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제작소?허핑턴포스트코리아 공동기획
시대정신을 묻는다⑦ 이정동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퍼스트 무버(first mover?신산업 개척자)라는 용어가 뜨니까 요즘 많은 기업 CEO들이 직원들보고 ‘퍼스트 무버가 되자’고 한답니다. 직원들도 퍼스트 무버가 되고 싶죠.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불가능한 거죠. ‘지금부터 1년 안에 실수 없이 퍼스트 무버가 되라’ 이런 식이니까요.”
불가능한 이유의 포인트는 어디 있을까. 상명하달? 시류편승? 서두르는 문화? 그보다는 ‘실수 없이’라는 부분에 있다. 이정동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 교수는 인터뷰 내내 한국 산업, 한국 사회의 문제로 ‘실수를 용인하지 않는 문화’를 일관되게 지적했다. 실수를 통해 쌓은 경험 없이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갈 수 없고, 특히나 ‘퍼스트 무버’는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3월 15일 서울대 공대에서 만난 이 교수는 희망제작소가 창립 10주년을 맞아 허핑턴포스트코리아와 공동 진행하는 기획 연구 ‘시대정신을 묻는다’ 인터뷰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산업 분야를 대표하는 정책 전문가라는 이유도 있지만, 최근 출간한 책 ‘축적의 시간’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은 서울대 공대 교수 26인이 각 전공 분야의 한국 산업을 진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터뷰 진행과 종합 집필의 역할을 이 교수가 맡았다. 분야는 산업과 공학으로 한정했지만 그 취지는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 한국 사회의 현재와 미래 진단을 요청하는 ‘시대정신을 묻는다’ 기획과 통한다. 결과적으로 이 교수를 통해 26인의 산업?공학 전문가를 만나게 된 셈이다.
2000년대 이후로 새로운 산업이 없다
이 교수는 26인 인터뷰 결과로 도출된, 한국 산업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인 ‘축적의 시간’이라고 전했다. 이는 실수해도 되는 문화를 통해 오랜 시간 쌓인 경험 자산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그 문화와 경험이 부재하다는 뜻이다. 이로 인한 산업 왜곡 정도도 심각하다는 진단이다. 이 교수는 “경제위기가 올 때마다 ‘한국 산업의 펀더멘털(fundamental?기반)은 좋다’는 식의 위로성 진단이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가장 흔한 분석이 ‘선진국은 앞서가고 중국은 빠르게 따라와서’ 한국 산업이 어렵다는 것이지만 이 교수의 설명은 전혀 달랐다. 선진국에도 있고 중국에도 있는 것이 한국에만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술경쟁력,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2000년대 이후로 우리나라에 새로운 산업, 기존 산업을 대체할 만한 신산업이 거의 생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아이폰처럼 전에 없던 새로운 걸 내놓거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비즈니스 관행을 만들거나,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는 그런 역할을 할 기획자, ‘아키텍트'(architect?설계자)가 없어요. 기술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전의 틀을 제시할 수 있는 인재도, 기업도 없는 겁니다.”
그런 문제에 직면한 한국 산업의 분야별 현황은 ‘축적의 시간’에 자세히 설명돼 있다. 한국이 그나마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반도체 산업에 대해 황기웅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메모리 분야에서는 향후 5년 정도 경쟁력을 유지하겠지만 반도체 시장의 70%로 비중이 더 큰 시스템IC(비메모리 반도체) 분야는 일본과 대만이 양분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중국의 성장세가 대단하다면서 “중국은 발전 속도, 잠재력, 인력, 무엇보다 산업을 기획하고 만드는 ‘아키텍처'(architecture) 측면에서 출중하다”고 했다.
우리 조선업계가 사활을 걸고 진출했다가 엄청난 난관에 봉착해 있는 해양 플랜트 분야에 대해 한종훈 화학생물공학부 교수는 “해양 플랜트 건설에 필요한 세 공정인 엔지니어링, 구매, 시공 중에서 엔지니어링이 가장 핵심인데 우리 기업들은 그 역량이 없다”면서 “수백 년 데이터를 쌓아 온 유럽?미국 기업에서 라이선스 형태로 설계를 사오기만 하니 역량은 축적되지 않고, 예측 능력도 떨어져서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막대한 지연연체금을 물어내는 식이라 위기에 처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차세대 디스프레이 전문가인 이창희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우리 기업들이 보유한 OLED 기술은 중국이 5~6년이면 따라잡을 것”이라며 “일본은 바닥부터 다져 온 축적된 기술기반이 있어서 소재와 장비 분야 경쟁력이 탄탄하지만, 우리는 디스플레이 패널과 TV 세트 부문에서 경쟁력을 잃으면 산업 전체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자동차 전공 서숭우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우리 자동차 산업의 외형은 커셨지만 축적해 놓은 것이 너무 적어 기술 종주국이라 할 수 없다”고 진단하면서 전기차로 세상을 놀라게 한 테슬라모터스 같은 미래지향성은 없다고 걱정했다.
