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폭우를 뚫고 도착한 그는 한 귀퉁이에 쪼그려 앉아 다 쓴 원고를 지웠다 쓰고 지웠다 씁니다. 지난 12월 14일 희망제작소가 주식회사 마중물대리·아산나눔재단과 손잡고 연 ‘2023 사회적 가치 투자(SIR, Social Investor Relations) 대회’ 날입니다. 전남 영암에서 새벽에 출발한 정서진 카페 ‘새실’ 대표는 행사 2시간 전에 아산나눔재단 MARU180 지하1층 이벤트홀에 도착했습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럴만합니다.

이날은 그가 왜 생고생하며 영암에 5000평 정원을 만들고 영암의 관광 자원들을 자발적으로 연결하고 있는지 대중에게 알릴 흔치 않은 기회입니다. 그리고 상금을 못받을 수가 없습니다. 청중심사단 62명의 모의투자 비율대로 상금 1000만 원을 10개 소셜디자이너팀 모두에게 나눠주니 말입니다.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 창출 모델’에 투자하는 것이니까요. 이 모의투자는 당신이 창출한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고 응원한다는 뜻입니다.

 

“사회적 가치가 투자 기준이 될 수 없을까?” 도발적 질문

인권, 공동체, 환경 보호…‘소셜디자이너’는 상상력과 배짱으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합니다. 이 가치는 비즈니스와 달리 쉽게 측정가능하지도, 보상받지도 못합니다.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노력인데 말이죠. ‘사회적 가치가 투자 기준이 될 수는 없을까?’ ‘2023 사회적 가치 투자(SIR) 대회’는 이런 도발적인 질문에서 시작했습니다.

 

“이런 행사 하려면 얼마쯤 들어요?”

2022년 12월 22일, 그러니까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희망제작소는 ‘소셜디자이너클럽 컨퍼런스 : 다시 만난 세계, 소셜생태계와 청년’을 열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상상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11명을 ‘소셜디자이너’로 호명했거든요. 이날 참여한 소셜디자이너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알아주는 사람이 많이 없다”고들 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만 하고 있을 소셜디자이너들이 아니죠.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우리 활동을 알릴 수 있을까?” “투자대회 어때요?” 아이디어들이 속출했습니다. 이 행사에 일반 참가자로 참여한 장경훈 주식회사 마중물대리 대표는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소셜디자이너들의 상상력과 배짱에 매료돼 나지막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이런 행사 또 하려면 얼마쯤 들어요? 제가 있는 힘껏 후원할 게요.”

 

“투자대회 성수동에서 많이 하는데, 희망제작소가 왜 해?”

바로 이날, SIR 담당자인 저의 고난이 시작됐습니다. 소셜디자이너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소개하고 응원하는 방식으로 소셜벤처 쪽에서 하는 ‘임팩트 IR(investor relations) 투자대회’ 형태에 주목했습니다. 투자대회는 많습니다. 어떻게 다르게 할 수 있을까요? 희망제작소는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 창출 모델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사전 조사부터 시작했습니다. 서울 성수동 소셜벤처를 중심으로 투자 생태계 안에서 ‘사회적 가치‘를 내세운 비즈니스에 관심이 커졌습니다. 소비 패턴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제품의 품질이나 값뿐 만 아니라 ‘사회적 가치’라는 의미와 구체적인 영향력에 ‘내돈내산’하기 시작했죠. SIR 대회로 ‘사회적 가치’의 판단 기준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제 마음 속엔 해소되지 않은 질문 하나가 있었습니다. “성수동에서 많이 하잖아. 희망제작소가 왜 해?” 성수동뿐만 아니라 지방정부, 중앙부처에서 진행하는 임팩트, 즉 사회적 가치 중심의 IR 투자대회에서도 결국 중요한 건 ‘돈을 어떻게, 얼마나 벌 것인가’가 핵심이었죠. 희망제작소는 과감히 사회적 가치라는 본질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소셜디자이너들의 활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응원, 그리고 연결에 방점을 찍은 것이죠. 그렇게 ‘2023 사회적 가치 투자대회’는 1등에게 투자금을 몰아주지 않고, 투자에 어떤 조건도 달지 않는 방식으로 꾸리기로 했습니다.

 

방방곡곡 소셜디자이너를 찾아라!

이제 가장 중요한 게 남았습니다. 올해의 소셜디자이너를 찾아야 합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지구와 공동체와 인간을 위해 활약하고 있는 이들에게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바로 공모입니다, 지역성(지역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역 자원을 활용하고 있나) 소셜미션(사회적 문제를 명확히 정의하고 타당한 방식으로 푸고 있는가) 임팩트(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나)를 기준으로 10명을 선정했습니다.

서울에도 지역이 있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서울 구로구 구로청년채움의 이학준 소셜디자이너부터 홍천의 산골마을 환경지킴이 삼삼은구 김인호 소셜디자이너, 부산 연제구 동네 연예기획사 사장님 BCY엔터테인먼트 배준호 소셜디자이너, 영암군 융복합농업 시골청년CEO 새실 정서진 소셜디자이너, 웰컴드링크를 시작으로 담양을 브랜딩하기 시작한 포더로컬 배성현 소셜디자이너, 도시를 변화시키는 어반게릴라즈 이진학 소셜디자이너, 어르신과 청년을 품은 빵집 동백베이커리 정현성 소셜디자이너, 울릉도에서 제1호 환경단체를 만든 플로깅울릉 정대웅 소셜디자이너, 카페를 주민들의 해우소로 활용하는 문경 선일의 황지은 소셜디자이너까지. 희망제작소 연구원들이 현장을 찾아 인터뷰했습니다.

