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디자이너 인터뷰 시리즈』는 자신이 발 딛고 선 지역에서, ‘먹고사는 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소셜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공익 활동이나 창업이라는 익숙한 틀을 넘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결해온 새로운 시민들. 희망제작소는 이들을 ‘소셜디자이너’로 호명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묻고 싶습니다. 작은 실천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바꾸고, 그 변화가 다시 지역을 움직이는 힘이 되는지. 이 인터뷰 시리즈가 또 다른 누군가의 상상과 실천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제주어가 무시거까? 이주민 엄마들이 제주어 연구자가 된 까닭”
헤삭이탐라 계유진, 박영신, 박순조 @제주
“훗썰 덜어줍서” 제주 오일장에서 장을 보던 어느 날, 용기내어 낯선 억양으로 건넨 말에 상인의 덤이 얹어집니다. “내 제주어도 통하는구나!” 드디어 주민으로 인정받았다는 기쁨과 만족에서 시작된 작은 호기심이 곧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왜 정작 제주에 사는 아이들은 제주어로 이 말을 할 수 없을까?
서로 다른 이유로 제주에 자리 잡은 세 여성이 그 질문 앞에 모였습니다. 대학 병원 간호사로 일하다 제주 그림책을 만나 제주어에 관심이 생긴 계유진(대표), 공대를 졸업해 냉장고 설계도를 그리던 공학도 출신 박영신(팀원), 법학을 전공하고 교직을 거쳐 그림책 작업을 시작했던 박순조(팀원). 이주민, 학부모, 경력단절 이라는 공통점 때문이었을까요? 서로의 경력과 배경을 잘 알지 못했지만 ‘잘 통한다’는 느낌으로 똘똘 뭉쳐 ‘헤삭이탐라’팀에 합류했습니다. '헤삭이'는 만족스럽게 살짝 웃는 모습을, '탐라'는 제주를 뜻하는 제주 방언입니다.
세 사람은 제주어를 학습하며 교육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제주도 원주민이 아니기에, 오히려 아이의 눈높이에서 더 새롭게 전할 수 있어 매력적입니다. 헤삭이탐라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보드게임. 제주어와 민속 문화를 엮어 만든 게임을 교실에 펼치면,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동전이 좋았어요”, “이 단어가 재밌었어요”라며 구체적인 피드백을 쏟아냅니다.
누군가는 “토박이도 하지 않는 일을 왜 하냐”고 묻지만, 이들은 각자의 이유, ‘why(왜)’가 있기에 헤삭이탐라 활동을 이어갑니다. 아이에게 엄마도 해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 함께 울고 웃으며 활동해온 팀과의 의리, 끝을 보고 싶다는 승부욕. 각자의 삶 속에서 길어 올린 Why가 모여, 이들은 오늘도 언어를 놀이와 관계 속에 불러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시작된 필요를 지역의 문제 해결로 확장해온 모습에 ‘소셜디자이너’라는 말이 절로 떠오릅니다. 제주어를 매개로 이주민과 원주민, 어르신과 아이, 서울과 지역을 ‘연결’하는 소통의 기술 전문가, 헤삭이탐라의 계유진, 박영신, 박순조 세 사람을 지난 8월 21일, 제주에서 만났습니다.

헤삭이탐라의 박순조 팀원, 계유진 대표, 박영신 팀원(사진 맨 왼쪽부터) ⓒ희망제작소
토박이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 간절하게, 제주어를 배우고 알리는 이유
- 세 분의 사이가 무척 좋아보여요! 끈끈한 연결의 고리가 눈으로 보이는 것 같달까요? 어떻게 만나 함께하게 되셨나요?
= 유진 : 인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을 시작했어요. 제주로 이주한 지 7년차인데, 이주 초기에는 집 앞의 삼춘과 대화할 때 제주어를 알아듣지 못해 불편함이 있어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하게 지내던 학부모 언니가 토박이였는데, 멋진 언니라 제주어가 더 멋져보이기도 했고요(하하). 이후 제주에서 소소하게 책놀이 수업하다가,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에서 발간한 <허허허, 사노렌>이라는 책을 알게 됐어요. 제주어로 쓰인 책인데, 소개만 해도 이렇게 눈물이 글썽일만큼 큰 감동을 받았어요. 표준어였다면 이런 울림은 없었을 것 같아요. 이 감동을 다른 이주 부모들과 나누고 싶었고, 그러려면 함께하는 팀이 필요했죠. 그래서 2023년에 제주어 연구와 보급을 본격적으로 고민하면서 ‘헤삭이탐라’라는 팀을 만들고 두 분께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을 했죠.
= 영신 : 저는 공대를 졸업해서 냉장고 연구소에서 설계도를 그리던 공학도 출신이예요. 제주 거주는 3년차인데, 사실 처음에는 제주어 자체보다는 ‘보드게임’이라는 도구에 끌려 합류했어요. 원래 뭐든 구조화하고 설계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제주어라는 언어를 게임으로 풀어낼 수 있다면 제가 가진 전공 경험도 살려볼 수 있겠다 싶었어요.
= 순조 : 저는 이주 8년 차예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회사를 다니다 경력단절을 겪었죠. 사실 저희 가족은 ‘기후 난민’이기도 해요. 아이가 천식이 심해서 제주로 내려왔거든요. 다행히 많이 회복되었고 어느정도 키우고 나니, 저도 ‘뭔가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는 여유가 생겼어요. 그 무렵 동네 할망들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제주어의 매력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는데, 학부모 커뮤니티에서 대표님을 만났죠.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홀로 제주어 연구에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고, 뭐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팀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 모든 구성원이 원주민이 아닌데 제주어를 알리는 활동을 하신다는 점이 흥미롭네요.