이미 중국에서 기술을 수입하는 분야도 있다. 설승기 전기정보공학부교수는 “발전, 송배전 등 이른바 강전(强電) 분야의 거의 모든 기술에서 한국이 중국에 뒤져 있다”면서 “그나마 노력하는 국내 회사들이 중국으로부터 열심히 배우는 실정”이라고 했다.
이 진단을 종합하면서 이정동 교수는 “시행착오 경험이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힘인데, 기술선진국들은 2-3백년 이상 시행착오를 축적할 ‘시간’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중국의 경우는 근대산업의 역사는 짧지만 넓은 시장을 바탕으로 시행착오를 축적할 ‘공간’이 있기 때문에 역시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라는 진단이다.
제조업 일자리가 서비스업보다 나은 이유?
한국의 산업, 특히 제조업이 이렇게 심각한 위기라면 서비스업을 확대하면 되지 않을까? 이미 일반화 돼 있는 이런 인식에 대해 이정동 교수는 “서비스업으로 좋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서비스업이 만드는 일자리의 대부분이 저임금의 ‘맥도날드 잡’ 아닙니까? ‘할리우드 경제’라는 말이 있죠. 소수만 큰돈을 벌고 대다수는 전문성을 쌓거나 발전할 가능성이 없는 낮은 수준의 일자리에 머무는 경제입니다. 제조업이 무너지면 그런 경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조업 일자리라고 하면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부품을 조립하는 등의 단순 작업 일자리를 떠올리는 사람도 않겠지만 이 교수는 “제조업 현장의 일은 서비스업보다 매뉴얼화가 어렵고, 경험하면서 쌓아가는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이 더 많이 요구된다”고 했다.
암묵적 지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반복을 통한 효율 개선 역량'(learning by doing)이고, 다른 하나는 ‘시행착오 축적에 기반한 창조 역량'(learning by building)이다. 이 교수는 “전자는 TV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것처럼 오래 하면 숙련되는 방식이고, 후자는 예전에 없던 것을 직접 만들어 보면서 창조 역량을 쌓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쉬운 예로 영화 ‘아폴로 13호'(1995년작)를 들었다. 달착륙선이 우주에서 위험에 처하자 지구에서 엔지니어들이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 놓고 문제 해결 방법을 찾아나간 것이 좋은 예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고도의 창의적인 혁신은 현장에서 나오고, 그렇게 창조적인 시행착오 경험을 축적한 사람들은 쉽게 대체되지 못 하기 때문에 ‘맥도날드 잡’으로 내몰리지 않는다”고 했다.
독일 일본 등은 해외로 내보냈던 공장을 다시 자국으로 가져오고 있다면서 이 교수는 “혁신과 현장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좁힐 수 있어야 창조적 역량이 기반한 근본적인 산업 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라고 했다.
“요즘 중국의 기술 특허가 주목받는 것은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기 때문입니다.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통해서 만들어진 혁신이 중국의 기술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최근 사례로 독일에서 개발한 풍력 발전 핵심 기술을 이전받은 중국기업 이야기도 했다. 독일도 포기한 경량 날개 결합 방법을 중국 엔지니어들이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가면서 발견했고, 그래서 독일기업이 다시 더 많은 돈을 주고 중국 기술을 사 갔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중국은 이렇게 제조현장의 힘을 바탕으로 혁신에서도 앞서 나간다”면서 “이런 ‘현장 중시 엔지니어 마인드’가 있어야 산업이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시행착오는 공공재, 국가?기업이 책임져야”
문제는 한국 기업들에서는 그런 현상이 안 보인지 한참 됐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과거 우리 산업이 역동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에 우리에게도 엔지니어 마인드가 있었다”고 상기시켰다. 농업이 기반이던 국가가 철강산업을 키워내고, 조선업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세계 1위의 조선업을 만들어내는 과정 등을 예로 들며 “일단 해 보고, 안 되면 반성하고, 다시 도전하는 ‘공돌이 정신’이 있었다”고 했다.
그가 볼 때 ‘공돌이 정신’이 사라진 것은 금융이나 경영시스템 등 산업을 둘러싼 환경이 안전 위주의 관리 모드로 전환되면서 부터다. “실패하면 프로젝트 당사자에게 책임을 묻는 시스템 하에 놓인 뒤로는 기업들이 시행착오를 용인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기술경쟁력’의 중요성이 잊힌 것은 아니다. 여전히 많은 국가 예산이 기술 연구와 개발(R&D)로 투입된다. 2016년 R&D에 투입되는 국가 예산은 19조에 달한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이렇게 투자하는데 왜 새로운 비즈니스가 없느냐고 한다면 산업의 프로세스를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대학, 연구소에는 신기술이 있죠. 문제는 이것을 비즈니스로 연결할 주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험실에서 연구 결과가 나오면 검증을 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그리 많은 돈이 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특허나 논문이 나와도 아직 아이디어 차원일 뿐입니다. 이게 ‘돈’이 되려면 꼭 거쳐야 하는 단계가 ‘데모'(demo)입니다. 여기에 실험단계보다 100배 이상의 자금이 필요합니다. 성공하면 조 단위 산업이 되는 거지요. 그런데 요즘 기업들은 이 데모를 기피합니다.”
