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유서 쓰다 남해 온 ‘준’이 삶을 사랑하는 방법

2025-12-08

누렁이 몽덕이와 희망제작소가 희망을 일구는 사람들을 찾아 방방곡곡을 다닌 원정기 <몽덕 희망 원정대>, 김소민 연구위원이 몽덕이와 함께 좌충우돌 책방 도전기<안 망할지도 몰라, 남해 동네책방>, <몽덕이와 남해 지역살이>를 이어갑니다. 


24살 준(가명)의 등장은 인구 1500명인 경남 남해 상주면에서 ‘사건’이었습니다. 입술에 피어싱, 팔뚝 여기저기 애벌레 문신을 한 이 여자는 2025년 3월부터 동네 카페에서 일합니다. 그의 명치엔 나비 문신이 있습니다. 제가 그걸 아는 까닭은 준이 나비 문신을 해방한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이에요. 배꼽 쪽에서 여미는 민소매 블라우스였습니다. “훌렁 벗고 다니는 애.” 동네 할머니들은 준을 그렇게 부르기도 했어요. 머리를 바짝 밀고 초록색으로 물들인 준은 병든 동네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다 주변 펜션 사장 가족과 친해졌습니다. 해 질 녘, 준은 그 집 앞 계단에 앉아 펜션 사람들과 함께 고양이를 쓰다듬었습니다.


준이 손 위에 올라앉은 개구리를 쳐다보고 있다. ⓒ김소민


보는 사람도 없는데 남 시선 신경 쓰느라 반백 년 동안 배꼽티도 못 입어본 저는 준에게 물었습니다. “그런 옷은 어떻게 입어?” 준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심드렁하게 답했습니다. “왜 못 입어? 그냥 입으면 되지.” “그런 옷 입을 때 브래지어는 어떻게 해?” “안 하는데.” “젖꼭지는 어떻게 해?” “함몰유두라서 괜찮아.”

이상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저는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잘 듣지 못합니다.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가버린 걸 들키지 않으려 연기하거나 ‘저 이야기 뒤에 이런 말을 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우죠. 제게 중요한 건 상대가 아니라 상대에게 제가 어떻게 보일까입니다. 그러면 대화는 어느새 미묘한 평가의 무대가 됩니다. 긴장합니다. 어쩌면 제가 해왔던 건 대화가 아니라 지긋지긋한 독백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준과는 뭔가 달랐습니다. 그의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나’에게서 조금은 해방됩니다. 편안해요. 왜일까?

디자인을 전공하다 휴학한 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소개로 남해로 온 준은 이끼가 자라는 유리상자를 보물처럼 안고 저희 집에 처음 놀러 왔습니다. 유리상자 안에 이끼와 함께 흰색 점처럼 보이는 톡토기들이 살았습니다. “징그럽지 않아?” “귀여운데. 얘들이 있어야 이끼가 더 잘 자란대.”

그날 그는 휴대전화 메모장에 적은 ‘궁금증 리스트’를 제게 보여줬습니다. “왜 세수하고 나면 얼굴이 맑아 보일까?”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과연 그랬습니다. 그는 진지했어요. “각질이 물에 불어서?” 두 번째 궁금증은 꿀벌이었습니다. “벌은 왜 해변으로 날아갈까?” “나는 본 적이 없는데.” “해변에서 벌을 구해준 적이 있어. 바다 습기 때문에 날개가 젖어서 자꾸 아래로 처지더라고. 손에 담아서 숲으로 보내줬어. 여러 번 봤는데.” “바다엔 꽃도 없는데 왜 벌이 그리로 날아가? 죽으려고?” “그러니까.”