= 유진 : ‘찐’ 제주어를 들으면 정말 외국어처럼 느낄 수도 있어요. 실제로 제주 안에서도 지역마다 사용하는 단어나 억양이 달라서, 그냥 산다고 저절로 알기엔 한계가 있거든요. 모든 언어가 그렇듯, 꾸준히 공부해야만 알 수 있는 부분이 훨씬 많아요. 저도 주말마다 제주어보존회에 운영하는 수업에 다니는데, 20대부터 80대까지 50명에 가까운 분들이 함께 배우고 있어요. 생각보다 많죠?
꾸준히 배우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죠. 특히 제주라는 지역 특성 때문에요. 저희 셋만 해도 사는 동네가 다 다르고 거리가 꽤 멀어요. 제주에서는 차로 30분 걸리면 ‘엄청 멀다’고 느껴지거든요. 그런데도 기회가 많지 않다보니 수업을 위해 차로 1시간씩 가야할 때도 있어요. 그럼 생활권 끝과 끝일 때도 있죠. 게다가 각자 아이도 돌봐야 하고 본업을 해야할 때도 있어서, 시간을 쪼개 공부하러 다니는 게 쉽지 않아요.
특히 일상에서 제주어가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게 굉장히 큰 문제에요. 없어도 생활에 큰 불편이 없다 보니 토박이분들조차 위기감을 잘 못 느끼시고, “굳이 지켜야 하냐”는 시선도 있어요. 그렇다 보니 저희는 오히려 더 ‘왜 제주어를 지켜야 하지?’라는 질문을 붙들게 됐고, 그 고민이 결국 ‘헤삭이탐라’ 활동으로 이어지게 됐어요. 토착민이 아니다 보니 더 간절하게 배우게 되고, 아이들 눈높이에서 “이건 왜 이렇게 어렵지?” 하고 짚어낼 수 있더라고요. 오히려 우리니까 제주어를 더 쉽고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 제주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사투리를 일부러 고치기도 하잖아요. 개인의 노력으로 소멸해가는 언어를 되살린다니,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은데요. 헤삭이탐라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쉽지 않았겠어요.
= 유진 : 시작은 제 개인적인 일상에서 시작된 작은 질문이었어요. 뉴스에서 “소멸 위기 제주어를 보존하기 위해 몇십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는 소식을 봤거든요. 제 주변을 돌아보니, 제주어를 일상적으로 쓰는 사람은 거의 없더라고요. 제주에서 나고 자란 학부모들에게 물어봤는데 본인은 부모,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종종 쓰곤하지만, 아이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그 순간 의문이 생겼죠. ”그 많은 예산은 어디에 쓰이고 있는 거지?”
여러 사람에게 묻고, 작은 프로젝트들로 실험을 해보니 이런 결론을 얻었어요.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방법이 잘못된 거였구나. 곧장 2023년에 제주특별자치도소통협력센터에서 진행한 ‘제주생활탐구’ 프로젝트에 지원했죠.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제주어 인식 조사를 하고, 보존회 같은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헤삭이탐라 활동을 시작했어요.
- 헤삭이탐라가 찾은 ‘제주어를 보존해야하는 이유(why)’는 무엇인가요?
= 유진 : 전통적인 언어 연구 단체의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는 이유와 크게 다르진 않아요. 언어는 문화를 담는 그릇이고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니까 지켜야 한다, 이게 출발점이거든요. 다만 그걸 풀어내는 방식에 저희만의 시선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소멸을 늦추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가설을 가지고 있어요. 제주어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쓰이면, 그만큼 역사와 문화도 천천히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불씨를 지피는 일’이에요. 누구나 쉽게 제주어를 접하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도록 방법을 만들고, 일상 속에서 작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 불씨가 여기저기 번져나가도록 하는 게 제가 찾은 Why예요.
= 순조 : 외지인이 무슨 자격으로 제주어 활동을 하냐”는 말을 들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때 저는 이렇게 대답해요. “외지인은 제주어에 관심 가지면 안 되나요? 자격이 필요한가요? 그렇다면 토박이들은 왜 안 하나요?” 지금은 누가 하느냐보다, 누군가가 ‘한다’는 게 중요한 시기잖아요. 관심이 있고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이 먼저 움직이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 영신 : 저는 ‘소통’을 위해서 제주어를 보존해야한다고 답하고 싶어요. 이주민으로 살다 보면 “너희는 모르잖아”라는 눈빛을 종종 느껴요. 그럴 때 더 이 지역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커지죠. 그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언어라고 생각해요. 소소하게는 시장에서 제주어로 물을 때 한 번 더 쳐다보시고, 깎거나 덤을 얹어 주시기도 하잖아요. 그런 작은 효능감이 쌓이면 소속감이 되고, 결국 지역 문제에도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 수 있지 않을까요?
- 늘 즐겁게 활동하시는 것 같지만, 어떤 일이든 기쁨과 슬픔이 있잖아요. 어떤 순간이 가장 힘드신가요?