데모 단계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불확실성, 얼마나 걸릴지 얼마가 들지 모르는 그 엄청난 불확실성을 감당하는 것이 기업이고 국가여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 하기 때문에 몇 십 년째 신산업이 안 나오다는 설명이다.
그 일에 가장 적극적인 외국 사례가 ‘구글’이라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구글이 2015년 기술에 투자한 돈이 15조 원 정도라면서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기술을 보고 ‘왜 우리는 저런 게 없느냐?’고 하는데, 구글이 그동안 추진하다 실패한 데모 프로젝트가 수십, 수백 개라는 건 간과한다”고 지적했다.
한 때 제조업이 성했다가 무너지면서 중산층도 같이 무너지고 있는 영국의 예를 들면서 이 교수는 “우리도 이런 상태로 가면 5년쯤 후부터는 산업이 쇠락하는 게 보일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용인하고, 나아가서 실패를 아예 ‘공공재’로 간주하고 국가와 기업이 책임지고 장려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청년, 창업이 아니라 ‘도전적 과제’가 필요
다만 이 교수는 청년들에게 무분별하게 창업과 도전을 권하는 요즘 세태에 대해서는 “어른들이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신랄한 비판을 했다. “청년들에게 무슨 축적된 지식이 있겠느냐?”면서 “기껏 모을 수 있는 자원이라는 게 또래 청년들일 텐데 그들 보고 신사업을 만들어내라고 등을 떠미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했다.
청년 창업 공모전 내용을 간접적으로 접해 봤다는 이 교수는 “공모된 아이템이라는 게 기존비즈니스, 그것도 규모 작은 사업을 약간 바꾼 정도”라면서 “대부분은 여기 있는 것을 저기 옮기는 수준의 아이디어였다”고 했다.
특히 서울대 공대를 중퇴하고 창업해서 ‘킬링타임용 게임’을 만든 청년의 사례를 전하면서 “게임 산업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 청년을 과학고?서울대 보내는 데 투입된 사회적 자원이 얼만데 그렇게 만든 ‘킬링타임용 게임’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라”고 한탄했다.
국가가 창업을 장려하고 지원하는 것은 좋지만, 기존의 산업에 대한 지식과 축적된 경험이 있는 재직자 창업을 우선적으로 지원하고, 여기에 청년들이 참여하면서 경험을 쌓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청년들이 창업에 몰리는 이유는 극심한 경쟁을 뚫고 기업에 들어가 봐야 도전적 비전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축적의 시간’을 출간한 후 많은 졸업생, 청년들이 보여주는 반응들을 접하고 있다면서 대부분 “지금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월급을 덜 받아도 좋으니 도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하소연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테슬라 CEO인 일론 머스크의 또 다른 기업 ‘스페이스 엑스’가 2015년 말 재사용 로켓 ‘팔콘9’을 쏘아 올린 날 이야기를 꺼냈다.
“조종실 밖에 스페이스엑스 직원들이 모여 있다가 화면 보면서 막 껴안고 하이파이브 하고 그러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직원들에게 그 순간 중요한 건 무엇일까요? ‘이번에는 과연 성공적으로 뜰 수 있을까’가 중요하지, ‘이번에 연봉 얼마나 올라갈까’가 중요하겠습니까? 탁월한 젊은이들일수록 도전적인 과제에 끌리는 법입니다. 도전적 과제가 주어지지 않으니까 봉급만 따지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수한 직원들을 뽑아가는 대기업일수록 신사업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고, 직원들이 실패하고 시행착오를 하도록 판을 깔아줘야 한다면서 이 교수는 “실제 현실은 대기업일수록 실패를 두려워하고 성공이 보장된 산업에만 진출하려 해서 안타깝다”고 했다.
‘실수해도 괜찮아’ 문화만 있어도 바뀐다
그 밖에도 국가가 마치 ‘보육자’인 것처럼 산업을 규제하는 문제,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기업을 ‘좀비 기업’이라며 성급하게 쳐내는 중소기업 정책, ‘벤치마킹’을 맹신해서 모든 보고서마다 ‘해외 사례’를 붙이는 관행, 초중고생들이 틀릴까봐 손을 들지 못 하는 교육 현장 등 이 교수가 지적한 문제들은 다 전하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그럼에도 모든 현상의 원인은 일관되게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문화’로 귀결됐다. 그만큼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하다는 뜻일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해법도 단순했다. 이제부터라도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를 만들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망은 있다는 결론이었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정책담당자든, 정치인이나 언론인, 그 밖의 누구에 대해서건, 뭘 하다가 안 됐을 때 비난하거나 욕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욕을 먹으면 자연히 위축되고, 행동도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수해도 괜찮아’라는 문화만 생겨나도 많은 것이 바뀔 거예요. 그동안 번데기 때 죽었던 많은 것들이 나비가 돼서 날아오를 것입니다.”
정리 : 황세원 | 사회의제팀 선임연구원 · joonchigirl@makehope.org
사진 : 이우기 |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