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제작소의 ‘아는 척 매뉴얼’ 2탄
5월 마지막 연휴 북캉스족을 위한 문제적 도서목록 : 사회혁신 분야
지역소멸, 기후위기. 너무 거대한 문제라 해결이 가능할 거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희망제작소 연구원들이 이 압도적인 문제들을 직시하면서도 압도당하지 않도록 희망의 단초를 제시하는 책 5권을 소개합니다. 낡은 산업도시엔 새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고, 혐오의 시대를 함께 극복할 수 있고, 적어도 ‘나’는 쓰레기를 줄일 수 있습니다.
영국은 200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와 중앙정부의 재정긴축으로 서민경제가 고통을 겪어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영국 북부의 작고 쇠락한 산업도시 프레스턴도 전형적인 사례였지요. 이 책의 저자이자 시의회 의장인 매튜 브라운이 중심이 돼 추진한 ‘공동체 자산 구축’ 전략은 높은 빈곤율과 자살률을 보이던 이 지역의 경제와 민주주의를 되살려냈습니다.
스페인 몬드라곤, 미국 클리블랜드 등의 사례에서 영감을 얻은 프레스턴 시는 공공부문 조달(물품 및 서비스 구매)의 지역 내 시행, 노동자 소유 협동조합 육성, 사회주택(social housing) 공급, 생활임금 도입 등을 통해 지역에서 만들어진 부가 외부로 유출되지 않고 지역 내에서 순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지역의 고유자원과 시민들의 힘을 바탕으로 내생적 발전을 이뤄낸 것이지요.
프레스턴의 과거 모습은 데칼코마니처럼 지금 우리사회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수도권 집중, 지방소멸, 시민들의 삶의 질 하락과 민주주의의 위기 등을 어떻게 넘어서야 할까요. 이 책은 ‘프레스턴 모델’이라고 불리는 ‘사회혁신’이 2023년 한국사회에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난 4월, 희망제작소 자치분권센터의 이미경 연구위원과 송정복 센터장은 한 달 내내 밤낮이 바뀐 생활을 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오랜만에 재개되는 목민관클럽 해외연수의 대상지를 프레스턴으로 정했고, 두 연구원은 AI 번역 앱의 도움을 받아가며 ‘프레스턴 모델’ 관계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연수 기간이 지방의회 선거를 겨우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고, 국내 전문가들 중 프레스턴을 방문해 현장을 직접 본 사람도 없었습니다.
4월27일부터 29일까지 2박3일 동안 영국판 희망제작소라 부를 만한 맨체스터의 지역경제전략센터(CLES) 방문, 프레스턴 모델의 주요 앵커기관인 센트럴랭커셔대학(UCLan)과 목민관클럽의 국제컨퍼런스, 프레스턴 시의회에서 진행된 매튜 브라운 의장 주최 세미나, 매튜 브라운 의장의 안내를 받아 진행된 반나절의 현장 투어 등이 숨 가쁘게 이어졌습니다.
방문지 중 Leighton가(街) 카라반 파크의 주택협동조합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원래 랭커셔 주 정부 소유지에 카라반(여행 트레일러)을 세워두고 생활하던 아일랜드계 빈곤층 20여 가구는 주정부의 공공자산 매각으로 쫓겨날 처지였지요. 그런데 프레스턴 시의회가 만장일치로 결의해 이 땅을 시유지로 편입하고, 주택협동조합을 육성해 저렴한 임대료로 운영되는 마을을 관리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동네의 모습은 정갈했고,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지요.