= 유진 : 제일 어려운 건 결국 사람이죠. 마음 맞는 동료를 찾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초창기엔 지금과 다른 분들이 함께했는데, 이게 직장이 아니라 개인적인 관심에서 시작된 활동이다보니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시는 경우가 많았어요. 제가 급여를 줄 수도 없는 상황이니까 생계나 본업 때문에 떠나겠다고 하시면 붙잡을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렇게 몇 번이나 팀이 흩어지고 다시 꾸려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지치기도 하고, 솔직히 주눅들 때도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순조, 영신 님이 합류하면서 각자 잘하는 걸 신나서 맡아주니 팀워크가 너무 좋아요. “이 멤버들을 만나려고 그 시간을 겪었구나” 싶을 만큼요. 가끔 “내가 뭘 위해 이걸 하고 있지?” 생각이 들 땐 여전히 힘들긴 하죠. 외향적인 성격이라 바쁘게 뛰어다니고는 있지만, 어느 순간 공허감이 확 몰려올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마다 지금 같이하는 팀원들을 떠올려요. 이 멤버들이랑 오래 즐겁게 활동하려면, 더 안정적인 사업과 조직을 만들어야겠다. 그 생각이 다시 힘을 주는 것 같아요.
= 순조 : 저는 아이를 혼자 돌보면서 또 다른 본업을 하고 있어서 대표님처럼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늘 미안한 마음이 있죠. 제주에서 유진 대표님이 안 들어간 제주어 수업이 없을 정도로 열정적이세요. 필요하다고 하면 우도까지 배 타고 가시니까요. 그 마음이 진짜 대단하죠. 제가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계속 참여하는 이유는 ‘다음’이 기대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번에 보드게임이라는 첫 결과물이 나왔잖아요. 근데 저한테는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거든요. 예산이랑 일정상 아직 하지 못한 게 더 많아요. 다음엔 또 어떤 도구를 만들까, 이걸 어떻게 발전시켜서 새로운 수업을 만들까… 이런 상상이 계속되는 게 즐거워서 계속 함께하고 싶더라고요.

제주어 활용프로그램으로 아동·청소년이 제주어에 관심을 갖게 만들기 위해 개발한 보드게임 ‘탐탐판놀이’ ⓒ헤삭이탐라
놀다 보면 저절로 배우는 제주어, 아이들의 웃음 속에서 살아나는 말과 문화
- 헤삭이탐라가 만든 제주어 교육 보드게임, ‘탐탐판놀이’를 소개해주세요.
= 순조 : 제주에는 초등학교 한 학기에 한 시간씩 제주어 필수 수업이 있어요. 그런데도 이주민 아이나 토박이 아이나 제주어 수준은 비슷합니다. 거의 모르죠. 수업 방식도 오랫동안 바뀌지 않아서 예전 외국어 교육처럼 주입식이에요. “I am a boy(나는 남자예요)” 하면 “You are a girl(난 여자예요)”이 바로 따라 나오는 식이죠.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희는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를 기준으로 삼았어요. 일방적인 수업이 아니라 참여형, 자기주도형으로 배울 수 있는 보드게임 ‘탐탐판놀이’를 만들었죠. 카카오제주임팩트챌린지에 참여해서 역량강화 교육도 받고, 문제 해결 활동비를 지원받으면서 개발할 수 있었고요.
게임 방식은 부루마블처럼 칸을 이동하면서 미션을 수행하는 거예요. 단순히 주사위 굴리고 끝나는 게 아니라, 대장간·연못·마을나무·관청 같은 제주 전통 공간과 문화를 제주어와 함께 배우도록 구성되어 있어요. 또 친구들과 소통하면서 수행해야 하는 미션카드도 넣어서, 자연스럽게 말하고 웃으며 제주어를 익히도록 했고요. 실물 제작 과정에서도 ‘공감’과 ‘몰입’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손으로 만졌을 때 촉감이 좋도록 비싼(하하) 천과 엽전을 제작했고, 색감도 쨍한 색 대신 제주의 자연 같은 포근한 톤으로 디자인했고요. 아이들은 보고 만지고 느끼면서 배울 때 훨씬 잘 기억하거든요.
= 유진 : 정식 발매를 앞두고 시제품을 가지고 초등학교에서 몇 번 수업을 해봤는데 반응이 정말 뜨거웠어요. 아이들이 “한 번만 더 하자”고 할 정도로 몰입하고,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재밌게 제주어를 익히는 모습을 보니 너무 기쁘다”고 하시더라고요. 성읍민속마을에서는 여행자나 이주민 대상으로 시연했는데, “관광상품으로 나오면 꼭 사고 싶다”는 반응도 있었어요. 무엇보다 지역 안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 많아요. 제주어보존회나 연구회 같은 단체에서도 저희 활동을 응원해주고, 적극적으로 자문도 해주시거든요. 이걸로 무언가 더 열심히, 적극적으로 해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어요.
- 콘텐츠부터 구성품까지 곳곳에 신경 쓴 흔적이 보여요. 전공자도, 업계 종사자도 아닌데 보드게임을 만든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 순조 : 저희 셋 다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보드게임을 만들자”는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과정 하나하나가 다 처음이라 진짜 힘들었어요. 판매가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제작 업체는 어떤 기준으로 골라야 하는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죠. 게다가 제주에는 이런 걸 만들어줄 업체도 많지 않아서 모든 게 발품을 팔아야 하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대표님이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일일히 전화해서 직접 찾아가고, 필요하면 비행기 타고 서울까지 올라가서 물품을 구매해오기도 하고요.
