은 불과 두 달 만에 조선의 굴복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국호를 청(淸)이라 고친 후금의 홍타이지(청 태종 : 숭덕제)는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왔습니다. 이들에게 쫓겨 남한산성으로 조정을 옮긴 인조는 끝까지 대항했으나, 식량 부족과 추위로 인해 패배했습니다. 1637년 음력 1월 30일 삼전도(현재 서울 송파구 삼전동 부근)에서 홍타이지에게 굴욕적으로 세 번 절하고 머리로 북을 치는 항복의식을 거행했습니다. 북에는 조그마한 못이 박혀 있었습니다. 인조의 머리에서는 피가 넘쳐 났습니다. 그리고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도 청나라에 끌려갑니다. 바로 이 사건이 삼전도의 굴욕입니다.

”사용자

”사용자

비바람에 맞서 오랜 시간 걷느라 고단할 만도 한데, 끝까지 초롱초롱했던 희망탐사대 가족분들의 눈망울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삼전도의 굴욕을 들으며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숨을 쉬며 생활 할 수 있는 것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말입니다. 오늘 남한산성 행사는 거센 빗줄기도 희망탐사대의 열정을 뚫지는 못 했습니다. 특히 부모님의 손을 잡고 우산을 쓰고 씩씩하게 남한산성을 누비던 어린이들의 모습은 비로 인해 무겁게 젖은 몸에 힘을 주었습니다.

남한산성을 오르는 길에 한 회원 분께 힘들지 않으시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시더군요.

“비가 많이 오지만 그만큼 찐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네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망탐사대 가족 분들도 빗줄기에 젖은 남한산성과 더불어 찐한 추억에 젖어 드셨길 바랍니다. 함께 해서 행복했습니다. 5월에 만나요!

글 : 회원재정센터 이지은 인턴연구원
사진 : 기획홍보실 정승철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