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우리 모두 ‘태어나고 자란 장소’의 영향을 받은 ‘어디 사람’입니다. 이 말은 나 또한 우리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방인’이자 ‘소수자’가 된다는 의미죠. ‘소수자’를 떠올리기 어렵다면 나의 경험을 비춰보면 됩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 인턴이었을 때 겪은 경험, 혹은 여자라서 겪은 경험, 해외에서 의사소통하는 데 불편함을 느꼈던 일을 떠올리는 거죠. 우린 누구나 하나쯤 이러한 경험을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다르면 풍경도 달라집니다. 노래 ‘여수 밤바다’를 즐겨 부르고, “머선 일이고!”라는 사투리를 즐겨 쓰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출신 지역으로 ‘우리’와 ‘그들’을 구분합니다.

“너네 동네엔 이런 거 있어?”
“왜 노래 부를 땐 사투리 안 써?”
“(거기는) 지하철 없이 어떻게 살아?”
“OO지역 사람은 못 믿겠더라.”
“명절에 ‘시골’ 잘 다녀와!”

희망제작소 지역차별언어 바꾸기 프로젝트 ‘어디 사람’은 지역의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도록, 지역차별의 말을 모아, 시민들과 함께 더 나은 말을 찾는 프로젝트입니다.

🔶서울말과 사투리, ‘두 개의 언어’를 쓸 수 밖에 없는 이유🟢

창원에서 서울로, 다시 지리산에 터전을 옮긴 20대 청년 보석 씨. 그에게 서울은 기회의 땅이자, 유일한 답처럼 보였지만, 막상 서울의 삶은 만족스러운 답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서울에 살수록 지역과의 ‘어떤 차이’를 느꼈다. 지역살이를 통해 정답이 아닌, 자신만의 해답을 찾고 있는 보석 씨의 이야기를 전한다.

▲ 보석 씨가 밭을 일구고 있다. (사진 제공: 보석)


Q. 여러 지역에서 살았다.

지금은 창원시에 흡수된 진해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다. 서울에서 20살부터 7~8년 정도 살다가 지리산에 온 지 1년이 됐다. ‘농촌 살이의 기반을 만들어보자’라고 해서 지역 공동체에서 지내다가 나와서 현재는 친구들과 거주하고 있다.

Q. 인터뷰에 참여한 계기는 무엇인가.

지역인으로서 느낀 점이 있었다. 예를 들면 나는 창원 출신이지만, 일상에서는 사투리가 섞인 말투를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내 출신지를 알고 “사투리 잘 고쳤다”라고 말할 때마다 ‘왜 이걸 칭찬하지?’, ‘왜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Q. 사투리를 사용하지 않게 된 이유는.

서울에 왔을 때, 평상시 언어 습관대로 말했는데 사투리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나름의 관심이었겠지만 보통은 초면에 듣게 되는 질문들이라 부담스러웠다. 일대일로 만났을 때 말투나 억양이 다르니까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 어디서 태어났냐, 어떻게 오게 됐냐”를 매번 설명하느라 피곤했다. 그 때 튀지 않도록 남과 같은 언어를 익혀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난 사투리를 고친 게 아니라 서울말을 익힌 것이다. 두 개의 언어를 쓰는 셈이다.

Q. 사투리로 인한 경험 외에 느낀 차별이 있다면.

대다수의 매체가 지역 콘텐츠보다 수도권 중심 콘텐츠를 많이 내보낸다. 지역에서 보기에 전혀 상관없는 소식처럼 느껴지는데, 결국 전국 지역에 대한 이해를 낮춘다고 본다. 예를 들어 ‘내가 진해에서 태어났다’라고 하면 ‘거기가 어디냐’라고 묻고, ‘창원 근처다’라고 답하면 ‘창원이 어디냐’, ‘부산 근처다’라고 답하면 그제서야 돌아오는 답이 ‘아, 경상도~’ 등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각각 다른 지역을 ‘시골로 퉁쳐서’ 이야기하는 게 오랜 관습인 것 같다.

이런 관습으로 지역에 대한 이미지에 편견을 더러 느낀다. 농촌을 비위생적으로 여긴다거나 교통편이 불편하다거나. 누군가는 ‘거기서 어떻게 사냐’, ‘공기는 좋아도 친구도 없고 못 살겠다’라고 말한다. 또 수도권의 인프라를 비교하면서 ‘이거(카페) 있냐, 저것 도 없냐’ 등 어떤 인프라가 갖춰있는지 수도권중심의 사고로 지역에 잣대를 들이대고 평가한다.