= 영신 : 정말 맨 땅에 헤딩하듯이 하나하나 부딪히면서 조금씩 완성해온 거예요. 재미도 있었지만 자발적으로 하는 일인데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벅찰 때도 많았거든요. 그래도 꼭 완성된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버텼어요. 개인적으로는 제 아이들에게 실물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컸고요. “엄마가 집에 없을 때 밖에서 뭐 하는지 궁금했지? 너희랑 재미있게 놀고, 제주에서 함께 잘 살아보려고 이렇게 노력했어.”
- 정말 고생 많으셨네요. 그만큼 보람된 순간도 많을 것 같아요. 보드게임을 가지고 교실에 가니 느껴지는 변화가 있던가요?
= 순조 : 제주어 교육을 준비하면서 한 아이를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지역 토착민의 자녀였는데 “제주어 배워서 쓸 데도 없는데 이 수업 듣느라 딴 거 못하니까 싫어요”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더 느꼈죠. 기록만으로는 안 되고,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구나. 아이들이 제주어를 배우는 경험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걸요.
= 영신 : 저희가 보드게임을 들고 들어가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요. 꺼내는 순간 “우와!” 하면서 눈이 반짝이거든요. 수업이 끝날 때 “딱 한 판만 더 하면 안 되냐”는 반응도 나오고요. 아이들은 흘려듣는 것 같고 관심 없어 보여도 다 귀를 열고 있어요. 육아의 경험에서 얻은 확신이 있죠(하하) 특히 놀면서 들으면 더 거부감 없이 마음을 열거든요.
- 유진 : 이런 생각도 들어요. 토착민 선생님을 고용하는 게 좋은 면도 있죠. 문화적으로도 더 가깝고, 언어도 더 자연스럽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우리만의 관점으로 제주어를 바라보고, 또 우리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풀어내는 교육을 기획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전략인거죠. 단순히 게임만 하는 게 아니라 “같은 단어도 왜 제주는 다르게 말하는지”, “왜 사라져가는 제주어를 보존해야하는지”까지 교육 자료를 직접 만들어 설명하거든요.
= 순조 : 맞아요, 그리고 아이들은 정말 구체적으로 의견을 줘요. 예를 들어 게임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게 옆 친구 생각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거나, 새로 배운 어떤 단어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거나. 복도에서 만나면 말은 안 되지만 수업에서 배운 단어 오라방, 어멍, 아시… 이런 말을 외치면서 저희를 부르기도 하고요.

보드게임 ‘탐탐판놀이’를 활용하여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제주어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헤삭이탐라
제주어가 낯설지 않은 세상, 그게 우리가 바라는 변화
- ‘탐탐판놀이’가 곧 정식 출판된다고요? 앞으로 더 바빠지시겠어요.
= 유진 : 지금 헤삭이탐라는 네 명이 활동 중인데, 기획팀과 교육팀으로 나눠서 움직이고 있어요. 각자 오래 버틸 수 있도록 역량을 키우면서 수익 기반을 잘 마련하는 게 제일 큰 목표예요. 아직은 제대로 된 월급까지는 못 드리고 있어서 늘 미안하고 속상한 마음이 있거든요.
보드게임을 어렵게 완성했지만, 출시를 준비하려니 또 다른 벽이 곳곳에 있더라고요. 저작권, 특허 같은 문제도 챙겨야 하고, 학교 납품을 하려면 KC인증도 받아야 한대요. 그래서 요즘은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좀 알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하며 배우고 있습니다(하하). 만들었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안정화까지 가는 과정이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지금 가장 어려운 건 이 아이디어를 실제로 쓸 ‘당사자’를 찾는 거예요. 시민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초기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이나 제도는 있지만, 시장에 내놓기 위해 필요한 내용들, 예를 들어 상품 정보를 어떻게 기재해야 하는 지에 대한 정보는 부족해요. 그 부분을 저희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게 가장 큰 걱정이죠.
- 헤삭이탐라를 통해 제주어를 만난 사회가 어떻게 달라지길 바라세요?
= 유진 : 저는 ‘4050 토박이 세대’가 제주어 보전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이들의 윗세대는 제주어를 여전히 쓰지만, 아랫세대는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과도기에 있는 그룹이거든요. 그런데 4050 세대가 부모 세대와 아이 세대를 잇기 위해 제주어 교육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그 순간부터는 언어뿐 아니라 문화와 역사까지도 함께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회를 만들려면 늘 나만의 ‘Why’(이유)를 찾는 게 중요하죠. 사회 문제 해결을 업으로 삼는다는 게 결코 쉽지 않거든요.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이유가 분명할수록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도 모이고, 도움도 연결된다고 믿거든요.
= 영신 : 제주에서 5년, 10년 정도 살다 떠나는 분들이 정말 많아요. 결론은 늘 ‘소통’ 때문으로 모아져요.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대화가 줄고, 대화가 없으니 이해도 부족해지는 거죠. 갈등이 생기거나 문제가 생겨도 해결이 어렵고요. 이런 한계가 때론 ‘텃세’로 비춰지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주민이 언어 문제에서 오는 불편을 덜고, 지역사회에서 당당하게 한 사람의 도민으로 살아가는 사회를 꿈꿔요.
= 순조 : 드라마에선 전라도, 경상도 사투리도 자막 없이 다 알아듣고 따라 하잖아요. 그런데 왜 제주어는 여전히 낯설고 외국어 취급을 받을까요? 저는 제주어가 한국 사회의 다양한 지역 언어 중 하나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바라고 있어요. 그게 결국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로 이어질 거라 믿어요.