이번 연수에 큰 도움을 준 센트럴랭커셔대학의 줄리언 맨리 교수는 “프레스턴 모델의 본질이 뭐냐”는 질문에 대해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일”이라고 답하더군요. 프레스턴에서 만난 매튜와 줄리언은 한국에서 온 동료들에게 사회혁신이 무엇을 겨냥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줬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인들은 소란하고 폭력적인 세상을 등지고 안락한 집에 틀어박히길 원했습니다. 때마침 대규모 도시계획으로 교외에 주거단지들이 생겨났는데, 공급자의 수익성을 최대한 고려해 설계된 이곳은 온통 집과 도로뿐, 공원이나 놀이터는커녕 상점과 카페조차 없었지요. 결국 냉장고는 점점 커지고 자동차 수는 식구 수만큼 늘었습니다. 그렇게 필요한 모든 것을 집안에 들인 미국인들은 소원대로 “거추장스러운 상호작용과 지긋지긋한 시민의 의무”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 괜찮은 가요?
미국의 도시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 웨스트플로리다대 교수는 제1의 장소인 가정과 제2의 장소인 일터(학교)만 쳇바퀴처럼 오가는 미국인들이 ‘제3의 장소 결핍’에 비롯된 각종 부작용을 견디며 외롭고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미국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겐 목적 없이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비공식적인 공공생활”을 즐길 수 있는 ‘제3의 장소’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제3의 장소는 예를 들면 영국의 펍이나 프랑스의 비스트로 같은 동네 술집과 카페입니다. 또한 마을 초입에 있는 슈퍼마켓이나 자투리땅에 조성한 작은 공원, 세탁소 옆 골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소식을 주고받고, 새로운 사람을 환대하며, 필요한 것을 나누고, 무언가 도모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이곳에선 경청의 미덕과 일상의 유머가 빛을 발하고 혐오와 가짜뉴스는 발붙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레이 올든버그 교수는 ‘제3의 공간’을 복원하는 것이 공동체 문화와 풀뿌리 민주주의를 향한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책의 초판은 1989년에 나왔고, 그해 <뉴욕타임스 북 리뷰> ‘올해의 책’에 선정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기업인과 도시계획가, 행정가들이 거주민의 삶과 공간을 연결지어 생각하는 계기가 된, 도시사회학 분야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초판 발간 10년이 되던 1999년 저자는 그간의 연구결과를 보태 개정판을 냈는데, 2019년 풀빛출판사가 이 개정판을 옮겨 국내에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경험했지요. 세상 내향적인 ‘I’들마저 아련한 회식의 추억에 잠길 뻔했던 그때, 사회적 거리두기는 우리가 진정 사회적 존재임을 깨닫게 했습니다. 청년 활동가이자 기업인인 김태진 ㈜동네줌인 대표는 “청년문제를 풀려면 우선 청년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를 풀기 위한 좋은 시작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모이려면, 한번 가보고 싶고 자꾸만 들르고 싶은 ‘공간’이 필요합니다. 30여 년간 “제3의 장소가 우리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끌 것”이라던 호소한 노학자의 이야기에 다시금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입니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정부와 기업을 보고 있자면 답답한 마음이 들죠. 나라도 무언가 해야되겠다는 마음이 솟구칠 때 이 책을 집어들면 됩니다. 특히 설거지, 요리, 분리수거 등 살림을 할 때 활용할 수 있는 제로웨이스트 팁이 가득 담겨 있는 책입니다. 쓰레기를 줄이는 방법은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이 책은 소비를 줄이는 법뿐만 아니라, 식재료를 오래 보관하는 법, 지저분한 플라스틱을 깨끗하게 세척하는 법, 이미 생겨버린 쓰레기를 똑똑하게 응용하는 법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독자 15만명을 보유한 유튜브 ‘살림스케치’ 운영자의 책입니다. 저도 유튜브에서 저자의 살림 꿀팁을 엿보다 책까지 구입해보게 되었는데요. 본인만의 제로웨이스트 살림 노하우를 영상으로 찍어 올린 후, 따라해보겠다는 시청자들의 반응에 뿌듯함을 느끼고 영상을 계속 올리신다고 합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쓰레기를 봉투에 담아 내다 놓으면 내 눈 앞에선 사라지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는 존재합니다. 어쩌면 제가 죽은 후에도 옆동네 땅 속에서 썩기를 기다리며 묻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단지를 접어 그릇으로 쓰거나, 일회용 마스크를 버리기 전 창틀을 닦는데 쓰는 일이 누군가에겐 궁상스럽게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부족하게나마 무언가를 하는 것이 낫겠죠. 이 책과 함께 내 손에서 한 줌의 쓰레기라도 줄여 미래 세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렵니다.