1️⃣이학준 구로청년채움 @서울 구로구, 놀다가 어느새 정책 토론…”자연스러움의 힘은 세요”
2️⃣김인호 삼삼은구 @강원 홍천군, 농촌 마을 쓰레기 ‘모아’ 재활용하다 돌봄까지
3️⃣심재신 내마음은콩밭 @대구 북구, “뇌전증 환우, 그리고 모두를 위한 커뮤니티죠”
4️⃣배준호 BCY엔터테인먼트 @부산 연제구, “동네 연예기획사 전성시대, 곧 옵니다”
5️⃣정서진 새실 @전남 영암군, ‘5000평 정원’으로 농촌 비즈니스를 그리다
6️⃣배성현 포더로컬 @전남 담양군, 담양의 웰컴드링크 ‘댓잎 모히또’가 탄생한 사연
7️⃣이진학 어반게릴라즈 @전북 전주시, “시민 ‘게릴라’가 작은 실험 모아 도시를 바꿔요”
8️⃣정현성 동백에프엔비 @부산 사상구, 20대 제빵사·60대 바리스타의 동행, 걸림돌은 ‘아샷추’?
9️⃣정대웅 플로깅울릉 @경북 울릉군, 골칫거리 쓰레기이지만, ‘재미있는’ 플로깅을 위해
🔟황지은 선일 @경북 문경시, “어떤 문제건 혼자서는 풀수 없다는 걸 느껴요”

“Excuse me, SIR!”

“소셜디자이너는 상상력을 무기로 세상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일자리, 기후위기 시대 실천방안을 만들며 큰 문제에 현장에서 대응해 우리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12월 14일 ‘2023 사회적 가치 투자(SIR) 대회’ 현장, 임주환 희망제작소 소장은 축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정서진 카페 ‘새실’ 대표가 원고 고치기를 멈춰야 할 때입니다.

 

한 사람당 주어진 피칭 시간은 5분입니다. 피칭 이후에는 테이블 미팅이 이어집니다. 50분 동안 청중심사자들은 자유롭게 관심 있는 소셜디자이너의 테이블로 가 궁금한 점을 묻고 답을 듣습니다. 다들 신중합니다. 거짓말 안 보태고 50분이 짧게 느껴지는 열띤 시간이었습니다. 청중심사단은 1만 원 단위로 최대 3명에게 투자하고 투자의향서에 그 이유를 적습니다. 잠깐! 청중심사단이 진짜 돈을 내진 않아요. 이 ‘모의’ 투자금을 합산해 그 비율대로 미리 준비한 상금을 나누는 것이거든요.

두근두근 모의투자금 집계 시간, 2022년 소셜디자이너 5명이 자신의 활동을 소개했습니다. 커피찌꺼기를 자원으로 되살려 지구를 살리고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고유미 커피클레이 대표,국내 최고의 로컬스타트업빌리지를 꿈꾸는 김만이 집단지성 대표, 광주에 청년 커뮤니티 공간을 만든 김태진 (주)동네줌인 대표,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리빙랩의 모범사례를 만들어온 장종욱 협동조합 소이랩 이사장, 마지막으로 청년이 행복한 마을 디자이너 최정원 청춘연구소 컬처플러스 대표입니다.

 

“활동 자랑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자리”

이어 상금을 나누는 시상식을 했는데요. 희망제작소와 소셜디자이너 10명은 함께 사회적 가치 투자 협약서를 작성했습니다. 협약서엔 사회문제에 대한 창의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드는 주역으로서 의미 있는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는 것을 시민과 함께 공유하고 인정받았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패자는 아무도 없는 축제였습니다.

이날 청중심사단으로 참여한 손호석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양한 지역에서 그 지역의 특성이나 개인적 관심사와 재능에 기반한 사회적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하나하나 존중과 관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일반적으로 NPO나 싱크탱크에선 잘 쓰지 않은 ‘투자’라는 개념을 가져와 신선했습니다. 우리가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투자와 연계할 수 있는지,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자리였습니다.”

소셜디자이너 황지은 카페 선일 대표는 “영리 활동에 대한 창업지원 사례는 많이 봤지만 제가 만드는 사회적 가치가 투자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며 “다른 분들 사례를 들으며 많이 배웠고, 서로 가치를 공유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소셜디자이너 심재신 협동조합 내마음은콩밭 대표는 “지역을 위해 활동하는 분들은 자기 자랑을 잘 못 하는데 희망제작소가 이런 부분을 인터뷰와 행사로 채워줬다”며 “다른 소셜디자이너들을 만나고 세상이 아직 살만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후는 소셜디자이너들의 네트워크 시간입니다. 네트워크 만드는 데 밥이 빠질 수 없겠죠. 대체 이들의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또 아이디어가 끊이지 않습니다. 든든한 동지를 사귀는 자리이기도 했는데요, 제가 몇 시에 집에 돌아갔을까요? ‘다음날’이었다는 것만 밝혀두겠습니다.

‘무엇이 남았을까?’ ‘2023 사회적 가치 (SIR) 투자대회’ 대장정을 마치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답은 ‘사람’입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자신의 의지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어요. 이들의 활동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데는 우리 몫의 책임도 있을 겁니다. 희망제작소는 더 많은 소셜디자이너를 찾고, 응원하고, 연결하고, 재미있는 ‘작당’을 이어갈 겁니다.

– 글: 온영한 시민이음본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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