인터뷰 및 정리: 희망제작소 사회혁신팀 최나현 선임연구원, 이혜진 연구원, 안영삼 팀장

『소셜디자이너 인터뷰 시리즈』는 자신이 발 딛고 선 지역에서, ‘먹고사는 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소셜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공익 활동이나 창업이라는 익숙한 틀을 넘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결해온 새로운 시민들. 희망제작소는 이들을 ‘소셜디자이너’로 호명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묻고 싶습니다. 작은 실천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바꾸고, 그 변화가 다시 지역을 움직이는 힘이 되는지. 이 인터뷰 시리즈가 또 다른 누군가의 상상과 실천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제주어가 무시거까? 이주민 엄마들이 제주어 연구자가 된 까닭”
헤삭이탐라 계유진, 박영신, 박순조 @제주
“훗썰 덜어줍서” 제주 오일장에서 장을 보던 어느 날, 용기내어 낯선 억양으로 건넨 말에 상인의 덤이 얹어집니다. “내 제주어도 통하는구나!” 드디어 주민으로 인정받았다는 기쁨과 만족에서 시작된 작은 호기심이 곧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왜 정작 제주에 사는 아이들은 제주어로 이 말을 할 수 없을까?
서로 다른 이유로 제주에 자리 잡은 세 여성이 그 질문 앞에 모였습니다. 대학 병원 간호사로 일하다 제주 그림책을 만나 제주어에 관심이 생긴 계유진(대표), 공대를 졸업해 냉장고 설계도를 그리던 공학도 출신 박영신(팀원), 법학을 전공하고 교직을 거쳐 그림책 작업을 시작했던 박순조(팀원). 이주민, 학부모, 경력단절 이라는 공통점 때문이었을까요? 서로의 경력과 배경을 잘 알지 못했지만 ‘잘 통한다’는 느낌으로 똘똘 뭉쳐 ‘헤삭이탐라’팀에 합류했습니다. '헤삭이'는 만족스럽게 살짝 웃는 모습을, '탐라'는 제주를 뜻하는 제주 방언입니다.
세 사람은 제주어를 학습하며 교육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제주도 원주민이 아니기에, 오히려 아이의 눈높이에서 더 새롭게 전할 수 있어 매력적입니다. 헤삭이탐라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보드게임. 제주어와 민속 문화를 엮어 만든 게임을 교실에 펼치면,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동전이 좋았어요”, “이 단어가 재밌었어요”라며 구체적인 피드백을 쏟아냅니다.
누군가는 “토박이도 하지 않는 일을 왜 하냐”고 묻지만, 이들은 각자의 이유, ‘why(왜)’가 있기에 헤삭이탐라 활동을 이어갑니다. 아이에게 엄마도 해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 함께 울고 웃으며 활동해온 팀과의 의리, 끝을 보고 싶다는 승부욕. 각자의 삶 속에서 길어 올린 Why가 모여, 이들은 오늘도 언어를 놀이와 관계 속에 불러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시작된 필요를 지역의 문제 해결로 확장해온 모습에 ‘소셜디자이너’라는 말이 절로 떠오릅니다. 제주어를 매개로 이주민과 원주민, 어르신과 아이, 서울과 지역을 ‘연결’하는 소통의 기술 전문가, 헤삭이탐라의 계유진, 박영신, 박순조 세 사람을 지난 8월 21일, 제주에서 만났습니다.
헤삭이탐라의 박순조 팀원, 계유진 대표, 박영신 팀원(사진 맨 왼쪽부터) ⓒ희망제작소
- 세 분의 사이가 무척 좋아보여요! 끈끈한 연결의 고리가 눈으로 보이는 것 같달까요? 어떻게 만나 함께하게 되셨나요?
= 유진 : 인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을 시작했어요. 제주로 이주한 지 7년차인데, 이주 초기에는 집 앞의 삼춘과 대화할 때 제주어를 알아듣지 못해 불편함이 있어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하게 지내던 학부모 언니가 토박이였는데, 멋진 언니라 제주어가 더 멋져보이기도 했고요(하하). 이후 제주에서 소소하게 책놀이 수업하다가, 제주어르신그림책학교에서 발간한 <허허허, 사노렌>이라는 책을 알게 됐어요. 제주어로 쓰인 책인데, 소개만 해도 이렇게 눈물이 글썽일만큼 큰 감동을 받았어요. 표준어였다면 이런 울림은 없었을 것 같아요. 이 감동을 다른 이주 부모들과 나누고 싶었고, 그러려면 함께하는 팀이 필요했죠. 그래서 2023년에 제주어 연구와 보급을 본격적으로 고민하면서 ‘헤삭이탐라’라는 팀을 만들고 두 분께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을 했죠.
= 영신 : 저는 공대를 졸업해서 냉장고 연구소에서 설계도를 그리던 공학도 출신이예요. 제주 거주는 3년차인데, 사실 처음에는 제주어 자체보다는 ‘보드게임’이라는 도구에 끌려 합류했어요. 원래 뭐든 구조화하고 설계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제주어라는 언어를 게임으로 풀어낼 수 있다면 제가 가진 전공 경험도 살려볼 수 있겠다 싶었어요.
= 순조 : 저는 이주 8년 차예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회사를 다니다 경력단절을 겪었죠. 사실 저희 가족은 ‘기후 난민’이기도 해요. 아이가 천식이 심해서 제주로 내려왔거든요. 다행히 많이 회복되었고 어느정도 키우고 나니, 저도 ‘뭔가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는 여유가 생겼어요. 그 무렵 동네 할망들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제주어의 매력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는데, 학부모 커뮤니티에서 대표님을 만났죠.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홀로 제주어 연구에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고, 뭐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팀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 모든 구성원이 원주민이 아닌데 제주어를 알리는 활동을 하신다는 점이 흥미롭네요.
