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사회적경제에 혹한기가 될 것 같습니다. 지난 9월 정부는 내년 사회적경제 지원사업 예산을 59%에서 100%까지 삭감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취약계층 고용이나 꼭 필요하지만 영리기업이 하지 않는 서비스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만큼 공동체는 무너지겠죠. 2007년 사회적기업육성법,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됐으니 법·제도 측면에서 한국에 본격적인 사회적경제가 시작된 지 16년이 됐습니다. 지난 16년간을 되돌아보고, 이 위기의 시기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전정환 희망제작소 이사는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장으로 7년 일하며 지역 창업 생태계를 조성했습니다. 지역, 커뮤니티, 생태계, 중간지원조직 분야를 두루 아우른 전문가입니다. 사회적경제 조직에 직접 참여한 적 없는 ‘외부자’이기도 합니다. ‘외부자’의 시선이 날카롭습니다. 중앙 정부가 주도하는 정책과 현재 사회적경제가 안고 있는 약점을 정조준하며 변화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전정환 이사의 기고를 소개합니다.
들어가며
필자는 사회적경제 조직에 직접 참여한 적이 없습니다. 이로 인해 제 글이 현장에서 쓰이는 개념과 다소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때로는 내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게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지역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에 8년 동안 몸담았고, 저 또한 새로운 인사이트를 발견하고 배우고 기여하고자 3년 전부터 희망제작소 이사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제 자신과 사회적경제에 참여한 분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저는 지역, 커뮤니티, 생태계, 중간지원조직이라는 분야에서 활동해 왔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다음커뮤니케이션에서 일하다가 2015년부터 제주에서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 센터장으로 7년간 지역 창업 생태계 조성에 힘썼습니다. 그간 정권이 바뀌었고, 저는 세 번의 임기를 마쳤습니다.
2017년 초에는 박근혜 정부에서 문재인 정부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창조경제혁신센터는 존립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문재인 정부 하에서 혁신문화의 허브로 재정립되며 성장했습니다. 커뮤니티 자본을 키우는 제주의 창업생태계 조성 방식은 초기에는 독특한 접근으로 보였지만 지금은 전국에서 모범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사회적경제를 학습하면서 제가 추구한 방향과 실천이 사회적경제가 지향하는 사회적 가치와 많은 연결점이 있다는 점을 깨닫고 배우고 있습니다. 이제는 사회적경제가 제게 매우 가까운 개념으로 느껴집니다. 이 관점에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 번째 질문 : 사회적경제의 위기인가, 사회적기업의 위기인가?
사회적경제는 200년 전 유럽에서 시작된 개념으로, 경제적·사회적·환경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경제활동을 포괄합니다. 이는 구성원의 자발적 참여, 협력, 그리고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바탕으로 합니다. 협동조합, 비영리조직, 영리법인 등 다양한 조직 형태로 돌봄, 환경, 소비자 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움직임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정부 정책 주도로 발전해 왔습니다. 2007년 고용노동부의 주도로 ‘사회적기업육성법’이 제정되었으며, 이는 문재인 정권에서 일자리 창출 사업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사회적기업 육성법은 사회적기업을 ‘취약계층에게 사회 서비스 또는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지역 사회에 공헌함으로써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등의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는 기업’으로 정의합니다. 한국에서는 정부의 인증을 받은 기업만이 ‘사회적기업’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지난 9월 1일, 윤석열 정부의 ‘제4차 사회적기업 기본계획(’23~’27)’을 발표한 이후 사회적경제 활동가들 사이에서 위기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기존의 취약계층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정부 지원 체계가 사라지면서 사회적기업이 위기에 직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사회적경제를 바라볼 때 사회적경제의 전환과 도약의 기회로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적경제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보완하며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의 선순환을 추구하는 개념입니다. 사회적경제의 주요 가치인 로컬,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돌봄 등의 영역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최근 로컬크리에이터, 지역 스타트업, 임팩트 투자, 로컬 투자 등이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창조경제혁신센터, 문화도시, 소통협력센터, 청년마을사업, 넥스트로컬 등의 정부 사업들도 어떤 면에서는 사회적경제를 추구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정부 주도 정책으로서 ‘사회적기업’을 주도하면서,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흐름을 ‘사회적경제’ 논의에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한국의 사회적경제의 위기는 스스로 범위를 좁게 설정한 데에서 이미 진행됐던 건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사회적경제를 위기에서 변화와 도약의 기회로 삼을 때입니다.