이를 내면화한 지역 주민은 당연히 자기 지역에 대한 만족도가 낮아진다. 지역의 어른 분들이 하는 말씀이 있다. 청년이 지역에 살고 있다면, “남아버렸네”라고 생각한다. 대학생 때 지역을 떠나야 “아, 걔가 뭐라도 하는구나.’라고 여긴다. 그러니까 ‘남아있는 청년’을 측은해 한다.작년에 지리산으로 살고자 왔는데, 환대해주는 분도 있는 반면 “여기는 일할 게 없는데 올라가야지. 돈을 벌어야지. 지리산이 좋긴 한데 돈은 안 갖다줘.”라고 걱정 섞인 말을 건네기도 했다.

Q. 지리산의 경험이 처음은 아닐 것 같다.

자라면서 서서히 깨달았던 것 같다. 학교 선생님들부터 “지금부터 준비해야 이 진해 바닥을 떠서 성공한다”라고 말씀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에 갔을 때였다. 2살 때부터 알았던 친한 친구를 창원역에서 우연히 만났다. 어릴 적 옆집에 살던 친구였는데 고등학교를 따로 다니며 멀어졌다가 4년 만에 기차역에서 만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쟤도 여길 탈출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어디 가냐”라고 물었다. 그런데 친구가 말하길 재수학원에 간다고 답했다.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 한다.

서울에 가는 사람은 뭔가 높은 것 같고, 서울에 가지 않은 사람은 낮아 보이는 그런 것. 또는 서울로 직행하지 않는다면 제3의 지역을 발판 삼아 서울에 가는. 즉 어떻게 해서든 종착지가 서울이어야만 한다는 걸 경험해온 것 같다.

Q. 그럼에도 다시 지역에 왔다. ‘탈(脫)서울’의 계기는.

나와 함께 사는 친구들은 대부분 ‘비건’(채식주의자)이다. 독서모임을 하다가 만난 친구들인데 비거니즘(채식주의) 독서모임이었다. 동아리에서 관련 서적을 다루다보니 생태, 환경문제에 눈을 뜨면서 삶을 돌아보게 됐다. 도시에서는 내 집을 가질 수 없어 빌려사는 집에 사는데 변기를 생태 화장실로 바꿀 수도 없다. 그런 도시에서 생태적인 삶을 지속하기에 한계를 느낀다는 한 친구가 지역살이에 관심을 보였다. 보다 더 생태적인 삶을 실천하고자 지금 살고있는 지리산으로 함께 이주했다.

Q. 지금 지리산 생활은 어떤가.

지리산 자락에 있는 남원시 산내면은 한국 귀농귀촌의 1번지다. 20년 전부터 귀농운동이 있었다. 40~50대를 중심으로 콘텐츠도 많고, 어린이도 많고 마을공동체 형성이 잘 되어있다. 크게 마을의 원주민, 원주민이 된 이주민, 막 귀촌한 청년 등으로 구분된다. 어쩔 수 없이 세대간 갈등도 있다. 또 외지인이라 배척받기도 하고, 청년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해서 이해하지 못 하는 경우도 있다.

Q. 지리산에서 지내면서 기억에 남는 경험은.

활동이 마을과 맞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자본도 연고도 없이 왔음에도 꾸준히 도와주는 분들이 많다. 요즘은 긍정적으로 뭘 할 수 있을까를 찾고 있는데, 청년끼리 주체적으로 마을 장터를 열고 있다. 손으로 만드는걸 좋아하는 친구는 수공예품을 팔고, 그림을 그리는 친구는 그림을 팔고, 술도 제조해서 팔았다. 작년엔 친구들과 농촌 퀴어 퍼레이드를 기획했다. 코로나19로 도시가 제 기능을 못하고 멈춰 있지 않았나. 농촌에서도 크고 작은 마을의 축제들이 사라졌다. 작은 활력이 되고자 우린 면 단위로 작지만, 전 세대를 어우르는 작은 퀴어퍼레이드 ‘산내 성다양성축제’를 개최했다. 대부분 도시에서 퀴어퍼레이드를 하면 2030세대의 청년 밖에 없는데 우리 마을에서는 학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공연도 보고, 할머니들도 와서 구경하셨다. 여러 퀴어퍼레이드와는 다른, 전 세대를 아우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Q. 지역과 수도권의 차이를 줄이는 방법은 무엇일까.

지역과 수도권의 차이를 줄이는 방법은 연결되기라고 생각한다. 지역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고, 지역이 더 이상 케케 묵은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게 필요하다. 지역을 둘러보면 청년이 정말 많다. 현재 내가 사는 마을에만 20여명의 또래 청년들이 살고 있다.비거니즘과 페미니즘, 젠더 등 여러 가치를 나누며 지내는 친구들이다. 도시에 비해 콘텐츠가 부족하지만 없다고 느끼진 않는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 가면 이 마저도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 마을이 전국에 이러한 농촌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곳이 됐으면 한다.

– 인터뷰 진행 및 정리: 유다인 이음팀 연구원 yoodain@makehop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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