= 유진 : ‘찐’ 제주어를 들으면 정말 외국어처럼 느낄 수도 있어요. 실제로 제주 안에서도 지역마다 사용하는 단어나 억양이 달라서, 그냥 산다고 저절로 알기엔 한계가 있거든요. 모든 언어가 그렇듯, 꾸준히 공부해야만 알 수 있는 부분이 훨씬 많아요. 저도 주말마다 제주어보존회에 운영하는 수업에 다니는데, 20대부터 80대까지 50명에 가까운 분들이 함께 배우고 있어요. 생각보다 많죠?
꾸준히 배우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죠. 특히 제주라는 지역 특성 때문에요. 저희 셋만 해도 사는 동네가 다 다르고 거리가 꽤 멀어요. 제주에서는 차로 30분 걸리면 ‘엄청 멀다’고 느껴지거든요. 그런데도 기회가 많지 않다보니 수업을 위해 차로 1시간씩 가야할 때도 있어요. 그럼 생활권 끝과 끝일 때도 있죠. 게다가 각자 아이도 돌봐야 하고 본업을 해야할 때도 있어서, 시간을 쪼개 공부하러 다니는 게 쉽지 않아요.
특히 일상에서 제주어가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게 굉장히 큰 문제에요. 없어도 생활에 큰 불편이 없다 보니 토박이분들조차 위기감을 잘 못 느끼시고, “굳이 지켜야 하냐”는 시선도 있어요. 그렇다 보니 저희는 오히려 더 ‘왜 제주어를 지켜야 하지?’라는 질문을 붙들게 됐고, 그 고민이 결국 ‘헤삭이탐라’ 활동으로 이어지게 됐어요. 토착민이 아니다 보니 더 간절하게 배우게 되고, 아이들 눈높이에서 “이건 왜 이렇게 어렵지?” 하고 짚어낼 수 있더라고요. 오히려 우리니까 제주어를 더 쉽고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 제주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사투리를 일부러 고치기도 하잖아요. 개인의 노력으로 소멸해가는 언어를 되살린다니,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은데요. 헤삭이탐라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쉽지 않았겠어요.
= 유진 : 시작은 제 개인적인 일상에서 시작된 작은 질문이었어요. 뉴스에서 “소멸 위기 제주어를 보존하기 위해 몇십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다”는 소식을 봤거든요. 제 주변을 돌아보니, 제주어를 일상적으로 쓰는 사람은 거의 없더라고요. 제주에서 나고 자란 학부모들에게 물어봤는데 본인은 부모,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종종 쓰곤하지만, 아이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그 순간 의문이 생겼죠. ”그 많은 예산은 어디에 쓰이고 있는 거지?”
여러 사람에게 묻고, 작은 프로젝트들로 실험을 해보니 이런 결론을 얻었어요.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방법이 잘못된 거였구나. 곧장 2023년에 제주특별자치도소통협력센터에서 진행한 ‘제주생활탐구’ 프로젝트에 지원했죠.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제주어 인식 조사를 하고, 보존회 같은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헤삭이탐라 활동을 시작했어요.
- 헤삭이탐라가 찾은 ‘제주어를 보존해야하는 이유(why)’는 무엇인가요?
= 유진 : 전통적인 언어 연구 단체의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는 이유와 크게 다르진 않아요. 언어는 문화를 담는 그릇이고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니까 지켜야 한다, 이게 출발점이거든요. 다만 그걸 풀어내는 방식에 저희만의 시선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소멸을 늦추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가설을 가지고 있어요. 제주어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쓰이면, 그만큼 역사와 문화도 천천히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불씨를 지피는 일’이에요. 누구나 쉽게 제주어를 접하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도록 방법을 만들고, 일상 속에서 작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 불씨가 여기저기 번져나가도록 하는 게 제가 찾은 Why예요.
= 순조 : 외지인이 무슨 자격으로 제주어 활동을 하냐”는 말을 들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때 저는 이렇게 대답해요. “외지인은 제주어에 관심 가지면 안 되나요? 자격이 필요한가요? 그렇다면 토박이들은 왜 안 하나요?” 지금은 누가 하느냐보다, 누군가가 ‘한다’는 게 중요한 시기잖아요. 관심이 있고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이 먼저 움직이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 영신 : 저는 ‘소통’을 위해서 제주어를 보존해야한다고 답하고 싶어요. 이주민으로 살다 보면 “너희는 모르잖아”라는 눈빛을 종종 느껴요. 그럴 때 더 이 지역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커지죠. 그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언어라고 생각해요. 소소하게는 시장에서 제주어로 물을 때 한 번 더 쳐다보시고, 깎거나 덤을 얹어 주시기도 하잖아요. 그런 작은 효능감이 쌓이면 소속감이 되고, 결국 지역 문제에도 더 적극적으로 뛰어들 수 있지 않을까요?
- 늘 즐겁게 활동하시는 것 같지만, 어떤 일이든 기쁨과 슬픔이 있잖아요. 어떤 순간이 가장 힘드신가요?