두 번째 질문 : 사회적기업은 고용창출과 자립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가?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비즈니스 자생력을 갖춘 다양한 조직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제주의 공심채, 제주살림, 섬이다, 대전의 윙윙, 옥천의 월간옥이네 등이 예입니다. 이들은 초기에 사회적기업 육성 사업을 통해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고, 현재는 로컬 크리에이터, 스타트업 등으로도 불리며 지역 기업 생태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 정책과 기업은 서로 다른 목적과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부 정책은 특정 부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기업은 경제적,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운영됩니다. 한국의 사회적기업은 정부 정책에 의해 등장했으며, 정부의 언어와 목표를 따르는 경향을 띱니다.
고용노동부에서 인증하고 지원하는 사회적기업은 주로 취약계층의 일자리 창출을 핵심 목표로 삼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접근하면 사회적기업이 사회적경제의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며, 정부 정책의 틀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고용 창출과 자립을 동시에 이루는 것은 일반 스타트업에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사회적 가치 실현과 취약계층 고용을 병행하는 것도 더욱 어렵습니다. 정부의 인건비 지원 등은 기업 운영 초기에 도움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이 시장에서 수익을 창출하거나 지속적인 펀딩을 통해 유지돼야 합니다. 기업이 고용 창출과 자립을 동시에 실현하려면 시장과 투자자에게 인정받는 기업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취약계층 고용은 일반 기업보다 사회적기업의 특성입니다. 이를 고려할 때, 자립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기업과 취약계층을 고용하는 기업을 나눠서 생각하는 게 바람직할 수 있습니다. 취약계층 고용은 공적인 영역으로, 정부의 꾸준한 지원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자립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기업은 자생력을 강화하는 관점에서 정책을 구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 획일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질문 : 현재 사회적경제는 지역과 세대의 변화를 잘 담아내고 있는가?
최근 로컬 크리에이터, 지역 스타트업, 임팩트 투자, 로컬 투자의 활발한 움직임은 사회적경제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야들이 스스로 사회적경제라고 명명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국의 사회적경제의 주류는 1980년대 후반부터 사회운동 세대가 주도했습니다. 반면, 최근 활발해진 로컬크리에이터, ESG, 지역 스타트업 투자 등의 움직임은 최근 10년 사이 청년 세대가 이끌고 있습니다. 세대 간 차이와 부족한 소통은 새로운 흐름을 사회적경제라는 이름으로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사회운동 세대는 개인의 희생과 헌신을 바탕으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청년 세대는 개인의 성장과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합니다. 사회 운동 세대는 조직의 사명과 목표를 중심으로 수직적인 조직 구조와 문화를 선호했습니다. 청년 세대는 구성원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중시하는 수평적인 조직 구조와 문화를 추구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사회적경제 조직의 조직 문화와 운영 방식에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회적경제는 본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참여와 협력을 통해 발전하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개념입니다. 사회적경제가 지역과 세대의 다양성과 변화를 제대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회적기업’이라는 제도적‧문화적 틀을 넘어서야 합니다. 세대 간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보완하면서 새 변화를 더 넓은 차원에서 관찰하며, 사회적경제 생태계를 확장해야 합니다.
한편, 사회적 금융도 기존의 벤처 투자 제도와 함께 검토돼야 합니다. 현재 많은 모태펀드가 지역 투자를 위해 만들어지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빠른 스케일업(성장)을 목표로 하는 테크 스타트업 투자 모델로는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로컬 크리에이터, 지역 스타트업이 투자를 받고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사회적경제 생태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금융을 만드는 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네 번째 질문 : 사회적경제 구현과 확산을 위해 정부의 역할은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중앙정부는 정책과 예산을 마련하고,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의 예산을 확보해 지역의 민간 주체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룬 한국의 현 상황에서 중앙정부 주도의 목표설정‧예산투입‧관리감독이라는 하향식 전달 체계는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선진국 사회에서 사회적 가치 실현은 다양한 주체들의 복잡한 연결과 협력과 시너지, 창발성을 통해 일어나며,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정부 부처의 목적과 목표 관리적 사업으로만 추진‧ 측정‧관리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공공의 역할은 지역 현장에서 일어나는 민간의 실천 의미를 확인하고 긍정적 변화를 키우는 촉진자‧매개자로 변화해야 합니다.