혹시 책을 사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저자의 유튜브 ‘살림스케치’를 방문해보세요.
기차가 고장 났습니다. 옆 선로에는 작업자 한 명, 다른 선로엔 다섯 명이 있습니다. 당신이 기관사라면 한 명을 희생시켜 네 명을 구할 건가요? 어떤 것이 정의로운 선택일까요? 이 책은 구제 금융, 모병제, 대리 출산과 같은 현실 문제를 비롯해 고통의 대가를 계량하는 시험과 같은 사고 실험을 예시로 삼아, 위대한 사상가들은 ‘정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비판적으로 살펴봅니다.
다수에게 도움이 되는 결정을 지지하는 제러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는 고문이나 대리 출산과 같은 인간의 존엄성 문제를 푸는 데는 도덕적 한계를 지닙니다. 친구를 위해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비도덕적일까요? 오로지 순수이성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지만, 인간의 감정과 상황을 고려하면 비도덕적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이 책은 비판적인 사고로 ‘정의’에 대해 고민하고 논쟁합니다. 이로써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정의’의 개념을 확립해 나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 책을 끝까지 읽는 데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였습니다. 책장을 넘기기 힘들었습니다. 마이클 센델이 던진 질문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부러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도덕적 딜레마를 던집니다. 어떤 거장의 이론도 딜레마를 완벽하게 풀 수는 없습니다. 이런 사고 실험으로 센델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끊임없이 이 시대에 맞는 정의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책을 읽다, 제가 ‘정의’라고 믿었던 개념과 기준이 흔들렸습니다. 그 흔들림 때문에 쉽지 않은 독서였지만, 또 그 흔들림 때문에 제 사고의 폭이 넓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혐오를 거침없이 내뱉은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에 승리했다는 걸 알게 된 날 밤,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이 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국가 최고 수장의 이런 발언은 혐오에 허가증을 내주는 격입니다. 누스바움은 정신분석, 문학, 철학 등을 전방위로 훑어 혐오의 근원을 파헤칩니다. 혐오의 뿌리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에 빠진 사람은 두 가지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는 의지할 대상,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죠. 그래서 두려움은 민주주의를 위협합니다. 두 번째는 타자에 대한 혐오입니다. 자기 약함을 직면하기 싫어 사회적 소수자에게 투사하는 것이죠. 권력을 꿈꾸는 자들은 이를 이용합니다. 두려움을 조장할수록 대중이 자신에게 의지할 확률이 커지니까요. 또 사회적 문제들을 정부가 아니라 외부자 탓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트럼프가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저기, 우리를 공격하려는 무슬림이 온다!’
“두려운 사람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한 대 얻어맞은 거 같았습니다. 이제까지 제 삶 전체를 되돌아보게 되더라고요. 두려움에서 도피하는 데 온 인생을 써온 것 같아 슬펐습니다. 자기 존재가 바스러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남의 사정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관심의 에너지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향할 수밖에 없죠. 모든 아기는 두려움 속에서 태어납니다. 무력하니까요. 아기들은 이 두려움을 울음이나 떼 같은 수단으로 부모를 ‘통제’해 해소하려고 합니다. 자라며 사람에 대한 신뢰가 쌓이면 두려움을 다루는 성숙한 방식을 터득하게 됩니다. 사회가 성숙해 가는 방식도 비슷한 거 같습니다. ‘두려움’은 어떤 정책에 대해 평가할 때 좋은 기준이 될 거 같습니다. 이 정책은, 우리를 더 두렵게 만들 것인가? 서로를 더 경쟁자로 보게 만들 것인가? 타인에 대한 불신을 키울까? 그렇다면 그 정책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권력을 위한 것입니다.
정리: 김소민 시민이음본부 연구위원