그 뒤로 저는 해변을 걸을 때마다 알 수 없는 욕망을 따라 망망대해를 향해 날아가다 날개가 처져버린 벌을 찾습니다. 저는 아직 보지 못했어요. “세 번째 질문, 비가 오고 나서 아스팔트 위에서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봤거든. 죽어가는 지렁이한테 개미들이 달려들고 있었어. 이 지렁이를 살려줘야 할까? 그러면 인간이 개입하는 거잖아.” “그냥 둬야 할 거 같은데.” “그런데 애초에 아스팔트를 깐 건 인간이잖아. 지렁이가 그렇게 죽어가는 게 인간 때문이잖아. 그러면 그 책임도 져야 하지 않아?” 헷갈립니다. “그런 거 같은데. 그러면 그 개입 때문에 개미는 먹이를 잃잖아. 그것도 책임을 져야 하나?” 그날 밤, 우리는 해답을 찾진 못했는데 한참 그 문제에 골몰했습니다. 그날의 대화는 제게 목욕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발가벗고 온탕에 앉아 있는 것처럼 나른하고 상쾌했습니다. 해방의 느낌이었죠. 그 대화엔 판단도, 조언도, 목적도, 과거도, 미래도 그리고 ‘나’도 없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준은 저를 가리키는 지표들, 출신학교, 직업, 소득, 나이 등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똑똑한지, 올바른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준을 읍까지 태워다주는 길에 엔진오일을 간 날, 자동차정비소 사무실에서 커피믹스를 마시며 우리는 어쩌다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섹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가랑비가 내렸습니다. 낡은 매대엔 광고지가 꽂혔고 벽엔 오래된 포스터가 붙었습니다. 준은 벌, 각질, 지렁이를 말하는 목소리 크기로 말합니다. “섹스, 섹스.” 저는 사장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소곤댔습니다. 중년 여자 사장은 컴퓨터만 쳐다봤어요.


 

준이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다.ⓒ김소민


준이 버킷리스트를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누에를 키워보고 싶어.” “실 뽑으려고?” “아니, 누에나방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 누에나방한테는 입이 없는 거 알아?” 준이 누에나방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아!” 처음 본 누에나방은 아리아와 함께 우주에 등장하는 프리마돈나처럼 신비롭고 우아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이보리빛이 살짝 도는 흰색입니다. 넓은 날개엔 잎맥 같은 옅은 무늬가 있습니다. 잎사귀 모양 더듬이 아래 검고 큰 눈이 반짝였습니다. 입이 없는 누에나방은 짝짓기가 끝나고 알을 낳을 때까지 일주일 남짓 삽니다. 준의 버킷리스트 두 번째는 국립중앙박물관 분장대회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올해 1위를 차지한 팀은 신라 금귀고리를 온몸으로 표현했죠. 금색 타이츠를 입고 금박으로 덮은 드럼통 같은 걸 쓴 두 남자가 게걸음으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궁금증과 몰입으로 증류해낸 즐거움으로 두 남자는 기꺼이 쓸데없는 귀고리가 됐습니다. 준과 이야기하다보면, 위계나 카테고리가 사라지고 개별자만 남습니다. 제가 스쳐 지나가버린 삶의 경이가 사금파리처럼 반짝입니다.

준은 2형 양극성장애가 있습니다. 매일 꼭 먹어야 하는 약들이 있습니다. 남해에 오기 전 그는 한동안 죽음에 대한 책만 읽었답니다. 그러다 실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유서를 쓰기 시작했죠. “그런데 쓰기가 너무 힘든 거야. 고민해야 할 게 너무 많아. 예를 들면, 내 아이패드를 누구한테 유산으로 줄까. 동생한테 주면 쓸까?” 유서 쓰는 기간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사이 편의점 아르바이트 자리를 잡았고, 재즈댄스를 배웠습니다. 그러다보니 계속 살았죠. 유서는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 “죽음에 대해 항상 생각할 때 말이야. 모든 생명이, 개미도 민달팽이도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아, 너희도 생명이구나. 나랑 똑같이 소중한 생명이구나.”

준은 셋집 발코니에 앉아 개, 새, 바람 소리를 듣습니다. “고요해. 자연은 모든 게 좋아. 나는 바퀴벌레도 만질 수 있어.” “‘죽고 싶다’까지는 아니지만 ‘왜 사는지’는 모르겠고, 미래라는 것이 당도할 때까지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아침에 약을 먹고 출근해 커피를 내리고, 제 눈엔 징그러운 애벌레들을 그립니다. 저는 준이 삶을 사랑하지 않을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P.S  이 글을 올리기 전 준에게 보여줬어요. 빼고 싶은 거 빼라고 했어요. “준, 그런데 함몰유두 정말 써도 되겠어?” “왜 안돼? 함몰유두가 어때서?” 


글: 김소민 희망제작소 시민연결팀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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