기초지자체는 현장에 가장 밀착한 정부 단위이므로,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정부 조직입니다. 광역지자체는 기초지자체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가치 실현의 시도와 현상을 관찰하고, 이를 기초지자체 간 연대하고 확산할 수 있도록 지식경영의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중앙정부는 지방정부가 이러한 역할을 원활히 수행하도록 정책을 수립하고 예산을 지원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사회적경제의 확산과 구현을 위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역할 변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고향사랑기부제는 변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 제도는 인구감소와 지역쇠퇴를 우리보다 먼저 겪은 일본의 성공적인 정책을 벤치마킹해 만들어진 제도로, 지역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중앙정부인 행정안전부는 공공 플랫폼을 통해 시민들이 지자체를 지정해 기부할 수 있도록 하고, 답례품과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고향사랑기부제를 설계‧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기존의 예산 배분 방식에서 시민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는 진보적인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월 강원 양구군에서 지정 기부 프로젝트를 실행할 때 중앙정부의 하향식과 지방정부의 상향식의 관점의 차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양구군은 민간의 사회적기업 공감만세가 만든 위기브(wegive) 플랫폼을 통해 지정 기부 프로젝트를 시행했으나, 행정안전부는 법령을 근거로 민간 플랫폼 사용을 중단시켰습니다. 이는 중앙정부가 하향식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통제하려는 기존의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일본에서는 이미 민간 플랫폼을 중심으로 지정 기부 프로젝트를 활성화했는데, 한국에서는 중앙부처의 관점에서 사업을 진행하는 태도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행히 행정안전부는 기존 입장에서 한발 물러서고, 광주 동구에서도 지정 기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변화의 조짐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민간과 지방 정부들이 변화를 더 주도해야 합니다. 이는 중앙에서 하향식으로 사업을 추진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지역에서 민간과 기초지자체의 협력에 기반한 상향식 사회적경제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전환점을 나타내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더 큰 논의의 장을 통해 사회적경제의 미래를 만들자
사회적경제는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의 선순환을 통해 지속 가능한 경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사회적기업은 목표를 구현하는 방법의 일환이자, 고용노동부가 취약계층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개발한 정책 사업입니다.
하지만 사회적경제는 로컬 크리에이터, 지역 스타트업, 임팩트 투자, 로컬 투자와 같은 새로운 변화를 포괄하는 담론으로 넓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 세대와 청년 세대가 함께 참여하며, 세대 간 장벽을 넘어서는 활발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의 사회적경제는 지금까지 중앙정부의 하향식 정책 사업으로 추진돼 왔습니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하향식 전달 체계만으로 지역 현장의 다양하고 역동적인 생태계를 충분히 반영할 수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정치와 정부의 방향이 바뀌면 생태계 전체가 언제든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적경제뿐 아니라 창조 경제 등 다른 사업에서도 이미 겪은 일입니다.
따라서 지역의 현장에서 민간과 기초지자체들이 협력해 새로운 혁신을 창출하고, 광역지자체가 이러한 시도 간 시너지를 지원하는 상향식 생태계로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중앙정부는 이러한 활동을 지원하고 확산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또한, 정부는 사회적기업 설립과 초기 단계를 지원하는 정책에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 결과위주로 보상하는 정책으로 방향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SK그룹이 진행하는 ‘사회성과 인센티브 제도’는 좋은 사례일 것입니다. 설립 위주로 지원하다 보면 형식적 요건을 중요시 여겨 다양성이 훼손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가치의 성과를 주목하면 그 방법은 다양하게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정하고 효과적인 자원배분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민간의 다양한 활동과 정부의 정책이 지역의 사회적 가치를 증진하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하기 위해선 중소벤처기업부의 기업 투자와 지원,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도시 프로젝트, 행정안전부의 소통협력센터 및 청년마을 사업 등이 어떻게 사회적경제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 전체적으로 조망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지역 현장의 민간 주체가 중심이 되어 특정 부처에 한정되지 않고 모든 정부 부처와 지방정부 등 다양한 주체를 아우르고, 실천적 지식을 창출하는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게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