= 유진 : 제일 어려운 건 결국 사람이죠. 마음 맞는 동료를 찾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초창기엔 지금과 다른 분들이 함께했는데, 이게 직장이 아니라 개인적인 관심에서 시작된 활동이다보니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시는 경우가 많았어요. 제가 급여를 줄 수도 없는 상황이니까 생계나 본업 때문에 떠나겠다고 하시면 붙잡을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렇게 몇 번이나 팀이 흩어지고 다시 꾸려지는 과정을 겪으면서 지치기도 하고, 솔직히 주눅들 때도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순조, 영신 님이 합류하면서 각자 잘하는 걸 신나서 맡아주니 팀워크가 너무 좋아요. “이 멤버들을 만나려고 그 시간을 겪었구나” 싶을 만큼요. 가끔 “내가 뭘 위해 이걸 하고 있지?” 생각이 들 땐 여전히 힘들긴 하죠. 외향적인 성격이라 바쁘게 뛰어다니고는 있지만, 어느 순간 공허감이 확 몰려올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마다 지금 같이하는 팀원들을 떠올려요. 이 멤버들이랑 오래 즐겁게 활동하려면, 더 안정적인 사업과 조직을 만들어야겠다. 그 생각이 다시 힘을 주는 것 같아요.
= 순조 : 저는 아이를 혼자 돌보면서 또 다른 본업을 하고 있어서 대표님처럼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늘 미안한 마음이 있죠. 제주에서 유진 대표님이 안 들어간 제주어 수업이 없을 정도로 열정적이세요. 필요하다고 하면 우도까지 배 타고 가시니까요. 그 마음이 진짜 대단하죠. 제가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계속 참여하는 이유는 ‘다음’이 기대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번에 보드게임이라는 첫 결과물이 나왔잖아요. 근데 저한테는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거든요. 예산이랑 일정상 아직 하지 못한 게 더 많아요. 다음엔 또 어떤 도구를 만들까, 이걸 어떻게 발전시켜서 새로운 수업을 만들까… 이런 상상이 계속되는 게 즐거워서 계속 함께하고 싶더라고요.
제주어 활용프로그램으로 아동·청소년이 제주어에 관심을 갖게 만들기 위해 개발한 보드게임 ‘탐탐판놀이’ ⓒ헤삭이탐라
- 헤삭이탐라가 만든 제주어 교육 보드게임, ‘탐탐판놀이’를 소개해주세요.
= 순조 : 제주에는 초등학교 한 학기에 한 시간씩 제주어 필수 수업이 있어요. 그런데도 이주민 아이나 토박이 아이나 제주어 수준은 비슷합니다. 거의 모르죠. 수업 방식도 오랫동안 바뀌지 않아서 예전 외국어 교육처럼 주입식이에요. “I am a boy(나는 남자예요)” 하면 “You are a girl(난 여자예요)”이 바로 따라 나오는 식이죠.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희는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를 기준으로 삼았어요. 일방적인 수업이 아니라 참여형, 자기주도형으로 배울 수 있는 보드게임 ‘탐탐판놀이’를 만들었죠. 카카오제주임팩트챌린지에 참여해서 역량강화 교육도 받고, 문제 해결 활동비를 지원받으면서 개발할 수 있었고요.
게임 방식은 부루마블처럼 칸을 이동하면서 미션을 수행하는 거예요. 단순히 주사위 굴리고 끝나는 게 아니라, 대장간·연못·마을나무·관청 같은 제주 전통 공간과 문화를 제주어와 함께 배우도록 구성되어 있어요. 또 친구들과 소통하면서 수행해야 하는 미션카드도 넣어서, 자연스럽게 말하고 웃으며 제주어를 익히도록 했고요. 실물 제작 과정에서도 ‘공감’과 ‘몰입’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손으로 만졌을 때 촉감이 좋도록 비싼(하하) 천과 엽전을 제작했고, 색감도 쨍한 색 대신 제주의 자연 같은 포근한 톤으로 디자인했고요. 아이들은 보고 만지고 느끼면서 배울 때 훨씬 잘 기억하거든요.
= 유진 : 정식 발매를 앞두고 시제품을 가지고 초등학교에서 몇 번 수업을 해봤는데 반응이 정말 뜨거웠어요. 아이들이 “한 번만 더 하자”고 할 정도로 몰입하고,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재밌게 제주어를 익히는 모습을 보니 너무 기쁘다”고 하시더라고요. 성읍민속마을에서는 여행자나 이주민 대상으로 시연했는데, “관광상품으로 나오면 꼭 사고 싶다”는 반응도 있었어요. 무엇보다 지역 안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 많아요. 제주어보존회나 연구회 같은 단체에서도 저희 활동을 응원해주고, 적극적으로 자문도 해주시거든요. 이걸로 무언가 더 열심히, 적극적으로 해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어요.
- 콘텐츠부터 구성품까지 곳곳에 신경 쓴 흔적이 보여요. 전공자도, 업계 종사자도 아닌데 보드게임을 만든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 순조 : 저희 셋 다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보드게임을 만들자”는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과정 하나하나가 다 처음이라 진짜 힘들었어요. 판매가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제작 업체는 어떤 기준으로 골라야 하는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죠. 게다가 제주에는 이런 걸 만들어줄 업체도 많지 않아서 모든 게 발품을 팔아야 하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대표님이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일일히 전화해서 직접 찾아가고, 필요하면 비행기 타고 서울까지 올라가서 물품을 구매해오기도 하고요.
