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회원 프로그램

오전10시 40분 용인 도착, ‘장욱진 고택’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장욱진! 이름만 들어도 대한민국 4대 근현대화가의 위용이 전해진다. 바로 그 장욱진 화백의 고택. 고택은 장화백이 1986년부터 1990년 타계할 때까지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다. 조선시대 후기 경기도 민가의 전형적인 형태로 건축학적인 가치가 매우 커서, 2008년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244-2 장욱진 고택. 워낙 외진 곳에 있어서 사람들은 여기가 어디인지 그냥 스쳐갔을 것같다. 고택은 용인의 주택가 한복판에 서 있었다. 세월의 무게를 오롯이 품고 있는 전통 가옥의 당당함과 단아함과는 달리, 주변은 난개발로 아파트와 빌라로 둘러 싸여 있었고 한창 진행 중인 공사 현장의 소음과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공사 자재들이 눈에 띄었다.

그 어울리지 않는 주변 풍경이 다소 을씨년스러워 보일지라도, 장욱진 고택은 전통의 양식을 보존한 채로 2011년 새해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장경수 교수가 들려주는 ‘영원한 그리움, 내 아버지’

고택에 들어서서 잠시 둘러본 후 추위를 피하기 위해 실내로 이동했다. 장욱진 화백의 장녀인 장경수 전 이대 교수는 그리운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더듬었다.

장욱진 화백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에게까지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 여느 화가가 그러하듯, 그도 오직 그림 그리는 것 그 하나 만이 인생의 큰 낙이었고, 술을 무던히도 좋아한 애주가였다. 지금은 예술가 대접을 받지만 어려웠던 시절 예술이 다 무엇이랴. 그도 돈에 쪼들리던 시절이 있었고 항상 자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 만큼 더 가족을 사랑했을 것이다. 다행히 부인이 혜화동로터리에 동양서림 책방을 운영해 그림도 계속 그리고 가족들도 성장할 수 있었다.

장화백의 가족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 하나. 지난 64년 장화백이 덕소에 머무르던 시절. 토요일 오후에 자녀들이 기차를 타고 덕소에 갈 때면 전등을 들고 나와 환영을 해줄 정도로 가족을 사랑했다. 혹시 자녀들이 덕소를 가지 못할 경우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많이 아른거렸다고 회상한다.

장회백은 가족 그림도 많이 그렸는데 항상 본인은 조그맣게 그렸다고 한다. 가장으로서의 미안한 마음이었으리라. 소박하고 언행이 일치했던 분으로, 특별히 같이 그림 그리던 문하생들에게 ‘제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오로지 ‘화생’이라고 하셨단다. 같은 방에서 함께 그림 그리는 식구들이라고 생각하신 거겠지. 장화백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진다.

아버지 장회백의 추억을 그리면서 고택을 둘러보았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나 장욱진 화백의 체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고, 기둥 하나 현판 하나, 나무 한 그루가 모두 저마다의 추억을 갖고 있었다.

觀自得齋-볼 관(觀), 스스로 자(自), 얻을 득(得), 재실 재(齋), 사물을 외형으로부터 관찰해 자신의 내면으로까지 끌고 들어가면 얻는 바가 있으리라.

오후1시 40분 <백남준아트센터>

점심 식사 후 세계 최초 비디오 아티스트인 백남준을 만나러 백남준 아트센터로 향했다. 이영철 관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트센터는 2008년 10월 백남준의 작품을 보존, 계승하기 위해 경기문화재단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여러 겹의 거울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2003년 국제현상설계공모를 통해 뽑힌 독일인 크리스텐 쉐멜의 「매트릭스」라는 작품을 기반으로 마리나 스탄코빅이 설계했다. 외형은 그랜드 피아노를 본떠 만들었는데, 이것은 1959년 백남준이 「존 케이지에게 바침」이라는 제목의 퍼포먼스에서 피아노를 부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영철 관장은 “ 백남준은 동서고금을 하나로 수렴한 21C 예술의 칭기스칸이다. 그에게는 예술이 지구를 내비게이션하면서 굿뉴스를 주는 것으로, 달은 가장 오래된 TV이며 생태계를 테크놀로지와 예술로 승화했다” 면서 “TV(Tele 멀리/ vision 본다)를 갖고 예술활동을 하는 것은 몽골리안의 DNA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현재 이곳의 주제는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다. 관람을 하면서도 어떤 작품은 어디선가 본 듯했고, 어떤 작품은 생경했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이자 20세기를 풍미한 파격적인 예술가였던 백남준. 이곳 아트센터에서 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기계를 이용해 우리는 텔레비전 수상기 캔버스를
레오나르도 만큼 정확하게
피카소 만큼 자유롭게
르느와르 만큼 다채롭게
몬드리안 만큼 심오하게
폴록 만큼 난폭하게
스퍼 존스 만큼 서정적으로 만든다.“
-백남준 어록 中-

글 : 회원재정센터 윤현석 인턴연구원
사진 : 사무국 권호현 인턴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