= 영신 : 정말 맨 땅에 헤딩하듯이 하나하나 부딪히면서 조금씩 완성해온 거예요. 재미도 있었지만 자발적으로 하는 일인데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벅찰 때도 많았거든요. 그래도 꼭 완성된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버텼어요. 개인적으로는 제 아이들에게 실물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컸고요. “엄마가 집에 없을 때 밖에서 뭐 하는지 궁금했지? 너희랑 재미있게 놀고, 제주에서 함께 잘 살아보려고 이렇게 노력했어.”
- 정말 고생 많으셨네요. 그만큼 보람된 순간도 많을 것 같아요. 보드게임을 가지고 교실에 가니 느껴지는 변화가 있던가요?
= 순조 : 제주어 교육을 준비하면서 한 아이를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지역 토착민의 자녀였는데 “제주어 배워서 쓸 데도 없는데 이 수업 듣느라 딴 거 못하니까 싫어요”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더 느꼈죠. 기록만으로는 안 되고,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하구나. 아이들이 제주어를 배우는 경험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걸요.
= 영신 : 저희가 보드게임을 들고 들어가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요. 꺼내는 순간 “우와!” 하면서 눈이 반짝이거든요. 수업이 끝날 때 “딱 한 판만 더 하면 안 되냐”는 반응도 나오고요. 아이들은 흘려듣는 것 같고 관심 없어 보여도 다 귀를 열고 있어요. 육아의 경험에서 얻은 확신이 있죠(하하) 특히 놀면서 들으면 더 거부감 없이 마음을 열거든요.
- 유진 : 이런 생각도 들어요. 토착민 선생님을 고용하는 게 좋은 면도 있죠. 문화적으로도 더 가깝고, 언어도 더 자연스럽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우리만의 관점으로 제주어를 바라보고, 또 우리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풀어내는 교육을 기획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전략인거죠. 단순히 게임만 하는 게 아니라 “같은 단어도 왜 제주는 다르게 말하는지”, “왜 사라져가는 제주어를 보존해야하는지”까지 교육 자료를 직접 만들어 설명하거든요.
= 순조 : 맞아요, 그리고 아이들은 정말 구체적으로 의견을 줘요. 예를 들어 게임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게 옆 친구 생각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거나, 새로 배운 어떤 단어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거나. 복도에서 만나면 말은 안 되지만 수업에서 배운 단어 오라방, 어멍, 아시… 이런 말을 외치면서 저희를 부르기도 하고요.
보드게임 ‘탐탐판놀이’를 활용하여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제주어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헤삭이탐라
- ‘탐탐판놀이’가 곧 정식 출판된다고요? 앞으로 더 바빠지시겠어요.
= 유진 : 지금 헤삭이탐라는 네 명이 활동 중인데, 기획팀과 교육팀으로 나눠서 움직이고 있어요. 각자 오래 버틸 수 있도록 역량을 키우면서 수익 기반을 잘 마련하는 게 제일 큰 목표예요. 아직은 제대로 된 월급까지는 못 드리고 있어서 늘 미안하고 속상한 마음이 있거든요.
보드게임을 어렵게 완성했지만, 출시를 준비하려니 또 다른 벽이 곳곳에 있더라고요. 저작권, 특허 같은 문제도 챙겨야 하고, 학교 납품을 하려면 KC인증도 받아야 한대요. 그래서 요즘은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좀 알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하며 배우고 있습니다(하하). 만들었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안정화까지 가는 과정이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지금 가장 어려운 건 이 아이디어를 실제로 쓸 ‘당사자’를 찾는 거예요. 시민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초기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이나 제도는 있지만, 시장에 내놓기 위해 필요한 내용들, 예를 들어 상품 정보를 어떻게 기재해야 하는 지에 대한 정보는 부족해요. 그 부분을 저희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게 가장 큰 걱정이죠.
- 헤삭이탐라를 통해 제주어를 만난 사회가 어떻게 달라지길 바라세요?
= 유진 : 저는 ‘4050 토박이 세대’가 제주어 보전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이들의 윗세대는 제주어를 여전히 쓰지만, 아랫세대는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과도기에 있는 그룹이거든요. 그런데 4050 세대가 부모 세대와 아이 세대를 잇기 위해 제주어 교육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그 순간부터는 언어뿐 아니라 문화와 역사까지도 함께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회를 만들려면 늘 나만의 ‘Why’(이유)를 찾는 게 중요하죠. 사회 문제 해결을 업으로 삼는다는 게 결코 쉽지 않거든요.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이유가 분명할수록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도 모이고, 도움도 연결된다고 믿거든요.
= 영신 : 제주에서 5년, 10년 정도 살다 떠나는 분들이 정말 많아요. 결론은 늘 ‘소통’ 때문으로 모아져요.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대화가 줄고, 대화가 없으니 이해도 부족해지는 거죠. 갈등이 생기거나 문제가 생겨도 해결이 어렵고요. 이런 한계가 때론 ‘텃세’로 비춰지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주민이 언어 문제에서 오는 불편을 덜고, 지역사회에서 당당하게 한 사람의 도민으로 살아가는 사회를 꿈꿔요.
= 순조 : 드라마에선 전라도, 경상도 사투리도 자막 없이 다 알아듣고 따라 하잖아요. 그런데 왜 제주어는 여전히 낯설고 외국어 취급을 받을까요? 저는 제주어가 한국 사회의 다양한 지역 언어 중 하나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바라고 있어요. 그게 결국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로 이어질 거라 믿어요.
인터뷰 및 정리: 희망제작소 사회혁신팀 최나현 선임연구원, 이혜진 연구원, 안영삼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